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화
음산한 귀기로 가득 찬 어두운 방.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한 그림자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림맹에 회회혈마를 보내놓았습니다.”
그림자 앞으로 한 장년인이 바투 다가서며 대답했다. 그는 군사 율기였다.
“이장로를?”
“화산파에 슬쩍 흘린 금마공은 과거 회회혈마의 손에 회수된 것입니다.”
“재미난 일을 꾸몄군.”
흡족함이 담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회회혈마라면 혈폭증살마공을 쉬이 알아볼 것입니다.”
율기 또한 득의양양한 표정을 한껏 지었다.
“마현의 성격상 제아무리 무림맹 한복판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소림주.”
“사천성에서의 일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어둠 속의 인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현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봤나?”
술술 막힘없이 대답하던 율기가 그 질문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그자의 능력은 언뜻 무공 같지만 왠지 무공으로 포장된 다른 힘 같다는 생각을 쉽사리 떨칠 수 없어…….”
어둠 속 사내는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 위를 툭툭 내리쳤다.
“거기에 강시라니 말이야. 귀와 혼을 다스리는 본 림(林)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죄송합니다, 소림주.”
“이왕이면 화산파에서 마현이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왠지 살아나면 골치 아파질 것 같단 말이야.”
“그 점이라면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마 살아서 마교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쉽지 않을 일일 텐데…….”
“새외삼궁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이미 방도를 다 마련해 두었습니다.”
율기의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어졌다.
* * *
단둘이 힘을 겨뤄야하는 비무대 위에 당사자인 화산파의 오도평과 신도문의 곽운도 말고도 서른 명의 흑색 피풍의를 입은 자들이 함께 올라서 있었다.
바로 흑풍대였다.
그들은 비무대 위를 마기로 가득 채우며 오도평을 에워쌌다. 자연스레 곽운도는 비무대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그 비무대 위 허공.
마현이 허공을 딛고 선 채 오연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찌 화산파 제자가 본교에서도 금지한 마공을 익히고 있나?”
마현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기에 살기가 더해지자 그 일대는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오도평은 이를 악물며 마현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오도평은 그리 외치면서도 귀빈석 중앙에 있는 담기량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갈!”
마현은 일순간 마기를 담아 소리쳤다.
엄청난 마력이 담긴 일갈에 오도평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불안한 시선은 여전히 담기량을 향해 있었다.
“정녕 이게 마교의 뜻인가?”
그 순간 노기가 담긴 담기량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현은 담기량을 향해 허공에서 몸을 돌렸다.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화산파 제자가 마교에서도 금지한 금마공을 익힌 저의가 무엇입니까?”
휘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은 담기량의 기세에 마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기세가 맞부딪힌 공간은 세찬 바람이 회오리치듯 기의 파장으로 일렁거렸다.
“누가 금마공을 익혔다는 것인가? 본 맹주의 눈에는 엄연한 화산파의 무공인 것을!”
오도평의 비무를 보며 흐뭇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께름칙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그가 오도평의 검이 화산의 것과 궤를 달리하는 점을 못 봤을 리 없다.
좀 더 알아봐야 할 거라 여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수천, 수만의 눈이 지금 자신과 마현에게로 모여 있는 까닭이다.
“알겠소.”
마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흑풍대는 들으라!”
“명!”
“오도평을 사로잡으라. 본인이 직접 심문할 것이다!”
챙 챙 챙 챙―!
흑풍대는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무림맹 무사들은 비무대를 에워싸라! 지금 당장 본파 제자를 구하라!”
담기량의 격한 목소리 또한 터져 나왔다.
창 창 창 창 창 창―!
비무대가 설치된 대연무장 곳곳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그로 인해 비무대 주위는 한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화산파 제자들이 주축이 된 무림맹 무사들이 뒤로 물러나는 이들을 무시하고 비무대 앞으로 달려들었다.
흑풍대보다 몇 배나 많은 이들이 비무대를 에워쌌다.
“대공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바요. 당장 흑풍대를 거두시오!”
담기량은 여차하면 공격 명령을 내릴 기세였다.
“그건 화산파 제자가 본교 금마공을 익혔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소리요?”
담기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현의 질문은 담기량이 그것을 수긍하면 흑풍대를 거두겠다는 뜻이다.
갈등이 번졌다. 담기량으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흑풍대를 강제로 제압한다면 정마대전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화산파의 제자를 추궁하자니 꺼림칙했다. 게다가 다른 각 문파, 특히 오파일방과 평소 경쟁관계에 있는 육대세가의 눈이 있었다.
물론 자파 제자가 금마공을 익히지는 않았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조금이라도 드러난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된다.
난감한 담기량은 뜻밖의 응원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남해태양궁 소궁주 양곽원이었다.
“참으로 무례하오!”
귀빈석에 앉아 있던 양곽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현을 향해 호통을 쳤다.
“원래 성정이 이처럼 발칙한 것이오, 아니면 정마대전을 일으키려는 마교의 간악한 술수요? 이 양 모는 아니 물을 수가 없겠소이다!”
담기량으로서는 이보다 더 달디 단 샘물도 없을 것이다.
힘을 얻은 담기량은 더욱 마현을 압박할 요량으로 귀빈석 가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양 소궁주의 말을 들으니 이 청성의 빈도 역시 의심을 아니 할 수 없겠소이다! 또한 사천성에서의 일도 다시 한 번 묻고 싶어지는구려!”
청성파 장문인 청허자였다.
청허자는 담기량의 말을 지원해 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그보다 한 발 더 앞서나가 온몸으로 도력이 깃든 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마현과의 인연이 악연이라면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청성파의 장문인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청성파가 그렇게 나서자 무당파를 제외한 이들이 일제히 내력을 발산시켜 마현을 더욱 압박해 들어갔다.
