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9화
허진이 손을 살짝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함성이 뚝 멈췄다.
“교주로서 첫 명을 내린다.”
허진은 고개를 돌려 신단 위에 서 있는 마현을 쳐다보았다.
“대공자 마현은 교명(校命)을 받들라!”
뜬금없는 부름이었지만 마현은 허진의 명을 받고 신단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진이 가릉을 부르자 그는 커다란 목함을 하나 들고 다가왔다. 허진은 그 안에서 또 하나의 곤룡포를 꺼내들었다. 허진이 입은 것과 같은 모양에 같은 아수라상이 그려진 곤룡포였지만 색이 달랐다.
허진의 곤룡포가 핏빛 적색이라면 허진이 꺼내든 곤룡포는 짙은 묵색이었다.
그 곤룡포의 의미를 안 마인들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숙연해졌다.
묵색 곤룡포를 입을 수 있는 자는 마교에서 단 한 명!
바로 소교주만이 입을 수 있는 곤룡포였다.
“대공자 마현을 이 시각 이후로 본교 소교주 직에 제수한다.”
허진은 신단 아래로 내려와 마현을 일으켜 세운 후 묵색 곤룡포를 활짝 펼쳐 그의 어깨에 씌웠다. 마현이 곤룡포를 어깨에 걸친 채 마인들을 향해 몸을 트는 순간!
“와아아아!”
“소교주 만세, 만세!”
“흑풍마군 만세, 만세!”
조금 전과 비등할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허진과 마현을 보며 사공찬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런 사공찬의 손을 사공소가 아무런 말없이 꽉 잡았다.
* * *
마현은 입고 있는 묵색 곤룡포를 내려다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소교주 자리에 오른다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언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묵색 곤룡포는 더더욱 어색했다.
또한 부담되는 자리였다.
귀림과 검림에 관한 일만 마무리되면 마현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살던 세상,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 움직임에 소교주 자리는 걸림돌이 되면 되었지 도움을 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복잡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출시킬 수도 없었다.
바로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허진 때문이었다.
허진은 그 스스로가 교주 자리에 오른 것보다 자신이 소교주 자리에 오른 것이 더 기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마현은 내심 침음성을 삼켜야 했다.
“감축드립니다, 주군.”
“주군, 경하드리옵니다.”
그리고 모든 의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하들이 다가와 제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웃음에 마현은 내심 착잡하고 복잡해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현은 마지막으로 다가온 한 사람, 사공찬 앞에서는 웃을 수 없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사공찬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감축드립니다, 소교주.”
사공찬은 숙일 때만큼 천천히 허리를 폈다.
자신만큼이나 사공찬 역시 복잡한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고맙소.”
사공찬은 화답하는 마현을 한참이나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심입니다.”
그리고 다시 꺼낸 말이 묘하게 마현을 자극했다.
“이렇게 진심을 담아 축하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사공찬은 전처럼 당당하게 어깨를 쭉 폈다.
“제가 원하는 자리는 바로 소교주가 아닌 까닭입니다.”
사공찬은 쫙 편 어깨처럼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보란 듯이…….
“그럼.”
사공찬은 다시 한 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석단 아래로 내려갔다.
상처를 입어 몸이 성하지 않았지만 전보다 더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전보다 한결 표정이 편해진 듯 보였다.
마현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마주전을 빠져나가는 사공찬의 뒷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 * *
황량한 모래언덕, 그 위에 듬성듬성 놓인 돌산, 그리고 메마른 바람이 휘몰아치는 서장의 어느 사막과 초원이 공존하는 기기묘묘한 땅.
돌산인지 아니면 거대한 돌무더기인지 구분하기 좀처럼 애매한 돌덩이들 사이로 장정 두세 명이 족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 때가 꼬질꼬질 낀 남루한 피풍의를 입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바로 도종극이었다.
그는 풍에 걸린 노인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동물의 생살과 피를 마시고 있었다. 손 떨림이 심해 입속에 쏟아 붓는 피의 반은 입 밖으로 흘리는 상황이었지만, 도종극은 최대한 받아 마시면서 생고기를 꼭꼭 씹어 삼켰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독기로 가득 찬 집념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결국 도종극은 독기 어린 눈빛을 빼면 영락없는 폐인의 모습이었다.
사실 망가진 외형만이 아니라 현재 도종극이 처한 상황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최악이었다.
콱!
도종극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들고 있던 짐승의 뼈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큭!”
하지만 생각대로 짐승의 뼈는 바닥에 꽂히지 않았고, 그로 인해 충격은 고스란히 도종극의 팔로 전달되었다. 거기에 뼈에 뾰족한 그 무엇이 있었던지 손바닥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손바닥에서 아릿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도종극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벽에 주먹을 휘두르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꽉 말아 쥔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다시 내렸다.
단단한 돌벽에 자신의 주먹을 휘둘러봤자 부서지는 것은 돌이 아니라 자신의 주먹인 까닭이다.
‘젠장!’
일단 살기 위해 도종극은 귀림의 잠력폭단(潛力爆丹)을 복용했다. 하지만 마교의 추살단 역할을 맡은 지옥참마대는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자신을 쫓았다.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도종극은 잠력폭단을 이용해 끌어올린 잠력, 즉 본연진기를 무리하게 사용했다.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되어 버렸다.
본연진기란 무인을 떠나 사람이라면 장차 살아가는데 중요한 근원이었다.
