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25화
무당파 장문인 청하진인이었다.
필시 학성 때문일 것이다.
다른 장문인과 가주들이 내색 하지 않았지만 아마 저들의 귀에도 자신과 학성에 대한 소문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마현은 자신을 쳐다보는 청하진인을 보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회합 후에 빈도를 위해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으신가?』
『그리하지요.』
“무량수불.”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눈빛으로 마현을 쳐다보던 청하진인은 도호를 낮게 읊조린 뒤 담기량을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마현은 걸어가는 청하진인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본선 비무장이 훤히 보이는 귀빈석으로 올라갔다.
“어이, 마 형. 여기야, 여기!”
귀빈석으로 올라가자 야율황기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남만야수궁 옆에 비어 있는 곳이 무림맹에서 마련한 마현의 자리인 모양이었다.
마현은 야율황기와 야율선에게 가볍게 목례를 취하며 야율황기 옆에 비어 있는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회회혈마가 앉았고, 그 뒤로는 흑풍대가 자리를 잡았다.
귀빈석은 중앙에 무림맹 인사들이 앉았고 우측에는 마교와 남만야수궁, 그리고 좌측에는 북해빙궁과 남해태양궁이 배정받은 듯했다.
그렇게 찬찬히 귀빈석을 살피던 마현은 반대쪽에 앉아 있는 설린과 눈이 마주쳤다.
설린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마현 역시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날 밤 뒤뜰에서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처음 어색하게 몇 마디 말을 건넨 이후 둘은 나란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이 다였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반 시진 정도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다, 역시 말없이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날로부터 엿새가 지난 오늘 다시 보는 것이었다. 다행히 설린은 자신에게 난 화가 많이 누그러진 듯 보였다.
며칠 만에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눴지만 마현은 설린이 연신 신경 쓰였다.
아니, 오늘만이 아니었다. 요 며칠 그녀가 자꾸 떠오르며 신경을 건드렸다.
『어찌 그동안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았나요?』
그때 들려온 그녀의 전음이 가슴에 콱 박혔다. 하지만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데 만나면 더 신경 쓰일 것 같아 찾을 수 없었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신경 쓰이는 것도, 그녀의 질문에 달리 둘러댈 말이 없는 것도 그의 심사를 불편하게 했다.
문득 그녀와 관계된 모든 게 기분을 언짢게 했다.
『그리 되었소.』
그래서일까. 대답하는 마현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정말, 정말 당신은…….』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뒤에 무슨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마현은 한참이나 그녀의 전음에 집중했지만 더 이상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현은 원거리를 확대경처럼 가깝게 볼 수 있는 텔러스코웁(Telescope) 마법으로 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데 눈 끝에는 보일듯 말듯 작은 물기가 맺혀 있었다.
아마 마법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그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젠장.’
그 눈물을 보자 마현은 자신답지 않게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이게 다 야율선의 말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 기억을 머리에서 도려내고 싶었지만 그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울컥 신경질이 나면서도 한편 답답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생각했다. 결과가 어찌되든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설 소궁주.』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그럴 거라 예상한 바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 시간 좀 내주시오.』
마현은 설린을 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언제부터일까?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정말인가요?』
『그렇소.』
『마 공자님은 정말……, 알았어요.』
마현은 그때서야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뭘 그리 열심히 사랑 이야기를 나누실까?”
옆에 앉아 있던 야율황기가 실실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니야.”
“아니긴……, 들어오자마자 설 소궁주만 보며 계속 전음을 보내는 것 같던데?”
야율황기의 말에 마현은 실소를 터트렸다.
반대편 북해빙궁 자리 바로 옆.
그곳에는 어제 도착한 남해태양궁 소궁주인 양곽원이 앉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있는 듯 보였지만 반대편에 자리한 마현을 보며 입술 안쪽을 자근자근 씹어대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설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잡기 위해 나란히 앉으며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조금이라도 더 얘기를 나누고자 부단히도 애를 썼다.
헌데 마현이 들어서자마자 대화가 끊어졌다. 설린이 일방적으로 대화를 자르며 마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었다. 미미하긴 했지만 그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설린의 표정이 왠지 부드럽게 느껴졌다.
양곽원은 순간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그것은 설린이 결코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던 표정이었다. 그는 폭발할 듯한 가슴을 억누르며 옆 눈으로 설린을 주시했다.