무당파는 학성과 마현 사이의 관계가 있고, 이제는 타계한 현도상인의 유언으로 인해 반걸음쯤 물러난 것이라 이해가 되지만 육대세가는 달랐다. 아예 한 걸음 멀찍이 떨어져 오파일방과는 달리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일 것이다.
육대세가는 흡사 승냥이 떼처럼 눈동자를 반짝이며 뭔가 꼬투리를 물으려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들 역시 무인이다 보니 화산파 제자에게서 미약하지만 음습한 기운을 이미 느낀 것이다.
단순히 그냥 지나칠 정도의 미약한 느낌이었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에게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파일방을 누르고 육대세가가 올라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마현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권다툼으로 인한 묘한 이질적인 반목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양 모는 참된 무림의 질서를 위해 무림맹에게 한 팔 아니 거들어 줄 수가 없겠소!”
양곽원이 마현을 향해 외치고는 몸을 돌려 무림맹 귀빈석을 향해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게 남해태양궁의 뜻인가?”
이쯤 되면 꼬리를 말 줄 알았는데, 마현에게서 들려온 소리는 그가 예상했던 바와는 정반대였다.
양곽원의 눈 한쪽이 살짝 일그러졌다.
“안하무인이 따로 없군.”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양곽원이 자신에게 지독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걸 마현은 느꼈다.
“크하하하하!”
왠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마현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언제까지 그리 웃나 보자.”
양곽원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한 팔을 살짝 들어올렸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남해태양궁 무인들이 열기 가득한 내력을 뿜어내며 귀빈석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뜨겁던 열기는 누군가로 인해 한순간 식어 버렸다.
“설영대주!”
설린이었다.
“남해태양궁을 저지하세요.”
“명!”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귀빈석을 가득 덮은 후 비무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 새하얀 바람은 비무대를 뜨겁게 달구던 열기를 한순간 차갑게 식혀 버렸다.
설린의 그런 명에 가장 당황한 것은 양곽원이었다.
설마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왜?”
너무 당황한 탓일까?
적으로 돌아선 설린에게 양곽원은 너무나도 단순하게 물었다.
“저 역시 다른 문파의 제자가 북해의 빙공을 익혔다면 마 공자와 같은 행동을 했을 거예요.”
설린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무림맹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담기량의 표정은 가장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지?”
양곽원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그가 질투와 소유를 갈구하는 욕망이 뒤섞인 뜨거운 눈빛으로 설린을 노려보았다.
차자작 차작!
차가운 눈으로 양곽원을 응시하는 설린의 양손에서 차가운 냉기로 인한 살얼음이 허공에 만들어졌다.
양곽원의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분노로 인해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무림맹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될 줄 알았던 남해태양궁이 뜻하지 않은 북해빙궁의 개입으로 가로막히자, 자연스레 모든 이목은 남만야수궁 쪽으로 향했다.
애초에 남해태양궁이나 북해빙궁이 나서지 않았다면 모를까, 새외삼궁 중 이궁이 나섰다. 남만야수궁 역시 원하던, 원치 않던 자신들의 뜻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야율황기와 야율선은 여전히 귀빈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든 이목이 자신들에게 모이자 야율황기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대연무장에 모인 수천의 사람들이 침을 삼키며 야율황기를 주시했다.
“오빠, 어떻게 할 거야?”
항상 장난기가 다분하던 야율선은 평소와 달리 신중한 모습이었다. 야율황기의 표정 역시 진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한 마디로 인해 무림에 큰 파장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야율황기의 잔뜩 구겨져 있던 표정이 어느 순간 확 풀어졌다. 그가 입언저리를 말며 동생을 불렀다.
“선아.”
“왜?”
난데없는 물음에 야율선이 눈을 치뜨며 자신의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언제 고민한다고 제대로 된 답이 나오더냐?”
“그 결정, 뭐 나쁘지 않네.”
알아들었다는 듯 야율선이 어깨를 살짝 들었다 다시 내렸다.
야율황기는 그런 야율선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쓰다듬고는 목청을 높였다.
“이놈들아.”
아율황기는 시선을 비무대에 향한 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야인들을 불렀다.
“말하쇼, 소궁주!”
“그래도 안면 있고, 정을 준 놈들을 도와주는 게 좋겠지?”
야율황기는 옆에 앉아 있는 대호의 북슬북슬한 털을 쓰다듬었다.
크르릉.
주인의 마음을 읽은 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털을 빳빳하게 세웠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소궁주, 지금 우리도 뛰어들면 되는 거유?”
“알면 냉큼 내려가지 않고 뭐해?”
야율황기의 말에 야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맹수를 타고 비무대 위로 뛰어 내려갔다.
“마 형, 술 사. 거하게!”
야율황기가 귀빈석 난간 위에 한 발을 올리며 무림맹 수뇌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냐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놓았다.
『야율 형, 고맙네. 그리고 설 소저.』
허공에 떠 있는 마현과 귀빈석 앞 설린의 눈이 마주쳤다.
『고맙소.』
마현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가까이에서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희미한 미소였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설린에게는 그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설린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설린이 마현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자, 분노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떨던 양곽원이 열기가 가득한 내력을 폭출시키며 오른손을 들었다. 하지만 주먹을 내지르지는 않았다. 그저 장심에서 뜨거운 열기만 분출시킨 채 핏발이 선 눈으로 설린을 노려볼 뿐이었다.
설린은 갑작스러운 양곽원의 변화에 서둘러 내력을 끌어올리며 대비를 했다. 하지만 양곽원은 그녀를 넘어 허공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이노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