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5화
“후후후.”
마현의 입에서 가소롭다는 듯 조소가 흘러나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건가?”
마현의 눈에서 마력에 의한 마기가 아닌 죽은 자의 향기, 사기(死氣)가 흘러나왔다.
“말이 없다면 토해내게 만들면 그뿐인 것을……, 죽은 자 역시 내 명을 거부할 수 없소.”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겠다는 소리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지라 설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초혼술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 생각했지만 초혼술의 명맥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다. 한때 무림을 공포로 떨게 했던 강시술이 끊어지면서.
* * *
장문인들이 간소한 저녁식사를 끝내자 따뜻한 차가 막 탁자 위에 차려졌다.
차를 후르륵 마시던 청허자가 힐끗 문을 쳐다보았다.
‘얼추 시간이 된 듯싶은데…….’
청허자는 시선을 거두며 다시 차를 후르륵 마셨다.
콰당.
그때 장문인실이 벌컥 열리며 화산파 제자 한 명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도 경망스러운 것이냐?”
담기량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 오 사제가…….”
“……?”
“오 사제가 도, 독살을 당했습니다.”
콰당!
의자가 넘어졌다.
그 의자를 넘어트린 이는 바로 담기량이었다.
“뭐, 뭣이?”
“지금 무어라 한 게냐?”
다른 이들의 입에서도 경악이 담긴 목소리가 터졌다.
“조금 전 오 사제가 있던 별채에서 비명이 터졌습니다. 다급히 별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독에 의해 죽어 있었습니다.”
“독이라니, 독이라니!”
청허자가 억눌린 감정을 터트리며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무슨 독이라든가?”
“혈음마독이라고 했습니다.”
쾅!
화산파 제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청허자는 주먹으로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빈도는 이럴 줄 알았소이다!”
그는 어찌나 분노했는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아래로 길게 자란 수염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교의 대공자가 무림대회 중간에 간악하게도 금마공이 어쩌고저쩌고 할 때부터 진작 알아봤어야 했소.”
그러면서 청허자는 육대세가의 가주들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그 자리에서 해결을 했어야 했는데…….”
말을 돌리고 끝을 흐렸지만 청허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육대세가 가주들, 그리고 함께 자리한 장문인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문인들은 그에 동조하는 눈빛을, 육대세가 가주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하지만 당황하는 가주들 사이에서 유독 제갈묘만은 눈빛을 빛내며 의혹을 제기했다.
“별채는 쌍방의 합의 하에 화산파와 마교가 함께 지키고 있을 텐데…… 어찌 마교가 독을 먹였을까, 의문이 드오.”
“마교 놈들에게 물어야지, 그걸 지금 우리에게 묻는 진의가 무엇이오?”
청허자는 제갈묘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자자,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다들 별채로 갑시다.”
곡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노로 씩씩거리는 청허자를 달랬다.
“여기서 우리끼리 논쟁하는 것보다 별채로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더 시급하다 보오.”
“크흠!”
담기량의 말에 내내 제갈묘를 노려보던 청허자가 불쾌한 저음을 터트리며 장문인실을 나가 버렸다. 그 뒤를 이어 장문인실에 모여 있던 무림맹 수뇌들이 일제히 오도평이 죽은 별채로 향했다.
별채 안으로 들어선 무림맹 수뇌부, 그들 중 청허자는 특히 뜰 한쪽에서 풍기는 마기를 향해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담기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화산파 제자들은 허리를 숙이며 뜰 중앙으로 길을 열었다. 그들이 만든 공간에는 한 여자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배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지혈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듯 보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들은, 오도평에게 식사를 전해준 시녀인 모양이었다.
시녀의 시신을 본 담기량과 청허자는 눈빛을 교환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워낙 은밀히 주고받은 터라 다른 이들을 보지 못했다.
“뭐하던 아이더냐?”
담기량의 물음에 화산파 제자 하나가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고했다.
“잡일을 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말에 담기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담기량은 애석한 눈빛으로 죽은 여인에게 다가가려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챙 챙 챙.
왕귀진을 비롯해 흑풍대 전원이 검을 뽑아들고 담기량을 막아선 것이다.
“아직은 안 되오.”
“이게 무슨 짓인가?”
담기량 옆에 서 있던 청허자가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왜 그런지는 무림맹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하오.”
왕귀진은 검을 비스듬히 들어 여인 앞으로 가는 길목을 더욱 견고하게 막아섰다.
“갈!”
청허자가 일갈을 터트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있지. 지금 마교가 화산파 제자를 죽여 놓고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는 것인가?”
청허자가 노기를 터트렸지만 왕귀진과 그 뒤를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흑풍대는 요지부동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불가’라는 대답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막아서자 담기량의 눈동자에 언뜻 불안이 깃들었다. 애초에 일을 도모하고 그 뒤를 청성파가 처리하는 것으로 오파일방 장문인들은 합의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혹여나 실수로 여인의 몸에 청성파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염려한 것이다.
『맹주, 흔적일랑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 눈빛을 알아차린 청허자가 전음으로 담기량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흥, 마인들의 추잡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구나.”
그렇게 대치하고 있는 별채 앞뜰로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 뒤로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양 소궁주가 아니신가?”
무림맹, 정확히 말하자면 오파일방 무림맹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한 남해태양궁의 양곽원이었다.
“안 그래도 마교의 간악한 짓을 듣고 바로 달려오는 길입니다.”
양곽원은 흑풍대를 향해 조소 어린 미소를 머금고는 담기량을 비롯해 무림맹 수뇌들을 향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하하하, 양 소궁주를 보니 남해태양궁의 앞날이 아주 밝을 것 같네.”