그렇게 마현을 쳐다보던 설린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음을 주고받는 듯했다.
양곽원의 주먹이 무릎 위에서 억세게 쥐여졌다.
질투심이 섞인 살기 어린 눈동자가 마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현은 웃고 있었다.
‘조만간 그 웃음도 더 이상 짓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은!’
양곽원의 눈동자에서 살심이 맴돌다 사라졌다.
* * *
둥. 둥. 둥. 둥. 둥!
귀빈석이 어느 정도 찰 무렵, 대연무장에서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북소리에 맞춰 귀빈석 중앙으로 무림맹 수뇌부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그 중앙에는 맹주이자 화산파 장문인인 담기량이 서 있었다.
담기량이 손을 슬쩍 들자 북소리가 딱 멈췄다.
동시에 시끌시끌하던 대연무장 내 소음도 딱 끊겼다.
“지금부터 무림맹 주관 무림대회 본선을 시작하노라!”
내력이 담긴 담기량의 목소리가 대연무장과 비무대 위를 가득 채우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무림맹, 만세!”
“맹주 담기량, 만세!”
“우와아아아!”
잠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대연무장 안이 한순간 함성으로 뒤덮였다.
담기량은 우선 무림맹 내 인사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취한 후, 마현을 비롯해 새외 삼궁을 향해서도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 다음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간단한 축사 등이 이어졌다.
그사이 시녀들이 나타나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빈승은 소림의 무허라고 하오, 아미타불.”
모든 사전 행사가 끝나자 한 소림사 무승이 비무대 위로 몸을 날려 올라섰다.
“모두 주목해 주시오. 빈승이 이번 무림대회에서 부족하지만 심판을 맞게 되었소이다. 그럼 지금부터 무림대회 본선을 시작하겠소이다.”
“무허라…….”
“소림의 장경각주입니다, 주군.”
회회혈마가 마현의 중얼거림을 듣고 그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여기 대진표가 있습니다.”
귀빈석에만 지급된 대진표가 적힌 종이를 회회혈마가 내밀었다.
‘학성이 첫날이라 들었는데…….’
마현은 대진표 안에서 학성의 이름을 찾았다.
‘여덟 번의 비무 중 여섯 번째군.’
한 비무에 허용된 시간이 대략 한식경이다. 어림잡아 적어도 한 시진은 흘러야 볼 수 있을 듯했다. 마현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마현은 비무대에서 치러지는 비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처럼 패도적인 면은 없었지만 상당히 깔끔한 무예를 펼치고 있었다.
‘이것이 정파의 무공인가?’
제대로 된 정파의 무공을 보며 마현은 안목을 상당히 높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네 번째 비무가 끝났다.
마현은 몸을 살짝 일으켜 세웠다.
다섯 번째 비무의 승자가 학성의 다음 비무 상대자였기에 어느 정도 관심이 간 것이다.
“다섯 번째 비무자, 산서성의 신도문(神刀門) 소문주 광풍도(狂風刀) 곽운도!”
진행자의 목소리에 한 사내가 민첩하게 몸을 띄워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이십대 중후반의 사내였다.
“와아아!”
“우와아!”
그가 비무대에 올라서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 함성의 대부분은 낭인들이나 예선에서 탈락한 중소문파들의 무인들이 내지른 것이다.
어지간한 중소문파 무인들이 본선에 진출하기란 바늘구멍에 낙타가 지나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한다. 그런 본선에 당당히 진출했으니 그들의 응원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대진은 아니군.’
마현이 그리 생각할 때 진행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화산파 일대제자, 오도평!”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조금 전 비무대로 올라온 곽운도보다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여기가 바로 화산파이고 지금 등장한 이가 바로 화산파 제자인 까닭이다.
날렵하게 올라간 화산파 제자 오도평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무대에서 소개되면서 별호가 불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동안 무림에서 활동을 안 했거나 예선에서 의외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올라온 듯싶었다.
마현은 누가 학성과 붙게 될지 궁금했는지라 관심을 가지고 둘을 살폈다.
‘음?’
자세히 둘을 살피던 마현은 오도평을 보며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그 기운을 느꼈다. 희미하지만 친숙함과 거부감이 동시에 느껴진 것이다.
