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8화
드득, 툭!
도종극은 종잇장처럼 석관을 뜯어내고는 능자필의 머리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옥침을 뽑았다. 순간 능자필이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때 도종극이 능자필의 턱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눈앞으로 잡아당겼다.
“내가 누구냐?”
“……주인님이십니다.”
도종극은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능자필을 보며 하얀 이를 싱긋 드러냈다.
“크크크, 크하하하!”
도종극은 희열에 찬 웃음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젖혀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석실이 무섭게 공명하며 우르르 흔들렸다.
“기다려라, 쥐새끼 같은 놈! 마교를 너의 무덤으로 만들어 주마! 크하하하하!”
광소를 터트리는 도종극의 눈동자는 시커먼 광기로 번들거렸다.
* * *
새하얀 물감으로 세상을 칠해놓은 듯 설경으로 가득 찬 북해. 그 설경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더없이 차가워서 더 잘 어울리는 칼바람이 눈 덮인 대지를 휩쓸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순백의 세상에 이질적인 것들이 침범했다. 바로 붉디붉은 선홍빛 피와 살육에 사로잡힌 광기의 기운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새하얀 눈 위에 번지기 시작한 붉은 피는 북해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청경지수 호수마저 서서히 잠식해 들어갔다.
“으아악!”
“이놈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인간이란 말이냐?”
원한 가득한 절규가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까지 치솟아 올랐다.
북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둔덕 위에 한 장년인이 격정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양위도였다.
“모두 죽여라! 북해의 공기를 마신 자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살육하라. 북해의 피와 고기로 억울하게 죽어간 남해태양궁 소태양의 원한을 갚아주라!”
원한과 살기로 가득 찬 양위도의 목소리가 북해의 하늘을 쩌렁쩌렁 뒤덮었다.
* * *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남만.
숨쉬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불어대는 뜨거운 바람.
우거진 숲.
끈적끈적한 습기가 도처에 깔린 산림.
운남성 서쪽과 남만을 구분 짓고 그 둘을 명확하게 갈라놓은 거대한 녹색 띠가 펼쳐져 있었다.
그 녹음에 하늘의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운 화마가 치솟아 올랐다.
검은 연기가 푸른 하늘까지 치솟는 것을 보면 자연적인 발화가 아니었다.
불이 잘 붙는 물질인 석칠(石漆; 석유)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일으킨 방화가 틀림없었다.
우지끈, 콰당탕탕.
화마를 이기지 못한 거대한 나무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시커먼 길이 길게 만들어졌다.
그 길로 중무장을 하고 대오를 갖춘 수많은 황군이 들어섰다.
그 선두에 몇몇의 장수들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운남성 황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별군이자, 남만토벌군(南蠻討伐軍)이라고 명명한 황군을 이끄는 장수들이었다.
“감히 황제 폐하에게 반기를 든 남만야수궁을 토벌하기 전까지,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선두에 나선 수염과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수, 남만토벌군의 총 지휘자인 유기량은 낭랑한 목소리로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 * *
새로이 지어진 거대한 마주전.
마주전 뒤로 자연이 만든 거대한 병풍. 기이한 무늬가 즐비한 그 절벽 한 중앙에 이질적인 철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철문 위에는 역시 철로 만들어져 박힌 현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마련동(魔連洞)이라 적혀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절벽을 인위적으로 뚫어 만든 수련동이었고, 철문은 그 수련동과 바깥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또한 그 철문은 밖에 두꺼운 자물쇠가 걸려 있어서 누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안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철문 앞에는 허진아 약간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바로 수련동에서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올 마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허진은 마현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 스스로 철문을 열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폐관수련을 위해 마련동에 들어설 때 허진은 미리 그 점에 대해서 마현에게 이야기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철문을 부수고 나오라고.
마라역천공의 경지가 팔성을 넘어선다면 충분히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해 주었다.
마현은 그런 허진의 말에 정확히 열한 달치의 벽곡단만을 가지고 마련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열한 달이 지났다.
무심한 눈으로 철문을 보고 서 있는 허진 뒤로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사장로 국충과 얼마 전 군사 자리에 오른 공효를 제외한 네 장로였다.
그런 네 사람과 달리 국충은 팔짱을 끼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을 즐기며 공효가 서 있었다.
그런 그들 뒤로 허진처럼 굳은 믿음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마현을 기다리고 있는 흑풍대가 모여 있었다.
“거 참, 사람 지치게 만드는군.”
시간이 기약 없이 흐르자 공효는 바닥에 듬성듬성 핀 잡초 하나를 툭 잡아 뽑으며 투덜거렸다.
“어허!”
그런 공효를 향해 가릉이 낮게 꾸짖었다.
공효는 그런 가릉을 향해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마현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없는 공효였기에 다른 이들이 노려보는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다.
오히려 공효는 더욱 심심하다는 표정으로 잡초 하나를 다시 뜯어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철컹!
그 순간 묵직한 쇳덩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철문에서 들렸다.
공효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철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나오려는가?’
공효는 양손으로 귀를 살짝 막았다.
사 개월 전 군사로 임명되며 마환단 하나와 함께 몸을 수신할 수 있는 마공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평생 무공과 담을 쌓고 살았던 인물이었다.
