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6화
“하 대주.”
허진은 흑풍각의 경비를 서고 있는 유령대를 보며 함께 따라 나온 하강우를 불렀다. 그리고는 현재 율기를 찾고 있을 흑풍대와 임무를 교대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에게 흑풍각을 지키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
물론 허진의 명에 충실한 유령대로 하여금 흑풍각을 지키게 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마현의 수하들인 흑풍대가 곁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허진은 뒷짐을 진 채 어느새 저물어가는 해를 올려다보았다.
서서히 붉어지는 태양을 쳐다보며 뒷짐을 진 허진의 양손이 꽉 쥐어졌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마현을 보며 무공전수에 대한 욕심을 어렵게 억눌렀다.
‘싫다고 해도 무공을 가르쳤어야 했어.’
마현이 착실히 무공을 익혔더라면 그처럼 허무하게 당할 정도로 이와 같은 빈틈을 노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마현이 걷는 길, 그 마법이라는 것이 엄청나고 뛰어난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현재 마현이 살아가는 이곳이 무림이라는 것을 이제껏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이 찢어질 듯 허진은 가슴이 아팠다.
허진은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흑풍각 문을 쳐다보았다. 눈은 그곳을 향해 있었지만 허진은 그 문 너머 누워 있는 마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네가 싫다고 해도 이 스승은 네게 무공을 전수해 줄 것이다. 이제 다시는 쓰러지지 않도록…….’
허진의 아픔이 느껴지는 눈동자에서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 * *
저들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치가 떨린다. 치가 떨리다 못해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다. 다시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일이 년도 아니다.
자그마치 삼십 년이 훨씬 넘는 시일이었다.
아버지처럼, 때로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고 굳은 믿음을 주던 눈빛들이 다 거짓이었다.
그렇다.
농락당한 것이다.
자신은 몇 십 년이나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이용당한 것이다.
차라리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면, 진실을 담아 말했다면 그리 했을 것이다.
순순히…….
그런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좋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기꺼이 생사 대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비굴했으며 방법 또한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당당하게 자신을 죽일 자신도 없어 암수를 썼고, 독을 풀었다. 그렇게 음독을 시켜놓고도 앞에 선 그들의 눈빛에서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크하하하하!”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건 울음이었다.
“기다려라, 나는 죽음마저 거슬러 다시 태어나 너희들의 목숨을 거두겠다!”
콰과과광!
화염에 파묻혔다.
“크아아아아!”
살이 타들어가는 지독한 고통이 온몸을 뒤덮었다.
마현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크헉!”
막혔던 숨을 격하게 터트리며 깊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는 한동안 격한 감정에 휩싸여 제대로 초점조차 잡지 못했다. 그렇게 요동치던 눈동자가 멈췄지만 격한 감정이 묻어나며 핏발이 섰다.
턱선이 꿈틀거리며 마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하지만 한시도 잊지 않았던 하르센 대륙에서의 마지막 날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꿈을 꾼 것이다. 마치 다시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왔고, 그로 인해 단전에서 마력이 뿜어졌다.
“큭!”
단전에서 기경팔맥으로 마력이 물밑처럼 밀려올라가자 온몸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한순간 마현의 몸을 뒤덮었다.
“주군.”
그때 그 옆에서 호법을 서던 흑권이 재빨리 다가와 마현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고통에 다시 몸을 바르르 떨던 마현은 흑권을 향해 눈을 돌렸다.
“흑권인가?”
“그렇습니다, 주군.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흑권의 말에 마현은 의식적으로 마력을 다시 서클 단전으로 거두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꿈에 마현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뒤죽박죽된 기억들을 다시 떠올렸다.
‘귀림주!’
마현은 어렴풋이 자신이 이런 경험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귀림주의 음공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마현은 깨질 듯한 두통에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삼 일입니다.”
“삼 일이라…….”
마현은 축 늘어지는 몸이 힘겨워 벽에 기대고 앉았다.
“스승님인가?”
마현은 피폐해져 있어야 할 몸이 생각보다 깨끗하다는 것을 느꼈다.
“부교주님과 사령신위의 령좌가 시시각각 주군의 몸을 다스려 주었습니다.”
마현은 어둠의 향기가 느껴지는 천장 한구석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빚을 졌군.”
“…….”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흑권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주군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마음에 담아두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제야 천장에서 령좌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직후 령좌의 기운이 사라졌다.
아마도 허진에게 자신이 깨어난 것을 보고하기 위해 부마전으로 향했을 것이다.
마현은 머리를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흑권.”
“하명하십시오.”
“내가 우습지?”
쓰디 쓴 마현의 목소리에는 자괴감이 담겨 있었다.
“…….”
흑권은 마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에게 질문한 것이지만 대답을 바란 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무공 또한 마법처럼 훌륭한 공부라 생각했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본 후 무공을 마법으로 따라하며 다 안다고 여겼다.
자만이었다.