마현에게 친숙한 것은 어둠이다.
하지만 화산파 제자에게서 그 느낌이 묻어나올 리는 없다.
‘착각인가?’
요 며칠 설린으로 인해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마현은 곧 그런 느낌을 털어내고 비무대에 집중했다.
그사이 둘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신도문의 곽운도였다.
광풍도라는 별호가 잘 어울릴 만큼 곽운도는 격식은 조금 떨어지나 실전적이고 감각적인 도법을 펼쳤다. 또한 이기겠다는 투기가 섞여 그의 도는 엄청난 바람소리를 내며 상대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 도법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오도평이 검을 뽑아들었다.
“어림없소이다!”
낭랑하게 목소리를 터트리며 오도평은 단숨에 앞으로 튀어나가 곽운도와 검을 마주했다.
캉 캉 캉 캉―!
검과 도가 부딪혔다.
일반적으로 검과 도가 부딪히면 검이 밀린다.
도는 오로지 베기 위한 병장기였고, 검은 찌르기가 특화된 병장기였던 까닭이다. 헌데 검이 도를 몰아치고 있었다. 내력의 차이도 있겠지만 오도평이 선보이는 검은 곽운도의 도보다 훨씬 패도적이었다.
“회회혈마.”
“예, 주군.”
“화산파의 검은 현란하고 빠른 변검과 쾌검 위주가 아니던가?”
“속하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절 변화 없이 우직한 패검이라……. 내력 역시 그에 잘 어울리는 패력을 담고 있어. 재밌군.”
하지만 재미는 거기서 끝났다.
다분히 패도적인 검이라 여겼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승기를 잡기 위해 더욱 몰아치는 오도평의 검은 패도를 넘어 음산한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또한 검 하나하나가 살초를 담고 상대를 압박해 나가고 있었다.
검술의 외형만 화산파의 것일 뿐, 그 속에 담긴 살기와 패도는 결코 정파의 정순한 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이했다.
“주, 주군!”
비무대를 보던 회회혈마가 마현을 불렀다.
“왜 그러나?”
“화산파 제자가 선보이는 것은……, 본교 금마공인 혈폭증살마공(血爆拯殺魔功)입니다.”
“뭐라?”
마현은 깜짝 놀라 회회혈마를 바라보았다.
“확실합니다. 그 금마공을 익힌 놈을 15년 전 속하가 죽였습니다. 그 후 금마공으로 분류돼 수련이 금지된 것입니다.”
회회혈마의 눈동자에서 은은한 마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피를 폭발시켜 일시에 내력을 증폭시키고, 그 힘으로 검에 살기를 담는 마공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너무나도 큰 부작용이 뒤를 따릅니다. 인성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 화산파 제자는 그리 성취가 크지 않은 듯해 부작용이 지금 드러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어떻게 본교 금마공이 이처럼 중원을 떠도는 것인가?”
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와 주위를 가득 채웠다.
“흑풍대주.”
“예, 주군.”
“본교 금마공을 회수한다. 지금 당장 비무대를 에워싸라!”
“명!”
마현의 명이 떨어지자 흑풍대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대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흑풍대는 일제히 검을 뽑으며 비무대로 올라가 에워쌌다.
갑작스럽게 흑풍대가 비무대 위로 올라가 비무를 벌이고 있는 두 무인을 에워싸자 무림맹 수뇌부들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짓인가?”
무림맹 맹주이자 화산파 장문인이 노기가 담긴 목소리를 터트렸다. 더욱이 지금 비무대에서는 화산파의 제자가 놀라운 선전을 보이고 있질 않은가.
“정녕 정마대전을 원하는 것인가?”
마현은 맹주의 말을 흘리며 비무대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 발은 허공을 밟고 있었다.
“허, 허공답보다!”
“마교 대공자다!”
마현은 온몸으로 마기를 내뿜으며 비무대 위 허공으로 걸어갔다.
챙 챙 챙!
그 순간 대회를 주관하는 화산파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비무대로 달려왔다.
“마교 대공자!”
무림맹 맹주 담기량의 입에서 다시 노기가 담긴 호통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마현은 오도평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찌 화산파 제자가 본교에서도 금지한 마공을 익히고 있나?”
마현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지며 한순간 비무대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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