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7화
둘이 뒤엉켜 산비탈을 굴러 내려가는 와중에도 허진은 독소명에게서 벗어나고자 그의 몸에 살수를 썼지만 독소명은 끝끝내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산비탈에 굴러 내려가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몸을 더욱 끌어안으며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산기슭 거의 끝자락까지 굴러 내려오자 허진은 어쩔 수 없이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양손에 집중했다. 그리고 합장을 하듯 독소명의 양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퍼석!
그 일 수에 독소명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고, 피와 함께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허진은 절명한 독소명의 가슴을 후려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 부교주님!”
곧 귀갑철마대가 허진 앞으로 말을 몰아 달려 내려왔다. 그 사이 살아남은 화산파 무인들과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개방 제자들이 무극연환미혼진으로 들어서는 곳을 제외하고는 허진과 귀갑철마대를 더욱 촘촘하게 에워싸며 압박해 들어왔다.
“국 대주.”
귀갑철마대주가 허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소서.”
“계획을 수정한다. 모두 몰살시키라!”
“명!”
“하강우. 후미를 쳐라!”
허진은 살기가 담긴 목소리로 유령대주에게 명했다.
“명!”
하강우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하강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제껏 암중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령대가 개방 제자들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들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악!”
갑자기 나타난 유령대의 손에 개방 제자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진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불취개는 그 광경을 보고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유령대를 부르기 전에 허진을 기문진 안에 가두려는 계획이 어긋났다.
‘멍청한 놈! 고작 그 일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니.’
불취개는 머리가 터져 몸만 남은 독소명의 주검을 멀리서 지켜보며 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기다란 통 하나가 잡혔다. 그나마 혹시나 싶어 가져온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불취개는 서둘러 허진 앞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개방 제자가 하나라도 덜 죽기 때문이다.
불취개는 개방 방주만이 익히는 취선운행보(醉仙雲行步)를 밟으며 귀갑철마대의 언월도를 피해 허진 앞으로 다가갔다.
“염라서생, 이제 끝이다!”
불취개는 품에서 기다란 통을 꺼내 끝에 달린 굵은 줄을 잡아당겼다.
콰광!
허진을 향해 있는 통 주둥이에서 붉은 불꽃이 터졌다.
쐐애애액!
그리고 수천 개의 바늘이 허진을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허진은 불취개가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미 재빨리 검을 들었기에 늦지 않게 검막을 칠 수 있었다.
따다다다당!
얇은 은막 같은 검막 위에 수천 개의 침들이 불꽃을 만들어내며 부딪혔다. 허진은 그렇게 침들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뒤로 반 장 정도 밀려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허진이 소화산 기슭 아래 터 가장자리로 들어설 때였다.
지이이잉―
희미하지만 이질적인 기운이 땅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웬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가자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부, 부교주님!”
“주군!”
국충과 하강우가 놀라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후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는 생경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풍경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새하얀 색만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문진?’
순간 제갈세가를 떠올렸다.
하지만 제갈세가에 이런 기문진이 있다는 소리는 허진도 듣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맞다면 숨겨둔 비장의 한수쯤 되리라.
허진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그의 눈빛이 차갑고 냉정하게 바뀌었다.
허진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떤 기문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는데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았다.
아니 나아갔지만 못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못 나아간 것이 아닐까 한편으론 의문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분명 서 있는데 몸과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마치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이란 자연에 흐르는 기운을 비틀어 만든 허상일 뿐.’
허진은 단전에서 잠자고 있는 모든 마기를 깨웠다.
새하얀 화선지에 검은 먹물이 번지듯이 허진의 몸 주위로 마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쐐애애애액!
한 줄기 날카로운 소리가 허진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각!
살갗이 불에 덴 듯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뺨이 축축해지며 이내 허진의 왼쪽 어깨가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쐐애애액!
다시 날카로운 소리를 동반한 암습이 이어졌지만 허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연하게 서 있었다.
서걱!
이번엔 허벅지가 베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허진은 허벅지에 난 상처를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비수?’
허진의 입에서 비소(誹笑)가 흘러나왔다.
기문진에 가둬놓고 고작 하는 짓이 암기를 던지는 것이었다.
“고작 나 허진을 이깟 기문진에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허진은 오른발을 높이 들어 모든 마력을 쏟아 내려찍었다.
……!
분명 강한 충격에 의한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은은한 진동을 느꼈다.
서걱, 서걱!
그사이에도 몇 차례 암기가 허진의 사혈 곳곳을 노리고 날아왔지만 그럴수록 허진의 눈빛에서는 마기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자연의 기운을 뒤틀었다면 더 큰 힘으로 뒤틀면 그만인 것을.’
“갈!”
허진은 혼신으로 끌어올린 마력을 담아 다시 발을 굴렀다.
쾅!
몇 차례 시도한 끝에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터졌다.
마침내 창문에 곱게 바른 새하얀 창호지가 찢어지듯이 산자락의 터와 주변을 둘러싼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문진 앞에서 뒤엉켜 피로 얼룩진 한 폭의 아수라도를 그리고 있는 귀갑철마대와 유령대, 화산파와 개방 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또한 진 저편에서 자신을 노려보며 비수를 던지는 제갈세가의 무인들 역시 보였다.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것이란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들은 허진이 자신들을 노려보자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부교주님!”
