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22화
“평소 이름이 높았던 신기수사를 뵙고 싶어 이리 청한 것입니다.”
“어디 멸마광검만 하겠습니까?”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날카로운 질문이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어쩌다 보니 허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필성은 겸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남들의 이목을 피해 왜 이 제갈 모를 보자고 했는지, 솔직히 의구심이 듭니다.”
제갈묘는 낯빛을 굳히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 물음에 진필성도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 가주를 보니 솔직히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나을 듯하오.”
그 말에 제갈묘가 허리를 곧게 펴며 눈을 빛냈다.
“맹주가 되려 하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 너무도 직설적인 말에 제갈묘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갈묘는 눈을 반개하며 진필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전에 왜 검림이 오랜 은거에서 깨어나 뜬금없이 강호에 나왔는지부터 이야기해야겠군요.”
진필성은 잠시 제갈묘의 시선을 피하며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혹 귀림이라고 들어보셨소이까?”
“귀림?”
처음 듣는 단체의 이름에 제갈묘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귀림이 활동을 시작했소이다.”
탁!
잠시 동안 흐르는 적막을 탁자와 찻잔 사이에 만들어진 파음이 깨트렸다.
“귀림은 인륜마저 거스르는 악의 집단이라오. 지금의 마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고, 뼛속까지 타락한 악의 종자들이오. 그들이 자칫 천하를 거머쥔다면 어떤 문파도 온전하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천하는 피에 젖을 것이외다.”
“믿을 수 없소이다.”
제갈묘는 불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하긴, 제갈 가주의 마음도 이해하오. 하지만 본림을 생각해 보시오.”
진필성의 말에 제갈묘의 표정이 달라졌다.
“검림도 있는데 귀림인들 없겠소이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득력이 약하오.”
“인정하외다.”
진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더 속물적으로 이야기하겠소.”
“속물적?”
“제갈세가 가주이시고, 신기수사이시니 현 정세 판단이 누구보다 빠를 것이라 여기오. 그럼 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리다. 다음 맹주는 누가 될 것 같소?”
제갈묘는 진필성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아마 육대세가에서 맹주가 나오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 이 진 모는 보오. 아니 그렇소?”
진필성의 말에 제갈묘는 거북한 침음성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 진 모가 맹주 자리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으로 아오.”
그것 또한 사실이다.
중소문파는 제외하더라도 오파일방은 십중팔구 반드시 그리 움직일 것이다.
“검림의 제자는 겨우 백여 명에 불과하오. 나는 권력에는 티끌만큼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오. 허나 본림만으로 앞서 얘기한 귀림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오. 그래서 본림은 무림맹이 필요하오.”
“그래서 이 제갈 모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오?”
“무림맹 군사.”
진필성의 말에 제갈묘의 눈이 반짝였다.
“단지 지모만 빌려주는 군사가 아닌, 무림맹의 이인자로 만들어드리겠소.”
제갈묘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인자라…….”
“뜸 들일 것 없소이다. 그 이인자 자리가 귀림이 사라지는 날 일인자, 그리고 천하제일무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제갈 가주께선 잘 아시리라 믿소.”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말이다.
하지만 제갈묘는 여전히 신중한 얼굴이었다.
“천하를 위한다는 분에게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소만?”
제갈묘는 마지막으로 진필성의 의중을 한 번 더 떠보았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 아니겠소? 어설픈 영웅주의보다 현실적인 평화가 더 낫다고 본인은 생각하오.”
“어설픈 영웅주의보다 현실적인 평화라…….”
제갈묘의 주름진 눈가가 서서히 펴지며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나쁘지 않다.
귀림이라는 집단이 실제로 있든, 없든.
“앞으로 잘 부탁하오, 맹주.”
제갈묘는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파일방과 육대세가 위에 우뚝 선다라…….’
제갈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림주님.”
그때 우검 호법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소림사 혜공대사와 종남파 곡 장문인이 림주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우검 호법의 말에 진필성과 제갈묘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에게 웃음을 보였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우검 호법의 눈동자는 의미 모를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황금빛이 반짝였다 금세 사라졌다.
