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61화 (161/351)

# 161

11화

“내 약속하지.”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흑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반드시 그대들에게 과거 천하를 호령했던 그 힘을 되찾아주겠다.”

“속하, 그 말씀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두겠습니다.”

마현은 바싹 엎드린 흑권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흑권을 부축하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들 자리에 앉지.”

마현은 조금 전 들어온 왕귀진과 철용을 불러 방 안에 놓인 원형 탁자에 모여 앉게 했다.

“이제 정말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흑권 어르신.”

왕귀진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흑권에게 말을 건넸다.

“늙은이의 괜한 심술이었지.”

왕귀진의 말대로 한 식구라는 뜻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 그의 표정은 전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가벼운 덕담들이 오가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찾아온 것을 보니 흑풍대도 몸을 추스른 것인가?”

“예, 주군. 당장 출전해도 이상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힘을 갈무리했습니다.”

대답하는 왕귀진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그만큼 자신감 또한 가득 찼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보니 달라진 스켈레톤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사실 흑사신이야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지만 흑풍대와 스켈레톤의 성장은 흑마법사인 마현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기사(奇事)였다.

물론 그 후 대략적인 연유를 파악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머리로만 이해한 것일 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 볼까?”

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뜻을 알아차린 흑사신과 왕귀진, 그리고 철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놓겠습니다.”

철용이 먼저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별채 뒤편에 마련된 작지 않은 연무장에 마현과 흑사신, 그리고 흑풍대가 모였다.

“크크크, 미리 말해 두겠는데……, 본좌가 먼저야.”

흑도는 눈앞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흑풍대를 보자마자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결국 제 흥을 이기지 못하고 목과 손가락을 비틀어 우두둑 뼈마디가 꺾이는 소리를 만들며 흑도는 들뜬 얼굴로 눈을 빛냈다.

그런 흑도의 눈과 몸에서는 강렬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흑검은 조용히 피식 실소를 흘렸다.

“본좌가 나가는데 아무도 불만 없지?”

마치 어린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흑도의 모습에 흑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후 흑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에 힘입어 흑도가 앞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흑검이 손을 까딱거려 왕귀진을 조용히 불렀다.

왕귀진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며 흑검에게 다가갔다.

번쩍!

왕귀진이 흑검 앞으로 다가오자, 흑검은 허리에 매달린 검을 뽑아 섬전처럼 휘둘렀다. 한 줄기 은빛 반원 형태의 궤적이 그려졌다.

“헙!”

흑검의 검광은 왕귀진의 바로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 흑검 어…….”

왕귀진은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흑검은 담담한 표정으로 검을 왕귀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검면으로 왕귀진의 팔을 들어올렸다.

“윽!”

그제야 새끼손가락 끝에서 미미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려 보니 새끼손가락 끝이 살짝 베어져 피가 한 방울 멍울져 있었다. 흑검은 검 끝으로 그 한 방울의 피를 긁듯이 훔쳤다.

“고맙네.”

흑검의 표정은 인자하기 그지없었지만 묘하게 짓궂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

왕귀진은 이 황당한 일에 그저 붕어처럼 입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캬캬캬캬캬!

―키키키키키!

칠흑처럼 검은빛을 띤 스켈레톤들이 철용의 명에 의해 소환되어 연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욱 섬뜩해진 귀성과 귀기로 인해 연무장의 공기는 한순간 음침하게 바뀌었다.

“크하하하하, 좋구나.”

흑도의 광소가 터져 나왔다.

“훗!”

흑검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핏방울이 맺힌 검 끝을 슬쩍 털며 착검했다. 그렇게 흑검의 검에서 날아간 한 방울의 피는 흑창의 인중에 떨어졌다.

“흐읍!”

흑창의 콧구멍이 한순간 벌렁거렸다. 이윽고 그의 콧잔등 위에 주름이 만들어졌다.

“흐으음!”

무표정하던 흑창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오르더니 입술이 벌어지며 듣기 좋은 중저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그 목소리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근엄한 표정으로 변했다.

“오늘 이 본좌와 한바탕 놀아 보자구나!”

흑도가 연무장 위로 성큼 발걸음을 막 내딛으려는 때였다.

쐐애애액!

한 줄기 바람이 날아와 흑도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뭐야?”

흑도를 막은 것은 파르르 울고 있는 한 자루의 창이었다.

“이런 일은 본좌가 제격이지.”

흑창이 흑도 앞에 근엄하게 섰다.

“왜냐고?”

흑창은 스스로에게 묻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본좌가 바로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고금제일천하무쌍우내무적창이기 때문이지. 자고로 창하면 본좌, 본좌하면 창. 놀랍게도! 본좌의 창술이 예술의 경지에 들어섰기에, 예술을 알기에 스켈레톤의 힘을 시험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흑도는 기가 막혔다.

“흑창, 너 갑자기 돌았……, 잉?”

흑도는 그때서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흑창의 코 밑에서 붉은 점을 발견했다. 그 점이 단순한 점이 아니라 핏자국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어, 어떤 놈이야?”

흑도는 뿌연 김을 콧구멍에서 씩씩 내뱉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런 성난 흑도의 눈에 얄궂은 웃음을 참고 있는 흑검이 보였다.

