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6화
“무림맹에서 온 것입니까, 궁주님?”
“무림맹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양위도의 질문 자체가 창서의 물음에 대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진위가 파악되지 않았지만 해남도에 들어온 상인에게 듣기로는 달포 전 무림맹은 천무왕부로, 무림맹주는 천무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흠…….”
“황실과 조정에서 상당히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현 황제의 스승인 조범 대학사가 ‘신민이지만 신민이 아닌 무림인들을 황실과 조정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품어준다면 군사력 증진과 더불어 황제 폐하의 관대함까지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며 찬성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학자들은 물론이요, 조정의 많은 대신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찬성으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웃기는 일이군.”
양위도는 무림맹에 대해 비웃었다.
“단순히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얻은 이익이 적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
“무림과 관이 부딪히면 어쩔 수 없이 무림에서 한 발 양보를 해야 했지만 무림맹주가 천무왕이 된 이상 오히려 앞으로는 관이 양보를 해야 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무림맹 산하 문파들은 단순히 무림 내 싸움이라고 해도 우위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문파일지라도 그들을 공격하면 황군을 공격하는 역도로 몰리게 됩니다. 즉, 무림맹은 이제 황제를 등에 업은 황군 아닌 황군이 된 것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편으로 상당한 이익을 취한 무림맹을 떠올린 양위도는 미간에 다시금 주름을 깊게 만들며 서찰을 창서 앞으로 내밀었다.
“읽어보라.”
창서가 무림맹에서 보내온 서찰을 모두 읽자 양위도가 그의 생각을 물었다.
“어찌하면 좋을 것 같은가?”
“일단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아쉬워 손을 내민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기에 모양새도 나쁘지 않고, 거기에 응한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을 거라 예상되기에 그렇습니다.”
“군사 말대로 하지. 내일 천무왕부, 크흠! 무림맹으로 갈 준비를 하라.”
잠시 고민에 빠졌던 양위도는 창서의 뜻을 받아들였다.
* * *
“정말 괜찮겠소?”
율기는 금으로 만들어진 침을 든 채 누워 있는 도종극을 향해 물었다.
“훗.”
도종극은 오히려 그 물음을 비웃었다.
이미 도종극의 몸에는 삼백오십네 개의 금침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율 군사가 그런 말을 하니 웃기군. 어차피 나 역시 하나의 도구 이상의 의미는 없을 텐데?”
“괜한 근심이었군.”
“크크크. 단지 아쉽군. 앞으로 운우지락의 쾌락을 느끼지 못할 몸이 될 테니 말이야.”
도종극은 몹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 세상 누구도 이루지 못한 진정한 금강불괴를 곧 이루지 않소?”
“율 군사의 목소리에는 참으로 단 꿀이 묻어 있군.”
“거기에 더불어 주인 못지않은 하인도 하나 생기고.”
“하인이라…….”
도종극은 고개를 살짝 돌려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검은 물이 찰랑거리는 석관을 쳐다보았다. 그 관에는 온갖 영약과 독물로 혼합된 검은 물속에 자신처럼 삼백서른다섯 개의 금침을 꽂은 능자필이 잠겨 있었다.
“크크크크.”
도종극은 쇠를 긁는 듯한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고개를 반듯하게 만들었다. 자신도 조금 후면 저 검은 물속에 잠길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자신은 이성을 갖는 것이고, 스승이었던 능자필은 이성을 잃고 자신의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만 다를 뿐.
“먹지 않아도 되고, 죽지도 않는…… 금강불괴의 몸이라, 기대가 되는군.”
도종극은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율기는 마지막 침을 놓고 도종극을 석관 안에 눕힌 후 검은 물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끝으로 도종극이 누워 있는 석관 위에 거울 하나를 매달았다.
도종극이 눈을 뜬 즉시 거울을 통해 그 자신을 볼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천강시는 강시가 되어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
다만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자를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걸 달리 생각하면 천강시가 되어 눈을 떴을 때, 거울로 제 자신을 본다면 그는 타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마친 율기는 자신을 감시하는 갈승도와 함께 석실을 빠져나갔다.
쾅!
그 후 갈승도가 석문이 열리는 기관석을 부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뿐인가?”
율기는 이제는 도종극이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기 전까지는 열리지 않을 석문을 쳐다보았다.
* * *
양위도는 대규모 인원을 꾸려 남해태양궁을 떠났다.
자신의 직속부대인 태양대(太陽隊)와 남해태양궁을 대표하는 두 무력단체인 적검대(赤劍隊)와 광양대(光陽隊) 중 적검대를 대동시켰다.
더욱이 소소한 인원들까지 더해져 무림성으로 향하는 숫자는 이백이 훌쩍 넘어섰다.
만일 무지한 촌로가 그들의 행렬을 본다면 황제의 행차로 착각을 할 정도로 무림성으로 향해는 남해태양궁의 규모는 크고 화려했다.
다분히 양위도의 주장이 반영된 의도적인 결과였다.
이유는 바로 천무왕이 된 무림맹주 진필성 때문이었다. 진필성이 왕으로 행세한다는 것은 이 나라의 제후가 되었다는 의미지만, 양위도는 그를 제후로 대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양위도는 자신과 남해태양궁의 힘을 보여줘 무림맹주와 남해태양궁주라는 동등한 입장으로 진필성을 만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진필성이 왕으로 자신을 대한다면, 무림과 관의 불가침을 내세워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며 대화를 끊을 생각이었다.
