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21화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곧장 몸을 빼낼 수 있었던 것은 현재 황군의 목적이 그들을 사로잡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지원군이 올 때까지 그들을 잡아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설관악을 중심으로 빠르게 모여드는 것에 맞춰 황군은 그들을 겹겹이 에워싸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렇게 북해빙궁의 궁인들이 완벽히 모여들자 마현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같이 안 가시나요?”
허공에 뜬 마현을 향해 설린이 물었다.
“아직 나는 풀어야 할 일이 많소. 빨리 가시오. 한시라도 빨리 가야 파파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꼭 다시 봬요. 가(歌)…….”
“어서!”
설린는 말끝을 흐렸고, 그런 그녀를 보며 마현은 재촉했다.
부욱!
설린은 마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순간이동 마법이 담겨 있는 스크롤을 찢었다.
상당한 양의 마나의 파장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다시 백여 명의 북해빙궁 궁인들을 휘감은 직후 엄청난 검은 빛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아무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이가 없었다.
다만 북해빙궁 무인들이 모여서 만든 무수한 발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 어떻게 된 것이냐?”
당황한 천호장이 입을 쩍 벌렸다.
백여 명이다.
자그마치 백여 명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천호장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정신없이 조금 전까지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서 있던 장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체통도 잊은 채 주위를 살피다가 급기야 맨손으로 땅까지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되자 허망한 표정을 지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마현은 그런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산자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황군과 남해태양궁의 모습이 보였다.
마현은 바람에 펄럭이는 남해태양궁의 깃발을 보자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애써 그런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 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바로 설린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현의 모습도 빛과 함께 사라졌다.
약 한식경 후.
둥 둥 둥 둥!
뿌우우웅!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북소리와 고동 소리가 천의봉 중턱에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북해의 잔당들을 몰아내자!”
그 소리에 고무된 병사들은 저마다 함성을 지르며 천의봉 중턱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황군들과 그들을 반기는 설풍뿐이었다.
* * *
중경 중심에 위치한 천무왕부.
언제나 굳게 닫힌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앞으로 펼쳐진 넓은 공터에 근 만 명에 가까운 대군이 오와 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만 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하나의 무리로 대오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군은 총 13개의 깃발 아래 각기 집결해 있었고, 무리와 무리 사이에는 일 장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13개의 깃발 중 12개는 무림맹의 주요 축이라고 할 수 있는 5파 1방과 6대세가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그렇기에 그 깃발 아래에는 자파의 통일된 복장으로 각 문파의 제자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 있는 깃발은 무림맹 산하 중소문파들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마교 정벌을 위함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서 있는 천무왕부 정문 앞 광장에는 전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북소리와 함께 정문에서 기존에 서 있는 13개의 깃발보다 배나 더 큰 깃발이 솟아올랐다.
무림맹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그 깃발 아래로 백여 명의 무리가 두 패로 나뉘어져 중앙에 제법 큰 공간을 사이에 두고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해 있었다.
오른쪽 흰 무복을 입은 이들은 검림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천룡군이었고, 왼쪽은 5파 1방과 6대세가, 그리고 중소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모아 만든 청천대였다.
그들이 등장하자 은은하던 전장의 기운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했다. 천룡군과 청천대, 그리고 무림맹의 깃발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곧 무림맹주 진필성이 임시 석단 위에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후 마교 정벌을 위한 출전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황군까지 참여한 마교 정벌.
이건 끝을 보지 않아도 무조건 필승이었다.
그런 전쟁에서 얻어지는 건 단 하나.
무명(武名)이었다.
무명은 단순히 두 글자,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
돈이 필요한 자에게는 돈을 주고, 힘이 필요한 자에게는 힘을, 신분이 낮은 자에게는 더 높은 신분을 준다.
결국은 욕심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있는 무명에, 다들 기운을 갈무리한다고 했지만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투기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박 자박 자박!
그리고 그들이 예상한 것처럼 청천대와 천룡군 사이로 진필성과 제갈묘, 그리고 불취개, 마지막으로 천무방위군의 천호장이 걸어 나왔다.
진필성은 임시로 만들어진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광장을 가득 메운 무림맹 소속 무림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각 소속 문파 깃발 아래 도열해 있는 무림인들의 모습은 과히 장관이었다. 더욱이 그들이 내뿜는 투기로 인해 장엄하게 보일 정도였다.
진필성은 그들을 쭉 훑은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진필성은 목소리에 내력을 담아 광장 구석구석으로 흘러 보냈다. 의도적으로 말을 잠시 끊은 진필성은 주먹을 말아 쥐며 번쩍 들어올렸다.
“이 땅에서 마교를 지운다!”
간단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족했다.
이미 데워질 대로 데워진 분위기다.
“와아아아!”
“무림맹 만세!”
광장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진필성의 얼굴에는 그 함성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며칠 전, 상인(上人)에게서 확답을 받았다. 마교가 무너지고 무림이 일통되면 무림은 자신의 것이라고. 그리고 제후인 왕으로서 죽게 될 것이라고.
결국 황제가 부럽지 않은 또 하나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무림에 정점에 선다. 영원히!’
