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99화 (199/351)

# 199

24화

“대공이라…… 나쁜 호칭은 아니군.”

흑창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살짝 지었다.

“도끼 자루 키워 봐.”

암창은 흑창의 명에 도끼 자루를 창만큼 길게 뽑았다.

“흠……, 영 폼이 안 나. 도끼머리 위에 창날 만들어 봐. 그래도 뭔가 허전해. 그렇다고 도끼를 뺄 수도 없고. 도끼자루 뒤에 갈고리 하나 만들어 봐.”

암창은 흑창이 시키는 대로 도끼의 모양을 이리저리 새롭게 만들었다.

“뭐 그럭저럭 괜찮군.”

흑창은 암창의 창과 같은 도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왕부가 들고 있는 도끼는 하르센 대륙에서 기사나 용병이 사용하는 핼버드(halberd)의 형태로 변해 있었다.

흑창은 그런 암창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근엄하게 한 목소리를 뽑았다.

“너는 이제부터 이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고금제일천하무쌍우내무적창이신 흑창의 보좌관으로 너에게만은 특별히 부(副)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고금제일천하무쌍우내무적창의 호칭을 사용하도록 허락한다.”

“가, 감사합니다.”

암창은 살짝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이제는 팬텀 나이트가 된 네 장로 앞으로 마현이 다가섰다.

그런 마현을 보자 순간 암도를 제외한 나머지 세 팬텀 나이트들은 거부하는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복종의 인이 각인되어 마현을 보자마자 그대로 부복했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들 역시 흑사신처럼 생전의 것들을 고스란히 되살린 까닭이다.

그렇기에 마현은 흑사신들과 달리 그들에게 복종의 인을 각인시킨 것이다.

“주군을 뵈옵니다!”

“주군을 뵈옵니다!”

팬텀 나이트들은 일제히 한목소리를 만들었다.

“너희들에게 암사령(暗四令)이란 호칭을 내린다.”

“감사합니다, 주군.”

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는 팬텀 나이트들 중 암권은 복종과 거부 사이의 복잡한 감정이 눈동자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암권은 다른 이들보다 더욱 깊이 고개가 숙여졌다.

* * *

흑풍전 뒤뜰에 지어진 별채로 향하는 마현의 발걸음은 무척 바빴다. 팬텀 나이트를 깨우고 나니 벌써 자정이 훌쩍 지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마현은 팬텀 나이트가 된 그들이 적응할 시간도 주지 못하고 어둠으로 귀환시켰다.

흑사신에게 팬텀 나이트, 암사령의 소환에 대한 권한까지 위임했다. 그렇기에 흑사신들이 알아서 그들의 적응을 도울 것이다.

별채 마당에 막 들어설 때 문이 열리고 마의당 소속 마의가 밖으로 나왔다.

“소교주님을 뵈옵니다.”

마의는 마현을 알아보고는 그 앞으로 다가와 크게 허리를 숙였다. 그가 별채에 들렸다가 나왔다면 필시 설린이 깨어났다는 뜻일 터.

“상태는 어떤가?”

“심신이 많이 상했습니다. 특히 마음에 상처가 가장 커, 귀인께서 먼저 마음을 추스르기 전까지 딱히 어떻게 할 일은 없습니다, 소교주님.”

역시나 짐작한대로 마음의 상처였다.

“그래도 몸이 건강해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에 보양식을 준비시켰사옵고, 보약도 지어 올릴 예정입니다.”

마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마의는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별채를 빠져나갔다.

마현가 별채에 들어서자 방문 앞에는 곤오가 서 있었다. 마현은 곤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니 설린이 창문을 활짝 연 채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아무리 북해보다 이곳이 따뜻하다고 한들 지금은 자정을 엄긴 시각이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오.”

마현은 활짝 열린 창문으로 다가가 닫으려 했다.

“그냥 놔두세요.”

“…….”

“쌀쌀함이 오히려 포근해요.”

설린의 애잔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마현은 결국 창문을 닫지 못했다. 그 대신 입고 있는 묵색 곤룡포를 벗어 설린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것만은 거부하지 않았다.

마현은 근처에 있는 의자를 하나 당겨 앉았다. 마현은 애써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굳이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녀의 곁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조용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시녀가 쟁반에 죽을 들고 들어왔다. 마현은 탁자를 당겨 그녀 앞에 놓고 쟁반을 올렸다.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들어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하지만 설린은 그저 죽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버지랑 한한파파, 그리고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천휘. 다들 살아 있을까요?”

설린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할 때 손에 쥐고 있는 수저도 함께 떨렸다.

“살아 있을 것이오.”

“지금도 새하얀 땅에 붉은 피가 뿌려지고 있겠죠?”

“그 붉은 피의 천 배 만 배를 돌려받으면 되오. 그러려면 설 소저가 중심이 되어야 하오. 드시오.”

마현은 설린의 손을 잡아 죽을 뜨게 했다.

마지못해 죽을 한 술 떠 입에 넣은 설린은 결국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런 설린의 무릎 위에는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없었다.

그녀는 숨을 죽여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마현은 그런 설린 가까이 다가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설린은 마현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겨 울고 또 울었다.

“우시오, 눈물이 메말라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다 울거든 먹기 싫어도, 안 들어가도 먹으시오. 그래야 천 배 만 배 돌려줄 수 있으니…….”

