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90화 (190/351)

# 190

15화

“실패한 군사이지만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소. 그리고 갈 대주가 소림주를 데리고 도망칠 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율기는 피독주를 대충 닦아 품에 넣었다.

“소림주는 어디 있소?”

“이제는 림주요.”

갈승도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 뭐…….”

율기는 그다지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미지근하게 말끝을 흐렸다.

“림주는 시도실(尸導室)에 있소?”

“크흠!”

무성의한 율기의 말에 갈승도는 언짢은 듯 기침을 머금었다. 그 후 율기가 건넨 봇짐을 들었다.

“이건 뭐요?”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어지간한 작은 성 하나쯤은 살 수 있는 것들이니.”

율기의 말에 갈승도는 적잖게 놀랐는지 가벼운 딸꾹질을 하며 들고 있는 봇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간간히 밝혀진 횃불을 따라 이십여 장 좁은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상당히 넓은 동굴이 나왔다. 율기는 동굴 내부를 잠시 둘러보다가 벽면에 두꺼운 나무로 된 문 앞으로 걸어갔다.

와장창창창!

그릇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신경질적인 욕을 내뱉는 도종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젠장! 젠장!”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독기만 있을 뿐 힘은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율기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

어지럽게 널브러진 탁자를 손으로 짚고 있던 도종극이 다시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고개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온 율기를 보자 잠시 놀란 듯 도종극의 내지르던 목소리가 끊겼다.

“크크크, 이게 누구신가? 율 군사가 아니신가?”

“오랜만이오.”

율기는 문을 닫은 후 탁자 근처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의자 하나를 잡아 세워 앉았다.

그리고 문이 다시 열리고 갈승도가 안으로 들어왔다.

“봇짐은 여기에 두고 나가보시오. 내 림주와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

“두고 나가라.”

잠시 머뭇거리던 갈승도가 도종극의 명이 떨어지자 율기가 가져온 봇짐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 도종극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지?”

도종극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력을 모두 상실한 것이오?”

“내력만 상실하면 다행이게…….”

도종극의 생기가 사라지고 휑해진 눈을 봤을 때부터 율기는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누가 알았겠나? 망할 놈의 스승이 여기 있는 영약들과 독약들을 모조리 마교로 가지고 갔을 줄…….”

도종극은 말을 하다 말고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들 중 제법 큰 그릇을 하나 들어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퍼석!

그릇은 구석에 누워 있는 능자필에게로 날아가 부딪히며 부서졌다.

아직까지 숨은 붙어 있는지 그의 몸이 약간 움찔거렸다.

“귀곡에 있을 영약과 독약을 생각해 잠력폭단까지 사용했었는데, 빠드득!”

그렇게 한동안 거의 빈사상태로 누워 있는 능자필을 보며 이를 빡빡 간 도종극이 고개를 돌려 율기를 쳐다보았다.

“방법이 없겠나?”

“잠력폭단까지 복용을 한 것 보니 애초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 같아 보이오?”

“흥.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묻는군.”

도종극은 등받이에 몸을 철썩 기대며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긁어댔다.

“워낙 스승이라는 놈이 비밀이 많은지라 잘은 모르겠지만, 군사가 몸담은 쪽에 말해 어떻게 안 되겠나? 내 그리만 해 준다면 이 몸이 갈가리 찢겨 죽는 한이 있어도 마교만은 무너트려 주지.”

율기의 대답을 기다리며 도종극은 무의식적으로 탁자 위를 손톱을 박박 긁어댔다. 그만큼 초조하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하나가 아니라 둘이니 투자할 만하다고 여겨지는데.”

도종극은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으며 율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율기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탁자 위에 놓인 봇짐을 율기 앞으로 내밀었다.

“천강시를 제조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들을 좀 담아왔소.”

율기의 말에 도종극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봇짐을 마구 풀어헤쳤다. 그리고 봇짐 안에 든 내용물을 보자 입술이 옆으로 벌어지며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크크크, 크하하하하!”

그리고는 미친 듯이 웃었다.

* * *

다듬어지지 않은 바위와 돌덩이들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벽과 천장. 거대한 돌산 속을 인위적으로 파 만든 동굴이었다.

그 동굴 안에 마현이 서 있었다.

허진의 명에 따라 폐관수련을 위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도 수련에 지장이 없도록 벽이나 천장과 달리 바닥은 깨끗하게 다듬은 장판석이 깔려 있었다. 천장에 박힌 야광주 몇 개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석실을 그나마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 동굴 한 중앙에 마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마현은 눈을 감기 전 동굴 끝에 꽉 닫힌 거대한 철문을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마현의 눈에서 굳은 결심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잠시 철문을 쳐다보던 마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너의 몸은 완전하지 않다.

마법이라는 무공을 위해 그리 다스렸는지는 모르나,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너의 몸은 너무 편향적이다.”

‘편향적이다라…….’

마현은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리며 조금 전 가부좌 튼 직후, 이 동굴에 들어오기 전 허진이 해준 조언을 보따리 풀듯이 하나하나 꺼내 다시 되새겼다.