* * *
두두두두두!
한 떼의 인마들이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흰색 털옷에, 백마!
흰색은 다른 색과 달리 조금만 이물질이 묻어도 금방 표가 난다. 지금 한 떼의 백색 인마들이 그러했다.
새하얀 털옷은 먼지와 흙탕물로 얼룩이 져 있었고, 그들이 타고 있는 새하얀 백마들은 땀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마를 탄 하얀색 털옷의 인영들, 북해빙궁 무인들의 손에 들린 채찍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백마의 엉덩이를 더욱 내려치며 속도를 높였다.
행렬의 중간쯤에는 새하얀 늑대개 두 마리가 뛰어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달리던 늑대개 두 마리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주위를 킁킁거리며 배회했다.
그러자 멈출 줄 모르고 달리던 말들이 다리를 세우며 하얀 콧김과 함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북해빙궁의 무인들 역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
설관악은 피곤한 듯 지친 숨결을 토해냈다.
“괜찮은가, 구 각주.”
설관악은 고개를 돌려 한풍대주 뒤에 앉아 있는 한 초로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북해빙궁 빙의각 각주 백초신의(白草神醫) 구엽이었다.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궁주님.”
“이리 고생을 시켜 미안하네.”
설관악이 다른 수하들과 달리 이처럼 각별히 대하는 것은 구엽이 북해 최고의 의원이었지만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범인인 까닭이었다.
무인도 견디기 힘든 강행군을, 그것도 젊은이도 아닌 환갑을 훌쩍 뛰어넘은 나이의 구엽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 분명했다.
“아닙니다, 궁주님. 속하가 자청한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리 말해 주니 본좌의 마음이 그나마 한결 편해지는군. 내 이 공은 잊지 않겠네.”
“다 궁을 위한 일이 아니옵니까? 이 늙은이가 궁을 위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기꺼울 뿐입니다.”
말은 그리 했지만 구엽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힘에 부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구엽을 보며 설관악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하지만 설린과 냉천휘가 처한 상황이 최악일 수도 있어 그의 동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동행하라는 명을 자신이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달콤한 휴식도 잠시.
컹 컹 컹 컹!
이리저리 선회하던 늑대개들이 목을 젖히며 행렬의 선두에 있는 북해빙궁주 설관악을 향해 짖어댔다.
말 위에서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북해빙궁 무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은 일제히 풀어헤쳐 놓은 옷을 갈무리하며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한동안 설관악을 향해 짖어대던 늑대개들은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가자!”
설관악은 잠시 손에서 놓았던 채찍을 들어 애마의 엉덩이를 내려쳤다.
푸히이이잉!
잠시 동안의 휴식이었지만, 그새 기운을 차렸는지 백마는 다시 기운찬 울음을 토해내며 땅을 박찼다.
이렇게 달린 것도 오늘로 꼬박 이 주째였다.
이 주 동안 잠자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모두 아껴가며 오로지 달리고 또 달렸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 시진쯤 달렸을 때였다.
제법 잘 닦여진 길로 달리던 늑대개들이 갑자기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길이 험준하지만 설관악을 위시한 한풍대와 설빙대는 망설이지 않고 늑대개를 쫓아 수풀로 뛰어 들어갔다.
길도 없는 수풀을 헤치고 다시 반 시진쯤 달리자 거센 물살이 흐르는 계곡이 나타났다.
늑대개들은 물길 앞에서 잠시 서성이더니 물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길을 헤치고 상류를 향해 일각쯤 올라갔을 때 늑대개들이 계곡 가장자리에 뚫려 있는 동굴 앞에서 다시 짖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찾기 힘들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었다.
그 앞에서 서성이며 연신 울부짖는 늑대개, 천종백랑의 모습에 설관악은 동굴 안에 설린이 있음을 확신했다.
설관악은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계곡의 물은 동굴로까지 흐르고 있었다.
첨벙 첨벙.
말을 타고 동굴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쐐애액!
한 줄기 검광이 설관악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갈!”
설관악은 양팔을 교차하며 쌍장을 내질렀다.
