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09화 (209/351)

# 209

9화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합니다, 스승님.”

“흠…….”

허진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도종극을 통해 율기의 소재를 파악했습니다.”

“율기의 소재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교주께서 일을 마무리 짓지 않고 본교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있어 보입니다.”

공효의 말에 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곳에 오기 전 감히 제자가 수뇌부를 소집시켰습니다.”

“중요한 사안인 모양이구나.”

마현이 경솔하게 수뇌부까지 모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허진이었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스승님.”

“수뇌부를 소집시켰다니 그들이 오면 듣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마주전 안으로 장로급 인사들과 호원오무대의 대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윽고 모든 수뇌들이 마주전 안에 소집되자 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 소교주가 본교의 배신자이자 세작인 율기와 도종극을 잡아오기 위해 남만으로 떠난 것은 모두 알 것이오.”

마현은 남만토벌군 유기량의 군막에서 입수한 정보를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마현이 말을 마쳤을 때에는 마주전 내의 공기에 은은한 살기가 깔려 있었다.

너무나도 무거워진 분위기 때문인지 다들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더냐?”

허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렇습니다, 교주님.”

마현은 공식적인 자리라 스승님이 아닌 교주님이란 호칭으로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교를 정비하여 무림맹과 일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국충이었다.

귀갑철마대를 이끌었던 그답게 상당히 호전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마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공효가 마현의 말을 거들었다.

“단순히 무림의 일이라면 당장이라도 병력을 모아 무림맹을 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무림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교를 공격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서슴없이 칼을 뽑는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욱 크다고 여겨집니다. 어찌되었든 현재 무림맹주는 단순한 무림맹의 맹주가 아니라 천무왕입니다. 더불어 황군까지 가세했습니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부딪힌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하자는 말인가?”

“맞서야지요, 하지만 일단은 잠시 몸을 웅크리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크흠!”

국충은 공효의 말이 못마땅한지 불편한 음성을 삼켰다.

“단지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낼 때까지입니다. 자칫 쉽게 움직였다가는 정말로 역도의 무리로 낙인 찍혀 멸교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황제페하와 황실의 뜻이 아니라면 그때는 일전도 불사할 것입니다.”

“수성이라……, 마음에 안 드는군. 하지만 지금은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인가?”

허진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수성을 준비함에 있어 구금상단은 제외시켜야 할 것입니다.”

“구금상단?”

구금상단이라면 마교에서도 상당한 양을 거래하고 있는 상단이었다.

“율기가 구금상단과 관련이 있습니다.”

“……?”

“현재 율기가 몸을 숨긴 곳이 구금상단입니다.”

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효를 쳐다보았다.

“공 군사.”

“알겠사옵니다, 교주님.”

허진의 뜻을 알아차린 공효는 머릿속으로 바로 대비책을 세웠다.

“그리고 무고한 교인들이 다칠 수 있으니 일단 그들을 외성으로 피신시키라. 아울러 지금부터 전시체제로 돌입하라!”

“명!”

“명!”

허진은 명을 받드는 수뇌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현을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 공효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어차피 수성 쪽으로 가닥이 잡힌 만큼 회의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회의 막바지에 이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마현에게로 모아졌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마현의 임무가 막중해진 것이다. 이제 단순히 마현이 율기를 잡아 배후를 찾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닌 까닭이다.

조금 과장을 섞는다면 마교의 흥망성쇠가 마현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너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구나.”

“반드시 율기의 정체와 그 배후를 찾아내겠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내일 바로 떠날까 합니다.”

“이번에도 홀로 갈 생각이냐?”

“흑풍대를 대동할 생각입니다.”

“흑풍대라…….”

소규모이지만 결코 소규모가 아닌, 단지 소교주 마현의 직속 부대였지만 이제는 마교 역사상 유일무이한 무력단체라 인식되고 있었다.

“시일이 촉박하지만 가능하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을 마쳐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현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무림맹이 황군과 함께 마교를 쳐들어올 날이 얼추 한 달 정도 남아 있었다.

마교에서 무림맹까지 가는 것만 따져도 보름 이상, 귀환까지 염두하고 왕복하기까지의 날을 꼽아본다면 한 달 이상의 시일이 소요된다.

평범한 마인이라면, 아니 마인을 떠나 무인이라면 얼토당토한 이야기에 비웃음이 흘러나왔겠지만 마현이 말한다면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된다.

아니 마현이라면 충분히 그리할 수 있다.

몇몇은 마교의 흥망성쇠를 오직 마현에게만 맡기자니 답답한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회의는 금세 끝났다.

회의가 끝나고 마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전을 나왔다.

설린에게 북해빙궁주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마현은 그의 뜻대로 바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지 못했다. 사공찬이 잠시 마현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소교주.”

사공찬의 말처럼 오랜만이었다.

