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83화 (183/351)

# 183

8화

허진은 따라 웃지 못했다. 아니 그 순간 오히려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이 있네.”

“…….”

“마휴당은 내게 주게.”

“안 됩니다, 교주님. 그리할 수 없습니다. 어찌 제가 교주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는다 말입니까?”

허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참으로 앞뒤 꽉 막힌 친구로군. 그래서 본좌가 자네를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허진은 사공소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그렇다면 허울뿐인 태상교주 자리라도 하나 만들어 주면 될 것 아닌가? 그리 해주게. 이제는 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허진은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억세게 말아 쥐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그는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렸고, 무릎 위에 꽉 쥐여진 주먹 위로 굵은 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졌다.

* * *

“속하 왕귀진입니다, 주군.”

인기척에 마현은 마력을 서클 단전으로 거두며 눈을 떴다. 내상이 아직까지 완치가 되지 않아 불쾌한 고통을 느껴서인지 마현의 눈가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들어오라.”

마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왕귀진과 철용, 그리고 두 장로와 무영대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현은 그들과 함께 방 한쪽에 놓인 탁자로 모여 앉았다.

두 장로와 무영대주의 안색이 생각보다 더 어두웠다.

“역천마도를 찾았나?”

“……찾았습니다.”

회회혈마가 힘들게 대답했다.

“그 죽일 귀림의 놈들이……, 빠드득. 삼장로를 강시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삼안혈화가 원한 가득한 눈빛을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회생(回生)의 방도는 없고?”

“……가 당주도 고개를 저었습니다.”

회회혈마의 말에 마현은 무거운 침음성을 삼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소리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워진 까닭이었다.

“주군! 역천마도, 그놈을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회회혈마가 머리를 탁자 위에 쿵 찧으며 울부짖었다.

언제나 만나면 으르렁거려 견원지간처럼 보이는 회회혈마와 역천마도였지만 그들의 진정한 우정을 마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산 놈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흑사신 분들처럼이라도 못 다한 생을…….”

결국 회회혈마는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마현은 회회혈마의 부탁에 쉽게 응하지 못했다.

현재 자신의 마력으로는 흑사신이 한계였다. 아니 좀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면 자신의 능력은 아직까지 흑사신의 능력과 견주면 한참 부족했다.

고심하던 마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시화 되던 이가 또 있나?”

“대장로 혈월마성과 오장로 염왕부, 팔장로 혈음검이 더 있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본교의 주축 핵심인 장로들이 완전히 몰살당했군.”

무영대주의 대답을 들은 마현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비록 적이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달리 보면 한 식구의 죽음이었기에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다.

‘팬텀 나이트(Phantom knight)라면 가능도 하겠지만…….’

팬텀 나이트는 검은빛 마기만을 두르고 뿜어내는 다크 나이트와 달리 애초에 전신이 검게 물들고, 인광(燐光)과도 같은 짙은 녹색의 마광(魔光)을 두르고 뿜어낸다.

그 모습을 처음 접하면 마치 방금 마계에서 뛰쳐나온 마족을 연상케 한다.

즉, 흑사신관 달리 인간의 신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다.

당연히 마현의 고민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흑사신들도 걸리고…….’

그때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마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흑사신!”

일단 흑사신을 불러 의향을 물어보는 것이 먼저다 싶어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흑사신들을 깨웠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흑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주인?”

흑도가 근처의 비어 있는 의자를 잡아당겨 앉았다.

“모두들 앉지.”

그렇게 흑사신이 자리를 잡고 앉자 마현은 그들을 부른 이유를 말했다.

“좀비와 듀라한이 된 귀림의 강시들은 어떻게 했나?”

“아, 그거? 뭐 대부분 일반 양민이라서 전부 중천(中天)으로 돌려보냈어. 49일 한을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가겠지. 그것도 그거지만 본좌는 남의 손 탄 애들을 부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흑도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건성건성 말했다.

“흥!”

그 말에 그 앞에 마주앉아 있던 흑검이 비아냥거림을 담아 코웃음을 쳤다.

“이, 이!”

그 비웃음에 흑도가 열이 잔뜩 받았던지 뺨을 씰룩거렸지만 왠지 전처럼 대놓고 한바탕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왜? 찔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

“너 그러다가 본좌한테 죽는다!”

흑도가 나직하게 경고했지만 흑검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듯 보였다.

“하긴 그냥 날름 다 가지자고 했던 네놈이었느니, 달리 할 말도 없겠지.”

“조용!”

둘의 말싸움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마현이 중간에서 싹둑 잘라버렸다.

“어찌되었든 그 점은 잘했다. 그들을 흡수해 봐야 그대들의 마력만 무거워질 뿐이니까.”

마현의 말에 흑도를 제외한 흑권, 흑검, 흑창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흑도만이 “킁!”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듀라한 중에 쓸만한 놈들 몇 정도는 거둬도 좋을 법 했는데…….”

“거 봐! 본좌가 그래도 몇 놈은 가지자고 했잖아!”

흑도가 마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빛을 반짝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흑도!”

마현이 자꾸 분위기를 깨는 흑도를 향해 눈을 찌푸리자 흑도는 다시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어찌되었든 인연이 닿으려는 것 같군.”

마현은 흑권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듀라한들을 몇 거두었다면 안 되겠지만 모두 중천으로 돌려보냈다니……, 흑권.”

“예, 주군.”

“그대를 보좌할 수하를 하나 두지 않겠나?”