사실 사 개월 동안 마공을 익혀봐야 얼마나 익힐 수 있겠는가?
철문이 부서지며 만들어지는 고막을 찢을 뜻한 굉음을 이길 수 없는 그였기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것이었다.
‘엥?’
그런 공효의 얼굴 한쪽 뺨이 일그러졌다.
철문이 부서지며 열릴 것이라 여겼던 공효의 생각과는 달리 조용히 철문이 옆으로 활짝 열리는 게 아닌가.
공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에서는 저렇게 열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직접 마련동 제작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그 때문에 미간을 좁히던 공효는 열리는 문 앞에 서 있는 허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마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안에서 열리도록 만들었군. 하긴, 교주님께 제자 다치는 꼴을 보여드릴 수는 없을 테니까.’
공효는 입에 물고 있던 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철문이 열리고 깊은 어둠 속에서 마현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뭐야? 눈에 힘만 부리부리 주고?’
마현은 눈빛만 다부져 보일뿐 그의 몸에서는 마인들에게서 풍기는 그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마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함께 온 이들 모두 석상처럼 몸이 굳었다.
‘흥!’
공효는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끼며 마현을 본체만체하며 스쳐지나가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얼핏 봤을 때 안에서 열리는 장치는 없는 것 같던데…….’
공효는 전에 지나가다 한 번 본 설계도를 떠올리며 철문을 살짝 잡았다.
짜작, 짜자작!
‘응?’
그 이상한 소리에 공효는 안으로 들어가기 앞서 고개를 들어 철문을 쳐다보았다.
“헉!”
철문에는 전에 없던 수천 줄기의 실금들이 쫘악 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끼긱, 끼기기긱!
철문에 난 금은 단순한 금이 아니었다. 철문이 그 금을 따라 조금씩 뒤틀리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카가가강!
그렇게 금이 가며 철문이 어긋난 것은 잠시였다. 곧 사위가 고요에 잠기더니 철문은 수십 조각, 아니 수백 조각으로 쪼개져 와르르 무너졌다.
바로 공효의 머리 위로.
“으아악!”
공효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개구리처럼 쪼그려 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별로 소용없는 행동이었지만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콰과광, 콰르르르, 쿵쿵!
철문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져 찍히는 소리가 서슬 퍼렇게 귀에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공효는 ‘이제 죽는구나’ 속으로 외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쿨럭, 쿨럭!”
철문이 부서져 자신을 덮쳤는데 먼지만 자욱하게 피어오를 뿐 그 어떤 통증도 없었다.
“……?”
공효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빠끔히 들었다.
거기 태양을 등지고 마현이 서 있었다.
“훗!”
마현의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이빨이 보였다. 마현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공효의 뺨을 가볍게 툭툭 치고는, 그를 놔두고 허진을 향해 걸어갔다.
“제자 미흡하여 마라역천공을 극성으로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십성이냐?”
“예, 스승님.”
공효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그런 마현과 허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낄낄낄.”
그런 공효 곁으로 가릉이 다가와 히죽 웃었다.
“어디 참기름을 볶나? 고소한 냄새가 나는구나. 클클클.”
“히익!”
공효는 그런 가릉의 말에 욱했지만 그게 다였다.
“교주님을 제외하고 누가 소교주님을 감당할 수 있을꼬? 이십대에 반박귀진이라……. 공효야, 네 소원은 이제 더더욱 풀기 힘들게 되었구나.”
가릉의 말을 들으며 공효는 마치 입에 물고 있는 풀에 원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왕창왕창 연신 씹어댔다.
‘그래도 반드시 소교주의 턱에…….’
공효는 말아 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딱 한 대, 딱 한 대 턱에 꽂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느 세월에…….
* * *
마현이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조촐하게 마련되었다. 몇몇 수뇌들이 모여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때까지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마현은 흑풍대와 함께 자신의 거처인 흑풍각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많이 달라졌군.”
마현은 자신을 뒤따르는 흑풍대를 잠시 눈여겨본 뒤 좌우로 따르는 왕귀진과 철용을 보며 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사이 자발적인 훈련만으로 성장했을 것이라 여기기엔 어려울 만큼 그들의 기도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거칠게 내뿜던 마기 역시 차분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교주님께서 상승마공 심법을 내려주셨습니다.”
“스승님께서?”
마현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마현의 입가에 흡족함이 내비쳤다.
“주군, 그쪽이 아닙니다.”
“응?”
마현은 익숙한 길을 따라 흑풍각으로 향했는데, 왕귀진이 그런 그를 잠시 불러 세웠다.
“이쪽입니다, 주군.”
왕귀진이 가리킨 곳은 흑풍각이 아닌 부마전이었다.
마현이 십 개월 동안 폐관수련을 할 때 흑풍각은 없어졌다. 그 대신 부마전이 약간 개조된 후 흑풍전으로 변모했고, 이제는 그 흑풍전이 마현의 거처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흑풍각은 완전히 사라졌나?”
“흑풍각 건물은 허물어져 사라졌지만 흑풍각의 이름은 살아 있습니다.”
“……?”
“그 자리에 새로 지어진 흑풍각을 저희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현은 이제는 자신의 거처가 된 흑풍전으로 향했다.
흑풍대에게 하루 동안 편히 쉬라고 명을 내린 다음 흑풍전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