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4화
“아닐세. 아! 좌검 호법.”
우검 호법은 재빨리 쪽지를 소매 속으로 감췄다.
“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네. 빈자리를 잠시나마 좀 부탁함세.”
그때 좌검 호법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쪽지도 그러했거니와 그동안 함께 생활하는 동안 그가 이렇게 개인적인 사유로 자리를 비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얼마 전 진필성이 한 말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급한 일이 있는 겐가? 알았네,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게.”
좌검 호법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고맙네.”
우검 호법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난 후 좌검 호법은 은밀히 모습을 감추고 그의 뒤를 밟았다.
우검 호법이 서둘러 찾아간 곳은 중경에서 유명한 청루인 옥루루(玉淚樓)였다. 그가 그곳에 들어가자 좌검 호법은 더욱 큰 의구심이 생겨났다.
좌검 호법은 안으로 들어가 시녀에게 으름장을 놓아 우검 호법이 들어간 바로 옆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형님!”
우검 호법이 방으로 들어가자 초췌한 몰골을 한 율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율기는 우검 호법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격정적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율 아우.”
우검 호법 역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율기에게 다가가다 멈칫했다.
“어떻게 된 거냐? 이 몰골은 뭐고?”
우검 호법은 율기의 어깨를 잡은 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율기의 모습은 반 거지나 다름없었다.
고생이란 고생은 혼자 다했는지 옷은 허름하다 못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땟국물에 절어 있었다. 흡사 서생이 산길에서 산적을 만나 있는 모든 것을 털리고 오랜 시간 유랑한 듯한 행색이었다.
우검 호법의 표정을 보며 율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앉으시지요, 형님.”
율기는 자신이 앉아 있는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래, 일단 그러자구나.”
우검 호법이 자리를 하고 곧 술상과 기녀들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율기는 술상만 받고 기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게냐? 마교에 있어야 할 네가 뜬금없이 이 형을 찾아온 것이냐?”
“근 이십여 년 만에 만난 이 우제의 술잔도 받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소제의 술부터 한 잔 받으시지요.”
율기는 극진한 태도로 술이 담긴 주전자를 들었다. 우검 호법, 아니 후동관은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애써 누르며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몇 순배가 돌았다.
“놀라셨습니까?”
율기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하지 않느냐. 지금쯤 마교 쪽 거사를 진행해야 할 네가……, 혹? 실패한 것이냐?”
후동관은 자신의 말에 깜짝 놀라 율기를 쳐다보았다.
율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 자체가 곧 답이나 매한가지였다.
“답답하구나,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율기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순간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살심이 번뜩였다.
율기의 말이 이어질수록 후동관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고작 대공자 그 한 명 때문에 우리의 백년지계가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후동관은 허무하게 탄식했다.
“고작 대공자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형님.”
율기는 내심 이를 박박 갈았다.
“또한 소제가 너무 안이했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스스로 채찍질했다.
“휴우,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후동관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다행히 도종극이 마교에서 살아서 도망을 쳤으니 지금쯤 귀곡으로 향했을 겁니다. 그곳에서 차후의 일을 도모할 생각입니다.”
율기의 말에 후동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스승님을 찾아뵐 생각입니다. 또 일을 도모하려면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니 금 사형도 찾아뵙고 도움을 청해볼 생각입니다.”
“스승님께서 실망이 크시겠구나.”
후동관의 말에 율기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특히 너에게는 많은 기대를 거셨는데 말이다. 어찌되었거나 오늘 바로 북경으로 향한다면 스승님과 금 사형, 두 분을 모두 뵐 수 있을 것이다.”
“……?”
“오늘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진 림주와 금 사형이 길을 떠났다.”
“그렇군요.”
다시 술잔을 비운 율기가 후동관을 쳐다보며 쑥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소제의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형님은 잘 지내시는지요?”
“글쎄다.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후동관은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매우 쓸쓸해 보였다.
“하긴 형님은 무공보다 글을 더 좋아하셨지요.”
“훗.”
후동관은 고소를 머금었다.
“지금도 조정(朝廷)에 나가고 싶으신 겁니까?”
“조정이라……, 그리 보이느냐?”
“……?”
“잊었다 여겼는데…… 그 말이 다시 내 마음을 뒤흔드니 잊은 게 아닌 듯싶구나.”
후동관은 술이 담긴 술잔을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렸다.
“스승님을 원망하십니까?”
“스승님의 은공이 있는데 어찌 원망하겠느냐? 다만 이 가슴 속에 든 활화산을 마음껏 터트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다 내 업보가 무거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구나.”
한이 섞인 푸념이었다.
“그래, 너의 심정은 어떠냐?”
“저야 어릴 적부터 글방보다는 골목싸움을 더 좋아했지요.”
“그래, 그랬었지.”
흡족해하는 율기의 대답에 후동관은 그나마 얼굴을 펼 수 있었다.
“검림은 어떻습니까? 무림맹에 관한 일은 잘 진행이 되는지요?”
“위태위태하지만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다.”
“형님이 한 손 거들면 더 잘 돌아갈 텐데 말입니다.”