“너지?”

그 질문에 흑검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슬쩍 한 번 들어올렸다. 물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이다.

“그럼 놀아 보자구나.”

그러는 사이, 흑도가 어찌하기도 전에 벌써 흑창은 창을 휘두르며 스켈레톤 사이로 훌쩍 뛰어 들어가 버렸다.

“으아아아아아!”

그 뒤로 흑도의 억울함이 담긴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노기에 찬 일갈.

“흑검, 너 이시키! 너 죽고, 본좌 살자!”

* * *

“어쩌실 생각이신가?”

걸왕의 물음에 허진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힌 허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날카롭게 뜬 눈은 탁자 위에 놓인 두 장의 종이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고, 맞은편에 앉은 걸왕의 표정도 그 못지않게 심각했다.

두 장 중 한 장은 조금 전 마교에서 날아온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군사 율기가 보내온 전서였고, 그 옆의 너덜너덜한 종이는 그보다 조금 앞서 걸왕이 개방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문제는 그 두 장의 종이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율기가 보낸 전서에는 소화산을 벗어나는 기슭에서 마현의 행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고, 걸왕이 개방에서 가져온 일급비밀 보고서에는 마교 부교주 허진이 소화산 기슭 인근에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율기, 네놈.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허진의 가슴은 분노로 가득 찼다. 그에 비례해서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눈동자로 탁자 위를 바라보던 허진이 손을 뻗어 율기가 보낸 전서를 집어 들었다.

화르륵.

전서는 허진의 손에서 불타 순식간에 하얀 재로 변했다. 허진은 손바닥 안에 담긴 하얀 재를 손으로 뭉개듯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할 생각이신가?”

걸왕은 재차 물었다.

허진은 꼿꼿하게 턱을 세운 채 걸왕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볼 생각이오.”

“가다니? 소화산에?”

걸왕은 깜짝 놀라 격한 목소리를 터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소.”

“그곳은 사지(死地)요.”

“정파의 기둥이라 일컬어지는 걸왕이 마인을 걱정하다니, 우습군.”

허진은 오히려 걸왕의 걱정 어린 말을 비웃었다.

“대체 어찌하려고…….”

“걸왕.”

“……?”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설마 순진하게 세간에 알려진 본좌의 힘이 전부라 믿는 것이오?”

후우우웅!

깊은 바다 속 밑바닥처럼 고요하던 허진의 몸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마기가 터져 나왔다.

“본좌는 마교 부교주요.”

그 말을 끝으로 허진은 마기를 거두며 몸을 돌렸다.

‘율기, 네놈이 뜻하는 대로 사지로 가주마. 본좌를 사지로 보낸 이유가 그저 개인의 영달을 위함이라면…… 네놈은 내 손에 죽는다.’

“부교주. 그렇다면 마현은?”

막 밀실을 나가려는 허진의 발걸음을 걸왕이 다시 잡아 세웠다.

“현이는 본좌의 제자요.”

허진은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한 마디를 내뱉고는 밀실을 나가 버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라…….”

누구나 다 아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거 참. 낄낄낄낄.”

걸왕은 손가락으로 수염을 배배 꼬며 특유의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나이에 호랑이굴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

걸왕은 활짝 열린 밀실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학성과 학방을 보며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가자, 이놈들아.”

그가 밀실에서 나와 학성과 학방을 향해 우렁차게 소리쳤다.

* * *

깡!

“음화화화홧, 멋지구나!”

흑창은 창으로 바닥을 찍으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그런 흑창 앞으로 검게 변한 스켈레톤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흑창은 다시 창을 들어 허공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멋들어지게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창을 거두며 왼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살짝 치켜세웠다.

동시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반짝!

입술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이빨에 눈부신 햇살이 내리꽂혔다.

“과연 흑풍대다!”

휘이잉―

그때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흑창의 머릿결을 살짝 흩뜨려 놓았다. 그 바람에 입술이 조금 더 벌어졌다.

“바람 또한 멋지다!”

흑창은 창을 거두며 양팔을 벌려 온몸으로 바람을 맞이했다.

“그래서 본좌가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고금제일천하무쌍우내무적창이 아니던가? 음화화화화화홧!”

흑창은 가슴 언저리까지 들썩거리며 다시 한 번 요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미친!”

분명 흑도의 목소리가 들렸을 법한데도, 흑창은 여전히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흑창의 귀에는 흑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야! 흑검!”

흑창이 자신의 도발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흑도는 흑검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흑검 역시 흑도의 시선을 외면한 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으으으으!”

결국 흑도는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내려쳤다.

“다들 그만하게. 흑창, 자네도 내려오고.”

이상했다.

흑도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 같은 흑창이 흑권의 말에 창을 거두며 당당히 연무장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표정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사이 흑풍대는 흡족한 얼굴로 스켈레톤을 귀환시켰다.

“주군, 이제 북해를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늦게 연무장에 들어선 회회혈마가 흑사신과 흑풍대가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을 보자 마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떠나야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회회혈마는 일단 마교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검림을 향해 다시 검을 뽑을 것인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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