단전 서클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기경팔맥을 따라 돌았다. 하지만 몸 전체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마현의 경지에 이르면 어느 정도는 타통되어 있어야 할 세맥들의 태반이 뚫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마현은 무공을 펼침에 있어 중요하고, 상승무공에 있어 기본이 될 주요 경맥인 십이경맥만을 이용하고 있었다.

허진이 마현의 몸이 편향적이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다.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시내와 강 같은 많은 흐름들은 결국에는 바다로 가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이야기하자면 수많은 공부가 결국 하나, 즉 으뜸으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네가 마법의 길만으로 극을 찾아갈 수도 있지만, 다른 길 역시 네가 추구하는 그 끝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네 몸은 그 끝으로 갈 수 있는 길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시작점이다.

무공이든 마법이든.

더욱 탄탄한 기초 위에 너의 길을 가거라.”

‘만류귀종.’

마현은 속으로 그 말을 다시 되새겼다.

조금 전 허진이 보여준 몇 수는 실로 놀라웠다.

마치 마법처럼 손에 불을 일으키고, 얼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뇌력을 쏘아냈으며 허공에 물건을 띄웠다. 만약 자신이 무공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면 또 다른 마법이라 믿었을 것이다.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기에.

마현은 기경팔맥을 따라 힘차게 자맥질하는 마력을 세맥으로 이동시켰다.

탁, 탁, 타다닥!

몸에서 마치 콩이 불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 오르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수록 마현의 몸은 짙은 흑무에 서서히 가려져갔다.

* * *

쾅 쾅 쾅!

남해태양궁주 양위도는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억세게 말아 쥔 주먹이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남해태양궁의 총력을 쏟아내도 북해빙궁의 정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겨우겨우 참아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왜구들 때문이었다.

남해태양궁과 북해빙궁의 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백중지세(伯仲之勢)를 이루고 있었다.

결국 남해태양궁이 북해빙궁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일을 벌였다가는 오히려 남해태양궁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해빙궁 역시 숨은 저력이 대단하다.

양위도가 홀몸이라면 그의 성격상 앞뒤 재지 않고 충분히 그리할 수 있지만 그는 수만은 수하들을 거느린 남해태양궁주였다. 그렇기에 그리할 수 없었다.

남해태양궁은 중원 최남단 해남성에 위치한다.

현재 해남성에는 성주가 없다.

아니 성주가 있지만 해남도에는 없다.

수군 역시 있지만, 실질적으로 있으나 마나한 유명무실한 존재들이었다.

실질적으로 해남도의 성주는 남해태양궁주인 양위도였고, 해남도의 수군은 남해태양궁의 무인들이었다. 즉, 해남도를 지키는 것은 남해태양궁이라는 소리다.

또한 양위도 역시 해남도인이었으며, 남해태양궁 무인의 9할 이상, 아니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이 해남도인들이었다.

그런 해남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왜구들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다. 그런 왜구들을 막기 위해 남해태양궁 전력의 5할 가량이 매일같이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

모든 힘을 모아 북해빙궁을 쳐도 승부를 점치기 어려운데 겨우 5할의 힘으로 북해빙궁을 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남해태양궁의 터전이자 고향을 등지고 모든 전력을 이끌고 가 북해빙궁을 칠 수도 없었다.

그리한다면 왜구의 손에 남해태양궁의 부모들이 죽고, 형제들이 간살당하며,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가게 될 생지옥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결국 참아야 한다는 소리인가?”

양위도의 목소리에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궁주님.”

그때 남해태양궁의 군사인 창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창 군사?”

창서를 대하는 양위도의 목소리는 그다지 곱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북해빙궁 정벌에 대해 가장 강경하게 ‘불가’를 표명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해태양궁 군사의 입장으로 불가를 외친 것이 이해는 된다지만, 그건 그거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는 어쩔 수 없었다.

“궁주님께 한 장의 서찰이 전서응을 통해 날아왔습니다.”

“전서응?”

전서응(傳書鷹)은 일반 무가에서 사용되는 전서구와 달리 황실과 군부에서만 사용된다. 결국 전서응을 통해 서찰이 왔다는 소리는 황실이나 관, 아니면 군부에서 왔다는 것이다.

비록 양위도가 해남도의 실질적인 성주라고는 하지만 남해태양궁은 철저하게 무림문파를 지향하는 곳이다. 그렇다 보니 관과의 왕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가져와 보라.”

창서는 자그맣게 말린 한 장의 서찰을 양위도 앞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서찰에는 밀봉과 더불어 보낸 이를 상징하는 밀납으로 찍힌 인장 하나가 붙어 있었다.

‘천무?’

양위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밀봉된 서찰을 펼쳐들었다.

양 궁주 전(前).

짐은 천무왕 진필성이라 하노라.

이렇게 양 궁주에게 서찰을 보낸 이유는 북해빙궁에 대한 복수를 하는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주고자 함이다. 북해빙궁에 복수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천무왕부로 오라.

천무왕부는 무림에서는 무림성이며, 짐 천무왕은 무림맹주이니라.

천무왕 진필서 서(書).

서찰을 읽은 양위도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

“창 군사.”

“예, 궁주님.”

“이 서찰이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하느냐?”

“혹 무림맹이 아닐까 짐작은 하지만 서찰의 내용을 보기 전까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림맹이라……. 이거 참.”

양위도는 서찰을 다시 접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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