율기로선 그냥 물은 것뿐인데, 후동관은 꼭 자신을 타박하는 것 같아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허진과 마현을 죽이거나, 그렇게 하지 못해도 시간만 좀 더 끌어줬다면 마교 쪽 대계도 완성되고 율기가 이처럼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이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
“마교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이는 흑풍마군 마현입니다.”
“새겨들으마.”
“그럼 소제는 형님 얼굴도 봤으니 이제 일어나겠습니다.”
율기의 말에 후동관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왔지만 일어서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하루 빨리 대계가 완성되어 편히 형님을 보고 싶습니다.”
율기 역시 아쉬운 듯 바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럼 또 언제 뵐지 모르겠지만 건강하십시오, 형님.”
“그래 너도 몸조심하거라.”
율기가 방을 나가고 후동관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율기가 저리 된 것이 꼭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이십여 년 만에 만난 율기는 훌쩍 커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라…….”
후동관은 술잔에 손을 뻗다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붓을 놓고 검을 쥐는 동안 생긴 원치 않은 굳은살이 손안에 가득 잡혔다.
한동안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던 손을 움켜쥐었다.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하루라도 빨리 대계를 끝내는 것이겠지?’
그동안 자신이 원하는 학자의 길이 아닌 피가 난무하는 무림의 생활이 싫어 적당히 타협하며 현실을 외면했었다.
후동관은 술잔을 들어 호탕하게 한입에 털어 넣었다.
탕!
그리고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확고한 결심이 담긴 황금빛 기운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드르륵.
좌검 호법이 조용히 문들 열고 방을 빠져나왔다.
우검 호법이 홀로 있는 방을 쳐다보는 좌검 호법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좌검 호법은 우검 호법이 있는 방을 잠시 더 주시하다가 굳은 얼굴로 옥루루를 빠져나갔다.
* * *
야광주가 내뿜는 빛으로 인해 그다지 어둡지 않은 근 10여 장의 넓은 석실.
검은 선 하나와 붉은 선 하나가 교차할 때마다 현란한 빛을 산란하고 있었다.
팡 팡 팡!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이어지는 파음들.
“하아압!”
한쪽에서 일갈의 기합성이 터져 나오며 한 줄기의 검은 선이 붉은 점을 덮쳤다. 이에 질세라 붉은 점도 긴 선으로 변화하며 두 색이 부딪혔다.
“아직 멀었다!”
파방!
두 선이 교차할 때마다 만들어진 파공력에 석실을 이루고 있는 두꺼운 석면들이 삐걱거리며 뒤흔들렸다.
쾅!
그런 석면 위로 검은 선이 날아와 부딪혔다.
“큭!”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검은 선은 바로 묵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 마현이었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신형을 드러낸 붉은 선은 붉은 곤룡포를 입은 허진이었다.
그렇게 마현은 마라역천공을, 허진은 천마신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 * *
울창하다 못해 하늘마저 가리고 있는 나무들과 그 아래로 퍼져 있는 검은 빛이 감도는 자욱한 안개.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뒤덮고 있는 어느 계곡.
단순히 빛이 들지 않는 어둠침침한 계곡이라고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 그대로 비명횡사할 수 있는 사지(死地)였다.
짙은 안개가 단지 빛을 차단하고 시야를 어둡게 만드는 원인이 아닌 까닭이다.
그 원인은 안개를 만든 유형의 습기가 바로 주검에서 만들어진 지독한 시독(屍毒)이라는 데 있었다.
안개, 시독에 가려진 바닥에는 수백, 아니 수천, 아니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중 반 이상은 이미 살점들이 다 썩어 거무튀튀한 뼈로만 존재했고, 나머지 반도 대부분 상태가 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빠각.
그 뼈를 밟으며 한 사내가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시독의 역겨우면서 시큼한 독향에 사내는 코끝을 찡그리고 있었다.
단 한 호흡만으로도 사람을 절명시킬 수 있는 시독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인상만 찌푸릴 뿐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 그를 자세히 살피면 황금빛 기운이 은은하게 몸을 덮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들어선 이는 율기였고, 이곳은 바로 귀곡이었다.
‘언제 와도 이곳만큼은 영 적응이 안 되는군.’
율기는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계곡 안으로 한식경쯤 더 들어가자 안개 속에서 희미하지만 어둠을 밝히는 횃불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율기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횃불을 향해 걸어갔다.
횃불 앞에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는 반듯한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쿵!
율기는 주먹에 내력을 담아 두들겼다.
드르륵.
곧 석문 하나가 움푹 파이며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살짝 드러난 내부 역시 어두컴컴했다.
“누구냐?”
카랑카랑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틈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역시 갈 대주였군. 나요, 율기.”
율기는 자신의 짐작이 맞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밝혔다.
“……율 군사?”
잠시 멈칫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더니 이내 자그만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갈승도였다.
그르르륵!
율기의 얼굴을 확인하자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석문이 요란한 굉음을 만들며 열렸다. 율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눈인사를 하는 갈승도를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율기는 등에 매고 있던 봇짐을 갈승도에게 넘기며 입에 물고 있던 피독주를 뱉었다.
“어찌 나인지 알았소?”
갈승도는 눈매를 날카롭게 만들며 따지듯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