그 격전의 와중에 진에 갇혀 사라진 허진이 다시 나타나자 반색을 하는 귀갑철마대와 유령대의 목소리도 간간히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짙은 안개가 드리우는 것처럼 다시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후우.”
허진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을 따라 검은 운무가 흘러나와 몸을 에워쌌다. 그 검은 운무는 몸을 에워싸더니 허진의 오른손으로 스며들었다.
“흐아압!”
허진은 강렬한 기합성을 터트리며 땅바닥이라고 짐작이 되는 발아래를 내려쳤다.
콰광!
미약하지만 조금 전보다 더 명확한 폭음이 터졌고 다시 새하얀 공간이 일그러지며 갈색 땅과 푸르른 녹음, 그리고 붉은색 피가 보였다.
“오행 상성이 깨어진다. 팔괘(八卦)와 구궁(九宮)을 담당하는 각 제자들은 공력을 더욱 집중시키라.”
다급한 목소리가 눈앞에 보이는 전장 후미에서 터졌다.
우우웅!
기문진 안이라서 그런지 몸으로 느낄 만큼 공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러자 새하얀 운무는 전보다 빨리 허진의 눈과 몸을 감쌌다.
허진은 이를 악물고 힘으로 기문진을 깨트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상처도 하나 둘씩 늘어갔다. 하지만 좀처럼 기문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단숨에 기문진을 부숴 버리고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허진의 눈가에 차츰 주름이 깊게 패여 갔다. 또한 겨우 숨이 통할 정도로만 기문진 밖의 동태를 보니 답답함을 넘어 역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로 인해 신경이 날카롭게 섰을 때였다.
팡!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공기가 터지는 폭발음이 허진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느껴진 인기척에 허진은 일말의 생각도 없이 몸을 틀어 검을 휘둘렀다.
카강!
붉은 불꽃이 검과 하얀 막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찌직 지지직!
하얀 막에 실금이 그어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흡사 유리병이 깨지듯 산산이 부서졌다.
“크윽!”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투명한 막 속에 마현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서 있었다. 허진의 검에 실드가 부서지면서 마나가 역류했다. 그 때문에 내부가 진탕되며 고통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스승님, 제자 마현입니다.”
“혀, 현이냐?”
허진은 반가움에 마현의 이름을 불렀지만 한편으로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금 허진이 서 있는 곳이 다른 아닌 기문진 안이기 때문이었다.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귀갑철마대와 유령대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다만…….”
허진은 수긍도, 그렇다고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로 답했다.
“일단 이 요상한 진부터 없애야겠습니다.”
마현은 투시 마법으로 기문진의 허상을 눈에서 지워 버리고 진상을 눈에 담았다. 그런 마현의 눈에 푸르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십여 개의 지점을 찾았다.
‘저곳이 이 요상한 마법진의 주요 맥이렷다?’
마현은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이어 버스트, 리터레이트!”
마현은 십여 개의 불덩이를 만들어 바로 발 앞에 쏘았다. 불덩이는 땅바닥에서 부딪힌 후 터지지 않고 땅속 깊숙하게 푹푹 파고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쾅!
폭음이 터지며 온통 새하얗던 세상 한편이 일그러졌다.
쾅, 콰광, 콰과광―!
이어 조금씩 폭발하는 소리가 커져갔으며 공간 곳곳이 일그러졌고, 하얀 세상은 점점 장막을 거둬내듯이 사라졌다.
쐐애애액!
그렇게 되자 아무런 소리도 없이 허진의 목을 노리던 비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허진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팽그르르 돌며 검을 휘둘렀다.
카강, 캉, 캉, 캉, 캉!
대여섯 자루의 비수가 허진의 검에 가로막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으아아악!”
“크아악!”
동시에 십여 줄기의 불기둥이 사방에서 솟구쳤고, 그 아래 화마에 휩싸여 발버둥 치며 쓰러지는 제갈세가 무인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교주님.”
기문진 밖에서 피에 절어 악전고투를 펼치던 귀갑철마대가 재빨리 기문진이 펼쳐져 있던 안으로 들어와 허진을 감싸듯 보호했다.
“수고했소, 국 대주.”
“대, 대공자이십니까?”
국충은 느닷없는 마현의 등장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 대주, 그대도 유령대를 뒤로 물리시오. 이제는 내가 맡겠소.”
난데없는 마현의 명에 하강우는 허진을 쳐다보았다. 허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하강우는 유령대를 이끌고 뒤로 물러났다.
“스승님, 출혈이 심합니다.”
위중한 상처는 없었지만 몸 곳곳이 암기에 베인 상처로 인해 허진의 옷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마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마현의 눈에서는 마기가 폭사되었다.
“이제부터 제자가 상대하겠습니다.”
“오냐.”
피를 많이 흘려서인 듯 허진의 얼굴은 많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현의 등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자연스레 마현의 등에 시선이 갔다.
‘저 녀석의 등이 저렇게나 넓었나?’
허진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마현의 등을 보며 대견해 하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한 감정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