“수하라니요?”

흑권은 마현의 말에 신중하게 반문했다.

“앞으로 큰 싸움이 있을 때마다 그 많은 수의 언데드들을 일일이 지휘하기가 좀 그렇지 않나?”

“……?”

“……그들을 내가 거둘 수 없으니 흑사신, 그대들이 팬텀 나이트가 된 그들을 보좌관으로서 수하로 거뒀으면 한다.”

마현은 간략하게 이유를 설명한 후 의향을 물었다.

“크크크, 본좌도 이제 수하가 생기는 거야?”

“그대들과 비할 바가 안 되겠지만 본교 장로들인 만큼 한 손 정도는 충분히 거들 수 있을 거라 여겨진다.”

흑도와 달리 신중을 기하는 흑권을 보며 마현은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속하의 입장으로 어찌 주군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흑권이 받아들이자 다른 흑사신들도 순순히 따르는 모습이었다.

“크크크, 크크크!”

물론 흑도만이 소리 죽여 웃음소리를 질질 흘리면서 좋아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일은 일단 넘어가고……. 무영대주, 무영대는 어떤가?”

“무영대는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재정비시켜 놓도록.”

“예, 주군.”

무영대주가 명을 받들며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콰당 문이 열렸다.

“주, 주군.”

교주의 치료와 단 하루뿐이지만 고문으로 인해 다친 사공찬, 그리고 강시가 되어가는 장로들로 인해 본교로 돌아와 누구보다 바쁘게 생활하던 가릉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던지 문을 연 후 무릎을 양손으로 짚고 한참을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무슨 일이지?”

“부교주님께서, 헉헉. 부교주님께서…….”

가릉은 숨을 몰아쉬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스승님께서?”

“부교주님께서 교주 자리에 오르신답니다, 주군.”

“뭣이라?”

얼마나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마현이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거세게 밀리며 콰당 넘어졌다.

* * *

전소된 흔적을 말끔히 치워 커다란 석단만이 휑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주전 터.

석단 위 중앙에 가로로 일 장, 세로로 이 장이 훌쩍 넘는 어마어마한 그림이 걸렸다. 그 그림에는 피로 물든 전장 중앙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아수라가 그러져 있었다.

그 아래 화려한 비단이 깔리고, 그 위에 아수라에게 바치는 신단(神壇)이 차려졌다.

보통 삼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신단인데, 마주전 터 중앙에 차려진 신단은 의외로 간소했다.

신들의 주식이라 일컬어지는 하얀 떡과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돼지고기, 그리고 특이하게도 붉은 빛깔이 감도는 사람 머리만한 만두가 신단에 차려진 제물의 전부였다.

떡은 아수라의 주식이오, 고기는 적들의 살점이며, 붉은 빛깔의 만두는 적장의 머리를 뜻한다.

마교가 종교로써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하나의 거대한 마도문파로 변신을 꾀했지만 근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 지금 아수라를 향해 만든 신단이 바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종교적 색채였다.

그렇게 차려진 신단 옆에는 이제는 태상교주로 즉조(卽祚)한 사공소와 지금은 이공자 위에 있지만 내일부터는 공자 자리를 박탈당하게 될 사공찬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둘만 남은 장로 회회혈마와 삼안혈화가 마현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신단 아래 귀림의 피가 뿌려진 앞마당에는 수뇌부를 비롯해 마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많은 마인들이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만들어진 예복(禮服)을 입고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교주님 납시오!”

신단 위로 모습을 드러낸 가릉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허진의 교주 즉위식의 시작을 알렸다.

“천하제일마교!”

“천하제일마교!”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신단 아래 마인들은 마교의 절대적 두 구호를 외치며 장판석 맨바닥 위로 오체투지하며 몸을 한껏 낮췄다.

또한 신단 위에 앉아 있는 이들 중 사공소를 제외하고 마현과 사공찬, 그리고 두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저벅 저벅 저벅.

신단 위로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적막감이 흐르는 마주전 터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의 주인은 아수라상이 새겨진 적색 곤룡포를 입은 허진이었다.

허진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공소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고, 그에 맞춰 자리에 앉은 채였지만 사공소 역시 고개를 깊게 숙였다.

“모두 고개를 들라!”

마력을 담은 허진의 목소리는 마주전 터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교주 즉위식을 위한 천제(天祭)를 드리겠노라!”

가릉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그렇게 시작된 천제를 주관하는 가릉의 목소리에 맞춰 허진은 신단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술이 신단 위에 올라가고, 축문이 이어졌다.

한 시진 가까이 그렇게 이어진 지루한 천제였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기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고, 경건했다.

“나 아수라의 이름으로 허락하노니, 허진을 나를 숭배하는 마교의 제37대 마교 교주로 임명하노라!”

가릉의 그 말을 끝으로 허진은 신단 끝, 마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허진은 의식용으로 준비된 검을 향해 손을 뻗었고 허공섭물을 이용해 끌어당겨 잡았다. 허진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러 자신의 팔뚝을 베었다.

푸핫!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어 신단 바닥을 적셨다.

“이 땅에 적셔질 피는 본좌의 피로 끝이다! 더 이상 이 땅에 교인의 피를 적시지 않게 하겠노라!”

허진은 검을 크게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의식용 검은 신단에 깊숙이 꽂혔다.

“와아아아아아!”

“교주님 만세! 만세!”

“태상교주님 만세! 만세!”

의식을 끝으로 마인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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