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24화 (124/351)

# 124

24화

“정아.”

“어.”

“우리 친구 맞지?”

“어. 넌 내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야.”

“나도.”

학성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기뻐서, 너무 기뻐서 흔들리는 것이다. 그의 웃음도 더욱 진해졌다.

기억하고 있었다.

학성은 어릴 적 소중한 순간들을 자신만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현이 술잔을 들었다. 학성도 술잔을 들었다. 둘은 소리 없이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둘의 웃음으로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순간 부드럽게 풀렸다.

“부럽군.”

야율황기가 그런 둘의 모습에 입맛을 다시며 홀로 술잔을 들었다.

마현은 술잔을 내리며 남궁혁 일행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빛이 한순간 차갑게 변했다.

『내 친우가 너희들의 목숨을 살렸다.』

새하얗게 질리는 그들을 보며 마현은 시선을 거두었다.

“근데 현아.”

“응?”

“설 소저는 왜 그렇게 나간 거야?”

학성은 설린이 나갈 때 마현을 노려보고 나간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호호호호, 저는 알지요.”

야율선이었다. 그녀는 마치 악동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시선이 야율선에게로 집중되었다.

“말해 줄까 말까요?”

“아! 답답하네. 그냥 속 시원히 말해 주시면 안 되겠소?”

개방 제자답게 걸개아는 궁금한 것은 잘 참지 못한다. 그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채근했다.

“마 공자님도 궁금하세요?”

“궁금하오.”

설린이 왜 그런 표정과 전음을 남기고 간 것인지 마현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저 역시 긴가민가했는데……, 아까 설 언니 모습에 딱 감이 오더라고요.”

“나도 알겠군, 크크크.”

야율황기 역시 야율선처럼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야율황기마저 그러니 좌중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그건 마 공자께서 만년설보다 더 꽁꽁 얼어붙어 있던 설 언니의 마음을 녹였기 때문이죠.”

“……!”

마현의 몸과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를테면…… 마 공자님은 설 언니의 뜨거운 태양?”

마현의 반응이 재미가 있었던지 야율선은 더욱 얄궂은 농을 건네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습니까?”

학성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환하게 웃으며 야율선에게 물었다.

“내기를 걸어도 좋아요.”

“하하하하.”

학성은 마현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현이가 이런 재주가 있었는지 몰랐는데. 뭐해? 어서 나가 보지 않고.”

“……하지만.”

“나는 괜찮아. 무림대회가 끝나려면 멀었어. 나야 도사가 되어 여인을 만날 수 없지만 너는 아니잖아?”

마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내 소원이 하나 더 생겼다.”

“……?”

“네놈 장가가는 거.”

학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현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등을 떠밀었다.

“나도 제수씨 한 번 보자!”

“저, 정아.”

마현은 말까지 더듬으며 학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에 그만한 여인도 없어 보인다.”

학성은 마현을 계단 앞까지 잡아끌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눈이 내린다더라. 아닌 건 아니더라도 일단 마음을 풀어줘. 그래야 사내지.”

“휴우…….”

마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부탁이다.”

그 말에 마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 * *

마현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설린의 얼굴이 떠오른 뒤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서다. 물론 그녀에 대한 어떤 감정이 생겨서는 아니다.

야율선의 말이 머릿속을 울리며 설린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설린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그나저나, 어디서 그녀를 찾나?’

학성에게 떠밀려 내려왔지만 어디로 간지 모르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그냥 다시 올라갔다가 학성의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거 참.’

마현은 한숨을 쉬며 푸념을 삼켰다.

하지만 그의 그런 고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주루 1층으로 내려오니 설린을 항상 호위하던 설영대와 대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전 그녀를 따라 내려간 냉천휘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이 주루 1층에 있는 것을 보면 설린은 멀리 가지 않은 듯했다.

마현이 내려오자 구석에 앉아 자작하던 냉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마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모습에 냉천휘는 미소를 지으며 주루 뒤뜰로 향하는 문을 가리켰다.

“설 사저라면 주루 뒤뜰에 있습니다.”

“……고맙소.”

어색하게 고개를 다시 숙이고 마현은 뒤뜰로 향했다.

뒤뜰로 나가니 자그만 연못이 있었고, 그 앞에 설린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문을 등지고 있어 마현을 보지 못한 듯싶었다.

조용한 뒤뜰이라서 그런지 마현이 발걸음을 떼자 바삭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는 명을 못 들었나?”

싸늘한 설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뒤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흠, 흠!”

마현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설린의 몸이 흠칫하며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마현은 설린 바로 옆으로 다가가 섰다. 하지만 설린을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설린 또한 마현임을 알았지만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참!’

일단 설린을 찾아왔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르센 대륙에서 대흑마법사 카칸으로 40년 넘게 살았지만, 당시에도 그는 여인을 만난 적도, 마음에 품은 적도 없었다. 정 여인이 그리우면 사창가나 마탑에서 제공하는 창녀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니 사실상 마현은 여인에 대해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시간만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을 느낀 것은 마현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 서 있자니 설린의 존재가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흠흠…….”

“…….”

기척을 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설 소저. 거……, 달이 참 밝소.”

마현은 그리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마 공자 눈에는 지금 달이 보이는 모양이죠?”

하늘에는 구름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현은 당황해 서둘러 다시 말을 꺼냈다.