청허자는 양곽원의 인사에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양곽원은 그런 청허자에게 다시 한 번 허리를 살짝 숙여 보인 후 왕귀진을 향해서는 살기가 담긴 열기를 내뿜었다.
“어서 비키지 못할까?”
“불가!”
왕귀진은 담기량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검의 방향을 양곽원에게 틀었다.
“네놈들이 한 짓이 드러날 것 같아 은폐하려는 것이냐?”
양곽원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왕귀진은 검을 든 채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왕귀진의 모습에 양곽원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말로 해서 들을 놈들이 아니니…….”
양곽원의 양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가 왕귀진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 왕귀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며 검을 당겨 몸을 웅크렸다.
“그 손 내밀면 넌 죽어.”
냉랭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양곽원의 귀를 긁었다.
“주군.”
그와 동시에 왕귀진 뒤에 서 있던 흑풍대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마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설린과 냉천휘, 그리고 북해빙궁의 설영대도 나타났다.
마현이 흑풍대 사이를 지나 여인의 시신이 있는, 뜰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군.”
평생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을 것만 같던 왕귀진이 그때서야 허리를 굽히며 옆으로 물러났다.
마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양곽원의 눈에서는 살기가 짙어졌다. 그 이유는 하나, 바로 마현 곁에 서 있는 설린 때문이었다.
설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아니 열망을 넘어선 집착이었다.
한순간 핏발이 서 붉게 변한 양곽원의 눈이 마현에게로 향했다.
질투심과 살기가 어지럽게 뒤섞인 기이한 눈빛이었다.
그런 성급한 마음이 양곽원의 평정심을 깨트렸다.
“내밀면 죽는다? 네 오만방자함은 끝이 없구나!”
양곽원은 주먹에 담긴 열기를 흩어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뜨거운 열기를 담아 마현을 향해 내질렀다.
후우웅!
마현은 양곽원의 주먹을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아이스 바클러(Ice buckler)!”
자작 자자작!
마현이 활짝 펼친 손바닥 앞으로 냉기가 퍼지더니 얼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얼음은 자그만 방패 모양으로 변했다.
쾅!
그 얼음 방패와 양곽원의 주먹이 부딪혔다.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잘게 부서진 얼음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방패 정중앙에서 열기에 녹은 수중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빙공?’
설마 했지만 마현이 보여준 것은 빙공의 일종으로 보였다. 양곽원은 시선을 돌려 설린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들끓는 분노와 함께 의혹이 담겨 있었다.
‘마교에서 이 같은 빙공을 익히지는 않았을 터.’
입술을 지그시 깨문 양곽원은 모든 힘을 개방했다.
그의 몸에서 흡사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가 일제히 방출되었다.
‘과거의 내가 아니다!’
양곽원은 2년 전 마현에게 패한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뼈를 깎듯 수련에 임해왔다.
마현을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힌 그는 궁주이자 아버지 양위도에게서 전수받은 남해태양궁주만의 절기 열양신공을 끌어올렸다.
후우우웅!
좀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양곽원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가지리라, 기필코 꺾을 것이다. 네놈도, 설린도!’
양곽원은 마현의 모습에서 설린의 얼굴이 어른거리자 열기 속에 지독한 살기를 담았다.
양곽원의 기세가 확연히 달라지자 마현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양곽원의 눈에는 자신감을 넘어선 자만심이 보였다. 천하에 널리 알려진 신공을 펼쳐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 정도 자만심을 가지고도 마현을 꺾을 수 있다고 여긴 탓일까. 마현의 눈에는 양곽원의 허점이 훤히 보였다.
마현의 서클 단전에서 끌어올려진 마력이 다리를 타고 땅으로 스며들었다.
“히야압!”
양곽원은 흉맹한 기합을 터트림과 동시에 힘 있게 진각을 밟으며 마현의 가슴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그 순간 마현의 입에서 짧은 룬어가 흘러나왔다.
“디그(Dig)!”
마법을 펼치며 마현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푹!
‘쾅!’ 하고 진각을 내디딜 때 들려야 할 발소리 대신에 마치 늪에 발이 빠지는 듯한 소리만이 양곽원의 발과 땅 사이에서 들렸다.
“컥!”
그리고 짧은 헛바람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양곽원의 몸이 기울어졌다.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자 마현의 가슴을 향해 내질러지던 그의 주먹은 애꿎은 땅바닥을 내리쳤다.
콰광!
마현이 디디고 서 있는 발 바로 앞에 양곽원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강렬한 폭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먼지들이 흩어지자 양곽원의 오른쪽 다리 절반 이상이 땅속에 깊숙이 빠져 있는 게 보였다.
『대주, 묻어라.』
『명!』
마현의 매직마우스에 왕귀진이 전음으로 답하며 마력을 땅속으로 흘려보냈다.
밖으로 발을 빼내려고 몸부림치던 양곽원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그 무언가가 자신의 다리를 움켜잡는 것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두 다리가 땅속으로 푹 들어갔다.
물속이라면 자신의 다리를 잡아끄는 존재를 볼 수 있을 텐데, 아니 보지는 못해도 어떻게 해볼 텐데 단단한 땅속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결국 한 번 허우적대지도 못하고 양곽원의 하반신은 완전히 땅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네가 왜 본인에게 유독 그러한 적대감을 내비치는지 모르겠지만…….”
마현의 손에 마나 미사일이 만들어졌다.
“넌 상대를 잘못 택했다. 더불어 본인의 경고는 결코 허언으로 끝나지 않음도 알았어야 했다.”
쑤아아앙!
마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나 미사일이 양곽원의 미간 사이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