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1화
마현 앞에 무영대주가 엎드려 있었다.
그런 그의 몸은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머리가 숙여진 바닥에는 눈물이 흥건하게 얼룩져 있었다.
“……주군.”
무영대주는 지나온 삶이 한순간 복받치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마현을 불렀다.
“푸른 하늘을 보고 살아라.”
마현의 말에 무영대주의 어깨가 다시금 떨렸다.
“그렇다면 속하의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 말해보라, 내 들어줄 수 있는 것이면 들어줄 테니.”
“사십이 넘는 인생이었습니다만…… 속하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사옵니다. 그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주군.”
무영대주의 소원을 듣자 마현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본교를 위해 뼈와 살을 바치라는 뜻으로 마(魔)의 성과 함께 충(忠)이라는 이름을 내리겠다.”
“가…… 감사하옵니다.”
무영대주는 ‘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더욱 깊게 숙였다.
“축하하네, 마 각주.”
둘 사이를 비켜 앉아 있던 가릉이 무영대주에게 다가와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감사합니다, 가 대장로님.”
무영대주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재빨리 소매로 눈가를 닦았지만 부질없는 행동이 되어 버렸다. 어느새 다시 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버린 까닭이었다.
“자자, 이럴 시간이 없네. 어서 마주전으로 가보게. 교주님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무영대주, 아니 곧 무영각주가 될 마충, 그는 다시금 마현을 향해 대례를 한 후 허진을 알현하기 위해 흑풍각을 나섰다.
“심란하십니까?”
가릉이 무영대주가 나간 방문을 한참이나 말없이 쳐다보는 마현에게 다가갔다.
“조금.”
마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마현은 의자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탁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마현은 전대 군사인 마뇌 공융의 손자 공효를 만나기 위해 가릉과 함께 흑풍각을 나섰다.
* * *
마교는 마도의 거대한 문파인 동시에 수많은 교인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성이었다.
십만마도.
마교를 일컫는 말 중 하나다.
그만큼 마교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이 많다는 소리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을 비비고 살아가는 곳에는 어디든 시장바닥이 있기 마련. 왁자지껄하고 부산스런 시장골목 안으로 마현과 가릉이 들어섰다. 혹여나 발생할 번잡함을 미리 차단하고자 평범한 마의를 입고 나왔다.
“저 객잔인 모양이군.”
마현은 허름한 객잔을 쳐다보았다.
무영대주가 알려준 객잔이었다. 바로 취구라는 멸시 어린 별명이 붙은 공효가 자주 들락거린다는 곳이었다.
“대장로. 오랜만에 술 한 잔 어떤가?”
마현의 담담한 제안에 가릉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요 며칠 술을 입에 대지 못해 입안이 껄끄러웠는데……, 소교주님께서 사시는 겁니까? 끌끌끌.”
둘은 의견 일치를 보자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오래된 객잔인 것 같았다.
사람들 손길에 닳아 반들반들해진 오래된 탁자며, 의자.
누렇게 변한 벽, 그리고 그 사이사이 땜질식으로 보수한 흔적들.
허름하고 누추하다고 눈살을 찌푸릴 사람도 있겠지만 마현은 그 세월의 흔적에서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 하나가 후딱 뛰어와 걸레로 마현과 가릉이 앉은 탁자를 재빨리 닦았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자네는 여기 오는 손님들을 다 아는가?”
마현은 담백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렴요. 손님 분들이 대부분 단골인지라 어지간하면 다 압니다요.”
“그런가?”
“본교 분은 아니신 듯하고……, 본교와 거래하시는 상단 분…….”
점소이는 마현과 가릉의 몸을 재빠르게 훑으며 제 나름에는 머리를 굴렸다.
“자네 눈썰미 하나는 좋군. 맞네, 얼마 전에 마교와 거래가 통하여 오늘 처음으로 온 것일세.”