“연못의 비단잉어가 참으로 예쁘오.”

“연못에는 비단잉어가 없답니다.”

마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다 이내 붉어졌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느낀 마현은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허험, 험,”

그런 모습에 설린이 살짝 고개를 돌려 마현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마현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풋!”

그 모습에 설린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현은 그 웃음에 고개를 돌렸다.

“흥!”

눈이 마주치자 설린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미안하오.”

마현은 다시 연못으로 고개를 돌리며 사과했다.

“달이 참 예쁘네요.”

설린의 말에 마현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달이 구름에서 벗어나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 * *

숭산은 아름다운 시내가 많고,

화산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많으며,

형산은 아름답고 특이한 멧부리가 많고,

상산은 아름답게 늘어선 멧부리가 많으며,

태산은 특히 주봉이 아름답다.

嵩山多好溪 華山多好峰

衡山多好別岫 常山多好列岫

泰山特好主峰

곽희가 그리 노래했다.

그의 시 한 구절처럼, 눈에 보이는 화산은 높고 험준했지만 봉우리마다 절경(絶景)이었다.

산은 흡사 시퍼런 칼날로 하늘을 찌르듯 꼿꼿하게 머리를 세우고 있었고, 사방으로 거침없이 뻗어나간 산세는 위풍당당했다.

그 험준한 화산 중턱에 화산파가 있었다.

정파의 구심점이라는 무림맹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4년에 한 번씩 맹주가 선출되는데, 그때 선출된 맹주가 있는 문파가 곧 무림맹이었다. 즉, 올해 화산파에서 무림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화산파 장문인이 무림맹 맹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림대회가 열린 지 닷새가 지나 엿새로 접어들었다.

오늘 화산파에서는 무림대회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본선이 치러진다. 그리고 정파 수뇌부들의 회합이 있으며 마현은 그 회합에 초대되었다.

사실 회합이라고 하지만 그냥 얼굴이나 익히고, 서로를 탐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마현은 사천총타에서 보내온 사두마차를 타고 화산파로 올라갔다.

“오랜만이야, 회회혈마.”

사천총타에서 마차만 올 줄 알았는데 그 마차에 회회혈마가 타고 있었다.

“홀로 적적하실 것 같아 속하가 왔습니다.”

회회혈마는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본교가 아닌 외부에서 그대를 보니 더 반갑군.”

“그리 봐주신다니 속하는 그저 황공할 따름입니다.”

회회혈마는 잘 접히지도 않는 절구통 같은 허리를 애써 숙였다.

“그나저나 주군.”

“말하게.”

“주군의 활약상이 지금 본교 내에 쫙 퍼졌습니다.”

“활약상?”

“사천성과 청성파 말입니다.”

회회혈마는 능글맞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보니 자네가 퍼트린 것 같아 보이는데?”

“하하하.”

회회혈마는 부정하지 않았다.

“덕분에 세력을 어렵지 않게 더 불릴 수 있었습니다.”

“수고했네.”

“그저 신하된 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올라가서야 화산파 경내로 들어가는 산문이 보였다. 마차는 산문을 들어서자마자 섰다.

마차에서 내리니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제각기 떠들어대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마현과 회회혈마, 그리고 흑풍대에게 쏠렸다.

“대연무장까지 제가 모시지요.”

화산파 제자가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그곳은 일반인들은 통행이 불가한 옆길이었다. 화산파 제자를 따라 걷다 보니 조금 앞서 걸어가는 무인들이 보였다.

청성파였다.

그들 역시 마현 일행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

은은한 살기가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흥!”

회회혈마는 청성파를 향해 코웃음을 치고는 마현을 향해 허리를 살짝 굽혔다.

“가시지요, 주군.”

그 모습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던 화산파 제자 역시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마현 일행은 결국 멈춰서 있던 청성파 무리를 스쳐지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더욱 진한 살기를 피워댔다.

특히 무리를 이끌고 앞서 걷던 이는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었다.

마현은 그런 그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그들을 지나쳐 조금 더 걸어가니 거대한 비무대가 만들어진 대연무장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몇몇 인물들이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몇몇 보였다.

“마교 대공자이신가?”

화산파 특유의 매화가 그려진 무복을 입은 장년인이 다가왔다. 굳이 소개받지 않아도 화산파 장문인이자 무림맹 맹주인 담기량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맹주직을 맡은 담기량일세.”

“마현이라 합니다.”

마현은 그의 소개로 뒤에 서 있는 인물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오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육대세가의 가주들이었다.

소개를 받는 동안 마현은 상반된 느낌을 받았다.

바로 청성파를 필두로 오파일방은 은은한 반감을, 육대세가는 은근히 고소해하는 표정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아마 청성파와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무림맹 내에서 오파일방과 육대세가 사이에 반목이 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 정도까지 반목하는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재밌군.’

그런 느낌을 받으며 마현은 무림맹에서 만들어 놓은 귀빈석으로 이동했다.

“대공자도 알다시피 회합은 오늘 본선이 끝난 후일세.”

“알고 있습니다.”

“비록 긴 시간이나 기다리는데 심심치는 않을 걸세.”

“잘 보겠습니다.”

마현의 말에 담기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빈석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편히 쉬면서 구경하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본파 제자를 시키면 될 것일세. 본인은 다른 접객들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담기량을 비롯해 각 문파 장문인과 가주들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그 자리에 서서 마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