또한 내력과 달리 한 번 소모가 되면 어지간한 영약으로도 다시 채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서 귀곡으로만 간다면!’
도종극의 탁한 눈빛이 생기로 반짝였다.
‘가리라! 반드시 살아서 귀곡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네놈들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
도종극은 먹다만 짐승의 생고기를 들어 다시 이빨로 찢어 질겅질겅 씹어댔다.
사박!
그때 근처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도종극은 긴장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벽에 붙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는 입안에서 씹던 고기도 잊은 채 숨소리를 낮췄다.
“주군.”
“누구냐?”
“갈 대주입니다.”
그 목소리에 도종극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갈승도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다지 좋지 않다.”
긴장의 끈을 놓아서인지 도종극은 힘겹게 앉아 돌벽에 몸을 기댔다.
도종극은 최대한 몸의 떨림을 숨기려 했지만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도종극의 몸이 완전히 망가졌음을 갈승도 역시 알아차렸다.
하지만 갈승도는 모른 척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데리고 오너라.”
그 명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광풍적월대원 하나가 시체나 다름없는 능자필을 어깨에 짊어지고 와 패대기치듯 도종극 앞에 집어던졌다.
그로 인해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라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오히려 도종극은 눈을 번쩍 떴다.
“주군, 왜 이자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까?”
갈승도는 귀림의 인물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도종극의 사람이었다.
그렇다 보니 갈승도가 능자필을 제대로 본 것은 지하사옥에 갇혀 있을 때뿐이었다.
즉, 갈승도와 그의 사람들로 구성된 광풍적월대는 도종극에게 마지막 한 수였던 것이다.
“왜긴……, 나의 스승이니까.”
도종극의 말에 갈승도의 콧등에 주름이 만들어졌다.
꿈틀거리는 능자필을 보자 도종극은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돌벽에 손을 짚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 종극이냐?”
능자필은 도종극의 마지막 말에 힘겨운 목소리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예, 스승님.”
도종극은 능자필 앞으로 걸어가며 나긋하고 친근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다가간 도종극은 앞서 말한 목소리와 달리 더욱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발을 들어 능자필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그러면서 더욱 부드럽고 싹싹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스승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종극입니다.”
“크으으!”
도종극의 발에 밟힌 능자필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이노…… 옴!”
능자필의 억눌린 호통에 도종극의 눈썹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더욱 잔혹한 눈빛으로 능자필의 얼굴을 밟고 있는 발을 이리저리 강하게 비볐다.
“……나를 죽일 셈이냐?”
도종극은 능자필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자신의 얼굴 앞으로 잡아당겼다.
“죽으면 안 되시죠.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나,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게 할 생각입니다. 천강시로서…….”
도종극은 왼손을 들어 있는 힘껏 능자필의 관자놀이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내력이 주먹과 손목을 보호해 주지 않아서인지, 시큰한 고통에 도종극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크크크.”
도종극은 힘겨움에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희열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귀곡으로 가야지. 그리고 당장 힘이 없으니 율기를 통해 지원을 좀 받아야겠지.”
갈승도는 수하를 시켜 기절한 능자필을 다시 집어 들게 했다.
“몇이지?”
“광풍적월대 중 스무 명만 데리고 왔습니다.”
“나쁘지만은 않군.”
“주군의 은공을 생각하면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갈승도는 도종극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남들이 도종극을 뭐라고 하든 갈승도에게 있어서 그 은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니 갈승도의 인생에서 도종극을 뺀다면 남는 것은 삼류 쓰레기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아마 도종극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런 쓰레기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대주 자리에 올라 기반을 다진 것은 자신의 순수한 노력으로 이룬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 도종극의 도움이었으니, 갈승도의 입장에서는 그를 위해 한 목숨 던지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그만큼 이루고 싶은 것도 이루어 봤고, 누려볼 것도 누려본 것이다.
애초에 도종극의 마지막 한 수로 키워진 것인 만큼 후회도 없었고, 그만큼 각오도 서 있었다.
“가자, 귀곡으로!”
“속하가 모시겠습니다.”
갈승도가 도종극의 허리를 잡고 끌고 온 자신의 애마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가자! 이제 우리의 보금자리가 될 귀곡으로!”
갈승도가 말고삐를 당기며 자신을 따라온 대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명!”
“명!”
그렇게 스무 기의 인마가 자욱한 모래바람을 만들며 운남성 경계 부근 서장의 끝자락을 향해 질주했다.
* * *
사공소는 태상교주 자리에 오르며 실질적으로 무림에서 은퇴했다.
그 뒤를 이어 교주 자리에 오른 허진은 마교의 내부 개편작업에 곧바로 들어갔다. 겉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달랐다.
부교주 자리는 공석으로 비워 두었다.
장로 직에는 마의당 당주였던 가릉이 대장로로 임명되었고, 회회혈마와 삼안혈화가 이장로와 삼장로를 맡았다. 그 뒤로 귀갑철마대주인 국충이 사장로로, 마지막으로 염왕대주 기건양이 오장로로 임명되었다.
그로 인해 호원칠무대가 통합을 거쳐 호원오무대(護院五武隊)로 다시 재편성되었다.
광풍적월대의 남은 소수와 귀갑철마대, 그리고 지옥참마대를 하나로 통합시켜 지옥철마대(地獄鐵馬隊)가 만들어졌고, 대주로 지옥참마대주가 임명되었다.
혈검대와 살귀대, 문혼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