마현이 소교주 자리에 오른 후 개인적으로 단둘이 대면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 전에도 딱히 둘이 대면한 적이 없으니 이렇게 마주선 것도 꽤나 오랜만이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마현도 사공찬에게 예를 다해 인사를 건넸다.

“웅담의 쓸개도 제법 맛을 알게 되었소.”

말 속에 가시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가시가 돋아나와 있지는 않았다.

사공찬이 굳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들춰내지 않아도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고 있는지, 그의 몸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공찬은 당당했다.

하지만 당당함이 전과는 다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던 과거의 오만함에서 묻어 나오던 당당함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만든 당당함이라고 할까?

여몽이 그랬던가?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에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한다고[刮目相對].

사공찬은 매번 볼 때마다 눈빛과 기운이 맑고 정중해지는 느낌이었다.

“고맙소, 그리고 부탁하오. 나는 아직까지 지지 않았소.”

두서없는 말이었다.

위에서 보는 마인의 생활이 아닌 밑에서 보는 마인의 생활을 보게 해준 점이 고맙고, 또한 마교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부탁이요, 마지막으로 자신은 여전히 교주 자리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마현은 사공찬의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마현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지어졌다.

사공찬은 그 미소에 화답하듯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몸을 돌려 사라졌다.

‘공자의 신분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뜻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을 텐데…….’

마현은 고소를 지으며 설린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흑풍전 내 별채.

마현이 북해빙궁에게 잠시 내어준 곳이다.

그 별채 앞마당에 설영대주 곤오를 비롯해 서른 명의 설영대가 완전무장을 한 채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역시나 완전무장을 한 설린이 서 있었다.

설린을 비롯해 설영대가 은은한 투기를 일으키며 이렇게 집합한 것은 다시 북해로 떠나기 위함이었다.

물론 굳은 의지로 그것을 명한 것은 설린임에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나요?”

“예, 궁주님.”

곤오가 설린을 궁주라고 부른다.

설린과 곤오, 그리고 설영대는 북해빙궁이 무너졌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살아남은 북해의 무인들이 자신들뿐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자신들이 다시 북해빙궁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궁주가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 설린이 오르는 것은 당연지사.

“북해의 한이 얼마나 차갑고 매서운지 보여줄 것입니다. 이제 북해의 바람이 태양을 얼려버릴 것입니다.”

설린의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에 시린 냉기가 풀풀 날렸다.

“…….”

“…….”

설린의 말에 환호도 없다.

함성도 없다.

대답도 없다.

하지만 서른 명의 설영대는 설린의 말에 환호했고, 함성을 질렀으며, 대답했다. 눈빛으로……, 시선만으로 사물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눈빛으로 말이다.

설린은 한 명 한 명 설영대원의 눈빛을 일일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을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출병뿐이다.

다시 외롭고 힘든 길을 나서는 것이다.

설린은 고개를 살짝 돌려 별채 넘어 보이는 흑풍전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윗니에 깨물려졌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꽉 다물렸다.

“곤 대주, 마주전으로 가겠어요.”

마침내 출병의 명이 떨어졌다.

“예, 궁주님.”

곤오가 몸을 돌려 설영대원들을 쳐다보았다.

“가자, 우리들의 한 맺힌 땅으로.”

설린이 먼저 걸음을 내딛었다.

이어 곤오와 설영대원들이 발을 내딛어야 했다. 하지만 한 걸음만에 설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궁주님?”

곤오가 고개를 들어 설린을 쳐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설린의 눈동자.

곤오는 재빨리 그녀의 눈동자가 향한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마현이 서 있었다.

‘흠!’

곤오가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설린이 출병을 굳이 앞당긴 이유가 바로 마현 때문이라는 것을 곤오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설린이 가슴을 도려내며 마현을 마음속에서 베어냈음도 잘 알고 있었다.

곤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설린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필 이때.’

설린이 냉랭한 모습으로 마현 앞으로 다가갔다.

별채로 들어서는 순간 마현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졌다.

앞마당에 모인 설영대와 설린,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보는 순간 감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현의 굳어진 표정에는 안도감이 묻어나왔다.

‘하루라도 늦었다면…….’

아마 평생 동안 후회했으리라.

냉랭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설린을 보자 마현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 표정이 그녀의 다짐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 소교주님.”

역시나 마현의 짐작처럼 설린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현은 활짝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에 당황한 것인지 설린이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마 소교주님.”

그리곤 다시 차갑게 마현을 불렀다.

마치 이제껏 아무런 감정도 없던 사이처럼, 그냥 남을 부르는 것처럼…….

“저는 북…….”

“린.”

하지만 마현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설린을 불렀다.

“본녀는 그렇게 부르라 허락한 적이 없습…….”

설린의 눈동자가 잠시 떨리는가 싶었지만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차갑게 말을 건넸다. 아니 건네려 했다. 하지만 마현은 그런 그녀의 표정과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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