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10화
“살아계시오.”
“도대체 왜 자꾸 본녀의 말을…….”
“살아계시오.”
“이보세요, 마 소교주님!”
결국 설린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현은 다시 활짝 웃었다.
설린은 흔들리는 마음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려 마현의 웃음을 외면했다.
“물러나 주세요.”
“살아계시오.”
“도대체 누가 살아 있단 말인가요? 네?”
설린은 모질고 날카롭게 소리를 빽 질렀다.
“서, 설마…….”
근처에 있던 곤오가 떨리는 음성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곤오는 처음부터 마현의 말에 귀를 닫은 설린과 달리 무슨 말을 하는지 간파했다.
설린은 그런 곤오를 보자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때서야 닫았던 귀를 열고 마현을 쳐다보았다.
마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린, 그대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분이 살아계시오.”
“아, 아버지께서?”
설린은 손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곧 설관악이 살아 있다는 뜻.
기쁨에 겨운 눈물이 설린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마현은 한 걸음 다가가 홀로 울음을 삼키고 있는 설린을 따뜻하게 품에 안았다.
그녀가 몸으로 우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우시오, 실컷.”
설린은 마현의 가슴 언저리의 옷깃을 꽉 잡고 숨죽여 울고 또 울었다.
곤오도 기쁨에 겨워 눈시울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마현이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출병이 늦어졌지만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값어치가 있는 소식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가?
“살아계신다. 우리의 주군이!”
곤오가 고개를 돌려 설영대를 쳐다보았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설영대가 함성을 질렀다.
아니 울부짖었다.
그건 기쁨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린, 안으로 듭시다. 곤 대주, 같이 드시지요.”
마현은 설린을 토닥여 주며 곤오에게도 별채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했다.
“아버지께서 정말 살아 계신가요? 한한파파는요? 냉 부궁주님과 냉 사제는요?”
곤오와 함께 별채로 다시 들어온 설린은 마현이 숨도 채 고르기 전에 질문을 쏟아냈다.
“린. 나도 숨 좀 쉬고 싶소.”
“아! 죄, 죄송해요.”
그제야 설린은 마현이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설린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미안한 것은 나요.”
“……?”
“미안하지만 그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구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분명 마현이 북해빙궁주를 비롯해 수뇌들이 살아 있다고 했다. 헌데 대답을 해줄 수 없다고 한다.
“설관악 궁주님과 북해빙궁의 주요 수뇌들이 살아계신 것은 사실이오. 또 암암리 북해빙궁을 재건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도 사실이오.”
마현의 말이 계속될수록 설린은 더더욱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곤오도 마찬가지였다.
마현은 그런 둘을 위해 차근차근히 설명해 나갔다. 모든 말이 끝나자 설린과 곤오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번졌다. 하지만 설관악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둘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마현의 제안대로 출병은 잠시 늦춰졌다.
곤오가 홀가분한 얼굴로 설영대원들에게 좀 더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방을 나가고 설린과 마현, 둘만 남았다.
“내 뜻대로 해줘서 고맙소, 린.”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실을 모르고 움직였다가…….”
말을 하던 설린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마현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귀에 들어온 것이다. 마현은 소궁주라는 호칭 대신에 친근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 지금 제, 제게 뭐라고 하, 하셨나요?”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설린은 그녀답지 않게 말을 무척이나 더듬으며 물었다.
“린. 린이라고 불렀소.”
설린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낯 뜨거운 마현의 호칭에 설린의 얼굴은 홍시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설린의 손을 마현이 덥석 잡았다.
“미안하오. 그리고 고맙소.”
설린은 손을 빼기 위해 힘을 썼지만 마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는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오. 이제는…….”
“마, 마 소협.”
“그러니 린도 내 손을 놓지 마시오.”
마현은 설린을 빤히 쳐다보았고, 설린은 발그레한 뺨을 한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 * *
과거 옛 도읍으로 찬란했던 낙양.
지금의 낙양은 그때와는 또 다른 번영을 뽐내고 있었다.
일명 상권의 도읍이라 일컬어지며 또 한 번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만큼 낙양에는 수많은 상단이 있었고,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상단이라면 반드시 낙양에 총단을 두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된 연유는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다.
낙양은 중원 땅의 중앙에 자리한다. 거기에 황하라는 최고의 교통수단도 가지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중원 전체로 상단이 영향력을 키우려면 필연적으로 낙양에 본거지를 둘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낙양으로 진출하지 못한 상단들의 일차적 목표가 낙양에 총단을 두는 것이었고, 이미 총단이 들어선 곳은 그 자체가 성공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게 중원에서 날고 기는 상단들의 총단이 낙양에 집결해 있으니 북경의 번화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거리는 휘황찬란했다.
그렇다 보니 낙양의 번화가(繁華街)는 불야성(不夜城)으로도 유명하다.
말 그대로 밤이 사라진 곳.
하늘은 새까만데 거리는 대낮보다 더 밝다.
거기에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교태 섞인 기녀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 그리고 나풀거리는 기녀들의 속치마와 그 사이에 드러나는 뽀얀 살결.
그리고 거리마다 스며든 달콤한 주향.