“크흠!”
그렇게 출발한 양위도는 무림성, 즉 천무왕부에 도착하자 인상을 구기며 기침을 머금었다.
이제껏 황제가 머문다는 자금성을 본 적이 없지만 자금성이 설마 이보다 클까 싶을 정도로 무림성은 어마어마한 크기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거대한 무림성 정문 앞에 서니 절로 입이 쩍 벌어졌던 것이다.
또한 무림성 정문을 비롯해 요소요소에 배치된 장정들은 무림맹 복장이 아니라 금군들이었다. 그들은 갑옷을 입은 채 하나같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양위도가 팔두마차에서 내려 정문 앞으로 다가가자 병사들이 창을 교차시켰다.
“어디서 온 누구시오?”
그 뒤로 등에 쌍창을 맨 장수 하나가 양위도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양위도는 설마 금군이 자신을 가로막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림성에서 금군을 본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장수 하나가 앞을 가로막자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남해태양궁에서 왔습니다.”
그때 창서가 앞으로 나서며 대신 대답했다.
“남해태양궁?”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남해태양궁의 군사 창 모라고 하며, 이분은 양위도 궁주님이십니다.”
“본장은 천무왕부를 지키는 천무방위군 천호장(千戶長)이오.”
서로 소개가 오갔지만 천호장은 병사를 시켜 문을 열지 않았다.
“미리 약조가 되어 있었습니다.”
“본장은 기별을 받지 못했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안에 기별을 넣어둘 테니.”
창서가 최대한 예를 다해 말했지만 천호장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의 태도로 보아 내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 둘의 대화에 양위도의 얼굴은 굳어졌고, 눈가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모멸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자신이 무림성에 도착하면서 인정하기 싫지만 한순간 위압감을 느낀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아이고, 이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얼마 후 제갈묘가 무림성 안에서 바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충!”
제갈묘가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일제히 기립 자세를 취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군례를 취했다.
“제가 그만 깜빡하고 기별을 넣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갈묘는 다분히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크흠, 괜찮소.”
양위도가 기분이 상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천호장, 큰 결례를 범하지는 않았겠지?”
“그렇습니다, 무위장군(武衛將軍)님.”
“잘했네. 수련은 어떤가?”
제갈묘는 천호장의 등에 매어져 있는 쌍단창을 보며 물었다.
“무위장군님 은공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갈묘는 현재는 절전되었지만 한때는 창술로 이름이 드높았던 양가창법의 무공서를 천호장에게 선물로 내렸다. 또한 그의 재량으로 백호장들에게도 양가창법의 일부를 전수할 수 있게 허락했다.
제갈세가는 오래전 창술로 유명하던 녕하양가가 멸문당한 후 우연히 양가창법을 습득했다.
제갈세가에서 창을 익힐 이가 없어 오랜 시간 서고에 보관해 두었던 것을 제갈묘가 과감히 천무방위군의 천무장과 백호장들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천호장과 백호장들을 뽑을 때 창만 다루는 이들로 선별했었다.
제아무리 금군의 천호장이고 백호장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무인이며 무장들이었다.
제갈묘의 의도는 유효적절했다. 그 선물은 처음 그가 천무방위군의 수장으로 임명됐을 때 생겨난 불쾌감을 단숨에 해소시키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천무방위군은 제갈묘를 진심으로 상관으로 모시며 충성스러운 군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제갈묘는 천호장과 간단한 안부인사를 주고받은 뒤 양위도와 창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으로 드시지요. 맹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을 안내하며 걸어가던 제갈묘가 생각난 듯 천호장을 불렀다.
“아참, 천호장.”
“예, 장군님.”
“남해태양궁에서 귀한 손님들이 왔으니 객당으로 모시게. 그리고 백호장 하나를 붙여 불편하지 않게 신경을 써주고.”
“알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천호장의 대답을 들은 제갈휘는 양위도와 창서를 데리고 무림성 안으로 들어갔다.
양위도는 맹주전인 천무전으로 향하는 동안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건물 자체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위압감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힌 까닭이었다.
“원래 중평왕부였던 것을 무림맹에 맞춰 손을 조금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무림의 세가나 문파와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제갈묘가 가는 내내 간단하게 무림성에 대해 설명을 곁들였다.
“나쁘지 않소.”
양위도는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제갈묘는 슬쩍 입술을 말아 올리고는 천무전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천무전 앞에는 또 다른 금군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분명 금군과 비슷한 복식인데 어딘가가 조금 달랐다.
“원래 맹주님의 수하들이었는데 지금은 천룡군이라고 하여 금군에 복속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예, 예상하신 대로 검림의 제자들입니다.”
창서의 물음에 제갈묘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하며 천무전 석단 위로 올라갔다.
척 척!
제갈묘를 본 검림의 제자들, 이제는 천룡군에 소속된 사내 둘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수고하게.”
제갈묘는 천무전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천무전 내 대전으로 들어서자 양위도는 다시 한 번 심기가 불편해졌다. 바로 화려함과 웅장함이 느껴지는 대전의 실내장식 때문이었다.
남해태양궁의 대전만은 자금성에 못지않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의 생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양위도는 진필성을 만나기도 전에 몇 번씩이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자 마음이 적잖게 불편했고 분통이 터졌다.
“맹주님, 남해태양궁의 귀빈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잘 하셨소, 군사.”
태사의에는 붉은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 진필성이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고급 비단 장삼을 입은 노인과 다부진 체격의 장년인 한 명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