“헤헤헤, 이래봬도 제가 한 눈썰미 한다는 소리는 듣습니다요.”
점소이는 헤픈 웃음을 남발하며 은근히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순박한지라 마현과 가릉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여기가 허름하게 보여 단골이 아니면 잘 찾지 않지만…… 이래봬도 삼십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죠. 손님들이 안 와서 그렇지 여기 풍사객잔의 음식이 좋아 한 번 와서 맛을 보면 단골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지요.”
“구이, 이놈아!”
“히익!”
그렇게 자기 자랑과 객잔 자랑을 일장 늘어놓던 점소이 구이는 카랑카랑한 늙은 주인의 호통에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가끔 단골이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주인 나리의 꼬장 때문입니다요.”
구이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소곤 그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악의가 없는 험담에 마현과 가릉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서 음식 나르지 않고 뭘 그리 주절거리는 것이냐, 이놈아!”
“갑니다, 가요.”
점소이는 주문도 받지 않고 화들짝 놀란 얼굴로 주방으로 뛰어갔다.
“재미있는 점소이군요.”
“거기에 좋은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거고.”
그러는 사이 구이가 다시 마현과 가릉이 앉아 있는 탁자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빨갛게 물든 혹 하나가 금세 만들어져 있었다.
“근데 주문은…….”
구이는 손가락으로 눈가에 핑 도는 눈물을 찍어내며 물었다.
“이런, 우리랑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주인께 단단히 찍힌 모양이군.”
가릉이 안 되어 보인다는 표정으로 구이를 위로했다.
“그렇습죠?”
“우리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니 좋은 걸로 몇 접시 내오게. 술도 알아서 내오고.”
마현의 말에 점소이의 입이 옆으로 쭈욱 찢어졌다.
“알겠습니다요.”
그리고 얼마 후 탁자 위에 술과 음식 몇 접시가 차려졌다.
객잔에서 직접 담근 듯한 죽엽청 맛도 생각 이상으로 일품이었고, 허름한 접시에 담긴 것에 비해 맛도 나름 훌륭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며 소소한 대화를 나눌 때쯤이었다.
“킁킁!”
코를 훌쩍이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마시는 소리를 내며 한 사내가 객잔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갈지자(之)로 걷는 것을 보니 이미 얼큰하게 술 한 잔 곁들인 모양이었다.
“캬악! 퉤!”
결국 사내는 킁킁거리다가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에 누런 가래침까지 툭 뱉으며 사타구니 안에 손을 넣어 벅벅 긁고는 객잔 안을 두리번거렸다.
“크흠!”
그의 등장에 객잔 안에 있던 이들 모두 언짢은 듯 기침을 내뱉으며 등을 돌렸다. 사내가 등장하자마자 객잔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모두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 실실거리던 사내의 표정이 어느 한순간 종잇장처럼 와락 구겨졌다.
그러더니 한 탁자로 걸어갔다.
“이보쇼.”
사내는 탁자에 앉아 있는 한 중년인에게로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중년인은 사내의 입에서 풍기는 지독한 술 냄새에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왜 째려보는데? 앙?”
“허흠!”
중년인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사내의 시선을 외면했다.
“야!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할 게 아니야?”
“아니, 이놈이.”
다분히 시비조가 짙은 사내의 목소리에 결국 중년인도 참을 수 없었던지 격한 반응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곁에 앉아 있던 일행이 그런 중년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상종해 봐야 자네만 더러워지네. 그러지 말고 일어나세나.”
일행은 멸시에 찬 눈빛으로 사내를 잠시 쳐다보고는 중년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종이 뭐가 어째? 이런 썅!”
사내는 탁자를 두 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뒤집어엎었다.
쿠당탕탕, 와장창창창.
기세는 좋았으나 그의 몸은 이미 제 한 몸 가누기에도 힘겨울 정도로 만취한 상태였다.
“아이쿠!”