쌍장 중 일장은 날아오는 검광을 후려쳤고 뒤이은 일장은 자신을 공격해 들어온 검은 그림자의 가슴을 향해 후려쳤다.
카강!
흡사 두꺼운 철판을 친 것처럼 손목이 시큰거렸다.
분명 사람의 가슴을 쳤을 때 느껴지는 감각은 아니었다.
설관악은 또다시 옆에서 베어오는 두 개의 검을 보자 말 위로 훌쩍 뛰어오르며 다시 냉기가 담긴 장풍을 내뿜었다.
콰과광!
폭음이 동굴 안을 뒤흔들었고, 차가운 냉기가 한순간 동굴을 가득 채웠다.
“잠깐!”
설관악이 막 애마 앞으로 착지하는 순간,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서 억양이 높은 여인의 목소리가 다급히 흘러나왔다.
“흑풍대주님, 적이 아니에요.”
여인의 말이 끝날 때쯤 설관악은 자신을 막아선 사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피풍의를 두른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그토록 걱정을 했던 설린이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쿨럭!”
그때 설관악은 자신을 막아선 자들 중 맨 앞에 서 있는 사내가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꺾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주.”
검은 피풍의를 입은 사내들은 바로 흑풍대였다. 한 흑풍대원이 설관악의 빙장에 내상을 입은 왕귀진을 재빨리 부축했다.
“아버지!”
“스승님!”
그런 왕귀진 뒤로 설린과 냉천휘가 달려왔다.
“궁주님을 뵈옵니다.”
동굴 안쪽에서 서른 명의 설영대도 모습을 드러내며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흑풍대주.”
반가운 목소리로 뛰어오던 설린을 향해 설관악은 두 팔을 벌렸다. 하지만 설린이 자신의 빙장을 맞은 후 주저앉은 한 사내에게 다가가자 설관악은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으세요?”
“쿨럭. 괜, 괜찮습니다.”
왕귀진은 설린과 철용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관악의 빙장도 문제였지만 검림과의 싸움과 연이은 데쓰 스테이트로서의 체력 고갈, 그리고 마현의 기운을 느끼며 쉴 새 없이 이동한 까닭에 왕귀진의 기력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왕귀진을 보호하는 흑풍대원들 또한 모두가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북해빙궁주를 뵈옵니다, 본교 대공자 직속부대인 흑풍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왕귀진이라고 합니다. 좀 전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이 망가진 왕귀진이었지만, 몸을 곧추세우며 자신을 소개했다.
설관악은 그런 왕귀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옥체는 괜찮으신 겁니까? 소궁주님, 그리고 냉 공자님.”
구엽이 말에서 내려서자마자 노구를 이끌고 설린과 냉천휘 앞으로 달려갔다.
“구 각주님.”
설린은 구엽을 보자마자 그의 손을 이끌고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 소궁주님.”
구엽은 영문도 모른 채 설린의 손에 이끌려 동굴 깊숙한 곳으로 덩달아 달려갔다.
동굴 깊숙한 곳에는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고, 그 옆에 한 청년이 누워 있었다.
“상태 좀 봐주세요, 빨리요.”
설린이 다급히 재촉하자 구엽은 누워있는 청년을 내려다보며 쪼그려 앉았다. 청년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평소 냉정하기로 소문난 소궁주가 이토록 재촉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흠!”
언뜻 보기에도 청년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미간과 인중을 중심으로 한쪽은 검은색, 한쪽은 푸르스름한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소매 아래로 들어난 양손 역시 그러했다.
구엽은 청년의 기이한 병세에 침음성을 내뱉으며 맥을 짚었다. 그런 다음 상체를 풀어헤쳤다. 짐작했던 대로 청년의 상체는 검은색과 푸른색으로 양분되어 그 기운이 온몸으로 뻗어 있는 듯했다.
“구 각주, 무슨 방도를 취하든 무조건 살리세요.”
빙화라는 별호답게 차갑게 명을 내렸지만, 설린의 눈동자는 애처롭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냉천휘와 함께 뒤를 따라온 설관악은 그런 설린의 모습에 청년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교 대공자입니다.”
냉천휘의 말에 설관악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설린과 마현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