마현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나도 어이없게 허점을 노출시켰으며 그로 인해 패배했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만약 그 전장이 적진이었다면 이렇게 살아서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여섯 백마법사에게 향하던 분노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섰다.
분노가 극에 달할수록 마현의 표정은 더욱 무심하게 변했다.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는 마현의 가슴 속은 화산의 용암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그럴수록 마현은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냉정을 유지했다.
끼익 경첩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마현은 눈을 떴다.
허진이 들어오는 것을 본 마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괜찮다, 편히 쉬어라.”
허진은 마현을 다시 앉히며 자신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래 몸은 괜찮으냐?”
걱정이 한껏 묻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허진은 고개를 돌려 흑권을 쳐다보았다.
“자리 좀 피해주시겠소?”
“주군, 속하는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마현이 살짝 고개를 숙여 허락하자 흑권은 바로 어둠으로 돌아갔다.
“그래 몸은 어떠냐?”
그 질문은 오히려 마현이 하고 싶을 정도다. 그만큼 허진의 얼굴 역시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긴 현재 사공소의 부재로 인해 마교의 모든 업무를 허진이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율기의 배신으로 인해 당장 허진을 도와줄 이도 없으니 그 업무가 몇 배나 과중되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를 귀림의 잔당 색출 작업과 함께 본교의 기강마저 다시 세우려하니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야 할 정도였다.
“보름 정도 요양하면 움직이는데 큰 지장은 없을 듯싶습니다.”
“보름이라…….”
허진은 마현의 대답에 고개를 저으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질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늦어도 내일쯤에는 교주님을 모시러 가야 한단다.”
허진은 품에서 자그만 목함을 꺼내 마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다친 내부를 임시적으로나마 치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함 안에는 마교의 비전 영약 중 최상의 영약인 마령단이 들어 있었다.
마현은 마령단을 보자 허진이 말한 의미를 알 수가 있었다. 마령단이면 진탕되고 틀어진 내부를 치유할 수 있다. 어쩌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영약임에는 틀림없으나 제아무리 마령단이라고 해도 흡수하고 온전히 몸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삼 일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령단을 이용해 임시적으로 치유를 한 후 내일 워프 게이트진을 이용해 순간이동 마법을 펼친다면 다시 내상이 도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아까운 마령단만 허비하게 되는 꼴이다.
“마령단이 귀하다고 해도 어디 교주님과 비할 바가 되겠느냐? 그리고 어수선한 본교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교주님께서 돌아오셔야 한다. 네게 못할 짓이라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스승님. 오히려 저 때문에 스승님께 과한 짐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허진의 미안한 마음을 느낀 마현은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해졌다.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경미한 상처만 입었더라면 바로 사공소가 본교로 돌아왔을 것이고, 그리 되었다면 허진이 지금처럼 과중한 업무에 혹사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현아.”
허진은 진중한 목소리로 다시 마현을 불렀다.
“예, 스승님.”
“교주님이 돌아오시면 나의 절기를 물려받아라.”
“……?”
“이건 스승으로서의 명이다.”
허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한치의 거부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이 스승의 절기를 모두 전수받을 때까지 폐관수련을 해야 한다.”
폐관수련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마현은 잠시 허진을 쳐다보았다.
“네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귀림이든 검림이든 다 잊어라. 바로 앞을 보기보다는 멀리 내다보아라.”
마현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순순히 자신의 뜻에 따르는 마현을 보며 허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 한편은 착잡했다.
“복용하거라, 이 스승이 도와주마.”
허진의 뜻에 따라 마현은 마령단을 입에 넣고 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 * *
사공소의 몸에 꽂힌 침을 뽑으며 가릉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았다.
“가 당주.”
잠든 줄 알았던 사공소가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로 가릉을 불렀다.
“깨어 있으셨습니까?”
“어떤가?”
사공소의 질문에 가릉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곧 쾌차하실 겁니다, 교주님.”
“끌끌끌, 본좌는 가 당주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대쪽 같은 인물인지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
사공소는 눈을 뜨며 잠시 손을 놓은 가릉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가릉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예전의 기광이 번뜩이던 굳은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늙고 병든 촌로(村老)처럼 흐린 눈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교주님, 속하가 누구입니까? 마의당 당주 의독노조입니다. 속하가 있는데 무얼 걱정하십니까?”
가릉은 울컥하는 격분(激奮)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런가? 그래…… 그대가 있었군.”
사공소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가릉은 울컥하는 심정 때문에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사공소의 몸에 박힌 침을 다시 뽑기 시작했다.
다시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누워 있는 사공소를 보며 가릉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릉은 더없이 침울한 눈으로 종유석에서 떨어진 물방울로 만들어진 자그만 물웅덩이를 쳐다보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
오늘로 벌써 사 일째다.
‘본교에서 일이 잘못된 것일까?’
이제는 답답함을 넘어 불안해졌다.
가릉은 동굴 내부에 만들어진 워프 게이트진을 향해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