무릉도원이 따로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곳이기도 하다.
낙양을 가로지르는 대로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 대로가 사람을 가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돈을 가린다.
이 대로가 또 하나의 귀물이었다.
사람의 고하는 따지지 않으면서 돈의 고하는 따지는 것이 이 대로다.
이 대로를 사이에 두고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단순히 크기만 따지자면 북촌이 남촌에 비하면 십 분지 일 정도나 될까 싶지만 사람들은 누구라도 남촌이 아닌 북촌을 가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주루와 기녀의 질적 차이.
하지만 어지간한 갑부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낙양이 또 하나의 도읍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가히 틀리지만은 않군.”
화려한 검은 비단 옷을 입은 마현이 그 대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시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섭선을 살랑거리며 걷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였다.
“대주.”
“예, 주군.”
마현 뒤로 서른 명의 흑풍대가 깨끗한 흑색 무복으로 일통한 채 따르고 있었다. 거기에 반해 그들의 내뿜는 기운은 마치 낭인들처럼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의도된 것이다.
그렇게 마현과 흑풍대를 꾸며놓으니 누가 봐도 부잣집, 아니 졸부의 도련님이 돈으로 무사들을 사서 거들먹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일까?
북촌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을 본 사람들은 간혹 얼굴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마다 몇몇 흑풍대원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영락없는 낭인의 모습이었다.
연기라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들. 과거 마교 최하층 마인들이었으니 낭인들과 별반 다름없는 생활을 했었다. 그렇기에 조금의 어색함도 이들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현과 흑풍대가 향한 곳은 구조루(九朝樓)였다.
아홉 왕조의 도읍이라 일컬어지는 구조고읍(九朝古邑)에서 본떠 이름을 지은 주루였다. 그런 이름에 걸맞게 9층 전각으로 우뚝 세워진 주루였다.
그런 어마어마한 높이로도 유명하지만 정작 구조루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돈이었다. 비싸기로 정평이 나있는 낙양 번화가 북촌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곳 중 하나였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공자님.”
구조루 앞에 도착한 왕귀진은 마현에게 ‘공자’라는 호칭을 썼다.
“그럴까?”
마현은 살랑살랑 섭선을 부치며 당당한 걸음으로 구조루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구조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얇은 궁장을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속이 내비칠 정도는 아니지만 여인의 풍만한 몸매가 한껏 드러나는 매혹적인 옷차림이 아닐 수 없었다.
활짝 웃는 입과는 달리 여인의 눈은 재빠르게 마현의 위아래를 훑었다. 또한 그 뒤로 우르르 들어오는 흑풍대 역시 재빠르게 살폈다.
그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봉이다!’
“소녀가 처음 뵙는 분 같네요.”
“구조루가 낙양에서 명물이라고 해서 본 공자가 한 번 들려봤네.”
“호호호, 그러세요? 그렇다면 아주 잘 찾아오셨습니다.”
여인은 살짝 몸을 숙이며 마현과 일행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몇 층으로 모실까요?”
여인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왕 내친김에 9층은 가봐야 하지 않겠나.”
마현의 말에 여인은 잠시 깜짝 놀랐다가 살짝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9층이라고 하셨나요?”
“그렇네만……, 뭐가 잘못되었나?”
“호호호, 그건 아니지만……. 9층에 오르시려면 기본상만 족히 황금 백 냥입니다. 그러지 말고 4, 5층에서 노시는 건 어떠신지요?”
구조루는 각 층마다 기본상 가격이 틀리다. 물론 그런 만큼 시중을 드는 기녀들의 자태 또한 다르다. 여인은 중간층만으로도 족히 마현의 돈주머니를 모두 털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왜 본 공자가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마현은 품에서 금자 천 냥짜리 전표를 꺼내 여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전표를 본 여인의 눈은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 여인의 목이 출렁거렸다.
“호호호, 그럴 리가 있나요? 소녀는 단지 공자님이 너무 무리하실까 걱정돼서 그런 것이랍니다.”
여인은 마현의 품에 살짝 기대며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여인의 눈은 전표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수하분들은 어디로…….”
여인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지 말을 좀처럼 잇지 못했다.
“거 눈치 한번 없군.”
마현은 여인의 허리를 살짝 감싸며 능글맞게 말했다.
“너희들도 가자.”
“9층으로…… 말씀입니까?”
여인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당연하지 않느냐. 본 공자는 그렇게 쩨쩨한 성격이 아니다.”
마현은 가슴을 죽 내밀며 호탕하게 주먹으로 툭툭 쳤다.
그런데 정작 여인의 얼굴은 살짝 찡그러졌다.
9층에 오르는 손님은 일 년을 통틀어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비싼 터라 9층으로 오르는 손님들의 수는 많아 봐야 네 명 안팎이었다. 그렇다 보니 항상 9층에 준비되어 있는 음식과 술은 한정돼 있었고 그 외 모든 시설들이 소수에 맞춰 꾸며져 있었다.
“왜 문제가 있나?”
“그게 아니오라…… 9층에 다 오르셔도 그에 맞는 대접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혹여나 마현이 마음이 상해 다른 곳으로 갈까 조마조마하며 여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