마현은 마치 독백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그런 마현의 품에서 한참이나 숨죽여 울던 설린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큼지막하게 죽을 한 술 떠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런 그녀의 뺨으로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설린은 멈추지 않고 죽을 먹었다.

억지로 죽을 입 안으로 밀어 넣어서일까. 가끔 설린은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끝내 죽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마현은 그런 설린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살짝 지으며 물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설린은 물을 마신 뒤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마 소협.”

“말하시오.”

“소녀를 한 번만 안아주세요.”

설린이 마현에게 다가가 머리를 살짝 기댔다. 마현은 그런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설린은 마현의 가슴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옷자락을 꼭 쥐었다. 마치 연인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여인처럼…….

“피곤하네요, 쉬고 싶어요.”

설린은 잠시 후에 마현의 품에서 빠져나와 곧장 침상으로 향했다.

“푹 쉬시오.”

마현은 이불을 들어 설린을 덮어주었다.

“내가 복수의 길을 함께 걸어주겠소.”

설린은 그런 마현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말없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마현은 방 안을 밝히고 있는 촛불을 끄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마현이 나가자 설린은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다시 밑으로 내렸다. 그런 그녀의 뺨에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줘서 고마웠어요. 이제 내게 사랑은 사치가 되었어요. 안녕, 내 사랑…….’

방문 밖에는 여전히 곤오가 서 있었다.

“막 잠들었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감사는 무슨……. 아! 북해빙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졌네.”

마현은 원래 설린에게 해주려 했던 말을 곤오에게 대신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 감사합니다.”

곤오는 왜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지 속이 상했다. 그렇기에 곤오는 더욱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북해에 정보망을 세우고 정보를 수집하려면 빠른 시일에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 같네. 본교 군사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결과가 어느 정도 나오려면 달포 이상은 걸린다고 하더군. 그때쯤 되면 설 소저도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을 것이니 나머지 일은 그때 논의하기로 하지. 그리고 모레 아침, 내가 본교의 일로 보름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이네. 그 일이 끝나면 내 힘닿는 데까지 힘을 보태줌세.”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곤오의 목소리는 미미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마교로 온 이유는 일단 남해태양궁의 손길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하고자 함이 더 컸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많은 것을 받고 있었다.

“굳이 설린이 아니더라도……. 아닐세.”

마현은 굳이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말을 끊었다.

“내일 시간이 되면 다시 들리겠네. 설린을 잘 부탁하네.”

마현은 곤오의 마중을 받으며 별채를 벗어났다.

* * *

“몸이 안 좋으니…… 다음에 뵙겠답니다.”

어제도, 오늘 아침도 곤오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결국 그 말은 어제도, 오늘 아침도 설린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곤오가 그리 말하니 강제로 설린 방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혹 더 병세가 깊어졌나 싶어 마의와 시녀에게 알아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병상에서 일어나기 위해 치료도 잘 받고 음식도 잘 먹는다고 했다. 그만큼 마음을 다잡았고,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나를 만나지 않으려 하는지…….’

문득 이틀 전 저녁이 떠올랐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들도 떠올랐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흑풍대에게 그녀를 잘 보호하라 명을 내렸지만 불길한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휴우, 그저 기우였으면 좋으련만.’

“이보게, 현.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야율황기의 목소리가 깊은 생각에 잠긴 마현을 일깨웠다.

“아무것도 아닐세.”

“두고 온 연인 때문인가?”

야율황기는 마현 곁으로 다가와 실없는 농을 던졌다.

“싱겁기는…….”

농을 농으로 맞받아쳤지만 마현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잠깐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자네는 무엇을 타고 가려고 그러는가?”

야율황기는 대호의 등에 올라타며 물었다.

“걱정하는 겐가?”

평소 농담을 즐기지 않는 마현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야율황기와 농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불편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잊으려는 것이다.

“궁하면 내가 태워주고.”

야율황기가 대호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쳤다.

캬홍!

대호는 마현을 태우는 게 싫은지 입을 쩍 벌려 야율황기의 오른손을 살짝 깨물었다.

“요놈 봐라! 요즘 안 맞았지? 앙?”

야율황기는 대호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한 대 후려쳤다.

“나에게도 멋진 놈이 하나 있다네. 풍, 소환!”

마현의 마기가 바닥으로 스며들고 땅거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푸히이이잉!

다크스티드 풍이 땅을 뚫고 올라왔다. 풍은 앞발을 번쩍 들어올리며 야성이 느껴지는 울음을 토해냈다.

크르르르르.

풍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호가 몸을 낮게 깔며 사납게 으르릉 거렸다.

풍을 바라보는 대호의 눈빛에는 다분히 경계하는 빛이 깔려 있었다.

푸르르.

그런 대호의 모습에 풍 역시 앞발로 땅을 파내듯 비비며 코에서 뜨거운 김을 내뿜었다.

“호오!”

야율황기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호에서 내려 풍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대호가 야율황기의 옷 뒷자락을 덥석 물고는 자신에게로 당기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알았다. 이놈아.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

아쉽지만 야율황기는 대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올라탔다.

“가자!”

마현이 풍에게 올라타는 것을 본 야율황기는 남만으로 향하는 힘찬 질주의 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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