그러니 넘어진 탁자와 주위에 깔린 깨진 그릇들의 파편과 널브러진 음식물 위로 넘어져 나뒹굴었다.
“에잉!”
옷자락에 음식물이 조금 튀었는지 중년인과 그 일행은 동시에 찝찝함에 못마땅한 소리를 내며 옷을 팡팡 털었다.
“아이구, 손님.”
그 모습에 점소이가 재빨리 뛰어와 깨끗한 수건으로 그들의 옷을 닦았다.
하지만 옷에 밴 음식물이라는 것이 수건으로 닦는다고 닦여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넓게 번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점소이는 그것이 마치 자신이 그런 것처럼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됐네.”
점소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지라 중년인과 그 일행은 옷을 털며 계산대로 가 버렸다.
“미안하네. 내 음식값은 받지 않음세.”
주인도 미안했던지 겸연쩍은 모습이었다.
“주인장도 그러시오. 사람이 그리 좋으니 저 망나니가 계속 오는 것이 아니요?”
중년인의 타박 아닌 타박에 주인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낄낄낄, 푸하하하하!”
그때 음식물과 함께 나뒹군 사내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친 놈. 옜소.”
중년인과 일행이 음식물에 뒤범벅이 되어 진탕된 사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계산대 위로 오늘 먹은 음식값에 해당하는 구리문 몇 냥을 올려놓았다.
“아닙니다, 너무 죄송해서 오늘 음식값은…….”
“그러지 말고 받으시오. 어차피 오늘 같은 일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어차피 객잔 올 때부터 예상하고 온 일이니. 가세나.”
중년인과 일행은 돈을 다시 내미는 주인의 손을 마다한 후 객잔을 나가 버렸다.
“휴우.”
주인은 한참 동안 손안에 쥐여진 돈을 내려다보다 깊은 시름 어린 한숨을 내쉬고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는 사내를 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쓰불.”
난장판이 다 된 바닥을 정리하기 위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온 점소이는 나직하게 욕을 내뱉으며 탁자를 바로 세웠다.
“이놈아, 손님을 빈자리로 안내하거라.”
그사이 일어난 사내는 마치 관부의 높은 사람의 행차라도 알리는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며 점소이의 어깨에 한 팔을 턱하니 걸쳤다.
“아이, 쓰벌!”
사내의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술 냄새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 몸이 찰싹 붙은 관계로 사내의 옷에 묻은 음식물이 고스란히 점소이의 깨끗한 옷에도 묻게 된 것이다.
점소이는 신경질적으로 사내의 손을 확 뿌리쳤다.
“어, 어!”
술에 취해 제 몸을 잘 가누지 못하던 사내는 다시 바닥으로 콰당 처박혔다.
“개뿔, 손님은 무슨!”
사근사근하던 점소이가 멸시에 가득 찬 눈빛을 드러냈다. 점소이의 표정으로 보건데 허우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사내의 얼굴에 침이라도 안 뱉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점소이의 그런 표정도 잠시였다.
곰방대가 점소이의 머리 위로 홱 떨어진 것이다.
“아얏!”
“이놈이!”
머리를 붙잡고 털썩 주저앉은 점소이의 뒤로 꼬장꼬장하게 생긴 주인이 곰방대를 잡고 서 있었다.
“손님한테 그 무슨 말버릇이냐!”
“아이, 진짜! 주인어른, 돈도 안 내는 놈이 무슨 손님이에요!”
점소이는 있는 힘껏 소리를 빽 질렀다.
“이놈이!”
주인도 점소이의 말에 별반 할 말이 없었던지 그저 인상만 쓸 뿐이었다.
제아무리 자신이 날뛰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점소이는 사내를 한 번 노려보고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주방으로 홱 들어갔다.
“괜찮은가?”
“아고고, 나 죽네. 나 죽어.”
그 사내는 일어나다 말고 다시 바닥에 누워 뒹굴면서 엄살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