진필성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재빨리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몇 차례 시선을 옮기며 주변을 살핀 진필성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뜨거운 용광로 안에 얼음덩이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흥분된 얼굴로 함성을 지르는 무인들 속에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무리가 있었다.
무당파, 개방, 황보세가…… 그리고 사천당문.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진필성은 고개를 돌려 불취개를 쳐다보았다.
“맹주, 미안하오. 개방은 이 전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소이다.”
불취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 옆에 서 있는 제갈묘가 당황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갑자기 내지른 호통이 쩌렁쩌렁 울리자 광장을 뜨겁게 달구던 함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당파도 이 전쟁에서 빠지겠소이다, 무량수불!”
조용해진 광장에 무당파 장문인 청하진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단숨에 광장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 황보세가도 빠질 것이외다.”
“사천당문도 동참을 거부하오.”
이어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건허와 사천당문의 가주 당자성도 나섰다.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청천대주 학방을 비롯해 학성, 황보저양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의 문파로 돌아갔다.
그들마저 움직이자 중소문파 연합의 깃발 아래 모여 있던 무림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 우리도 빠지겠소.”
중소문파 연합 중 네 문파의 영향력 안에 있던 문파들이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하자 거기에 맞춰 청천대 소속 중소문파의 소가주나 대제자들도 이탈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길 셈인가? 정녕 역모로 몰리고 싶은 건가?”
이탈하는 이들을 향해 진필성이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정녕 역모로 몰려 참형을 당하길 원하는 것이오?”
제갈묘 역시 진필성의 분노를 거들었다.
“황제 폐하의 명? 상인의 명이 아니고?”
진필성을 향해 불취개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어, 어떻게 상인의 존재를……?’
진필성의 얼굴은 굳어졌고, 제갈묘는 그런 진필성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사, 상인? 상인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제갈묘는 불취개를 쳐다보다가 진필성에게 따지듯 물었다.
불취개는 진필성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에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광장의 모든 이가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림이 마교 장악 실패, 천무왕의 이름으로 마교를 멸문시켜라. 명분은 북해의 일을 거론하면 되고, 황실에서도 힘을 실어줄 것이다. 아울러 필요한 물자는 상림에서 지원할 것이다. 상인 언(言).”
불취개의 말에 진필성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 전서의 내용이 불취개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니 그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진필성은 완강히 부인했다.
“끝까지 모른 척 빼는 것이오?”
불취개는 품에서 한 장의 전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전서를 펼친 후 그 안에 쓰여 있는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상인 전, 부디 그 약조를 지킬 거라 믿습니다. 진필성 서.”
불취개는 진필성 앞으로 전서구를 내밀었다.
비록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진필성의 안력이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거리였다.
‘어, 어떻게 저 전서구가 저자의 손에?’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진필성 자신이 상인에게 보낸 전서였다. 진필성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모함이오.”
진필성은 안면을 싹 바꾸며 냉랭하게 외쳤다. 그리고는 제갈묘를 슬쩍 쳐다보았다. 제갈묘는 배신감에 얼굴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이 난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갈묘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진필성은 제갈묘를 움직일 묘수도 알고 있었다.
『총사, 무림에서 군림하고 싶으면 방도를 찾아보시오!』
『맹주의 무엇을 믿고 따르란 말이오?』
『본 맹주는 못 믿어도 천하 군림은 믿을 것이 아니오.』
진필성의 전음에 제갈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갈등하는 제갈묘의 표정을 확인하자 진필성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불취개를 쳐다보았다.
“그 서신은…… 황제 폐하의 밀서이외다.”
진필성은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제갈묘를 보란 듯이 쳐다보았다.
“총사께서도 뭐라고 말 좀 해주시오. 이러다가 간악한 마교 무리들을 이 땅에서 지우기도 전에 맹 자체가 분열이 되지 않겠소?”
제갈묘는 진필성을 올려다보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갈묘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제갈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그로서는 도저히 욕심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지금 반기를 든 네 문파를 쳐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 된다면 제갈세가가 천하제일문파로 우뚝 서는데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진필성을 전처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약조를 문서로 남겨주시오, 맹주.』
제갈묘의 전음에 진필성의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해주지. 그 대신 그 대가로 제갈세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지워지겠지만.’
『못해줄 것도 없소.』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해 모두 설명해 줘야 할 것이오.』
『그것도 못해 줄 것도 없소.』
진필성은 눈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 순간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는 살심이 어른거렸다.
‘네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이 일이 끝난 후 제갈세가부터 이 땅에서 지워버리겠다.’
“그것은 황제 폐하의 밀서가 맞소이다. 맹주님은 이 나라의 제후이시오. 그런 분에게 상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되겠소?”
제갈묘가 나서자 확실히 흉흉했던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크크크.’
진필성은 속으로 웃었다.
지나친 욕심은 총기를 가리는 법이었다.
그런 진필성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묘는 말을 이어갔다.
“비록 출전식 날 이런 일이 발생해 유감이오만 차라리 잘 되었소. 옛말에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하지들 않소이까? 차라리 이것을 계기로 그간 각 문파 간 쌓여온 모든 불신을 털어내는 것이 어떻소? 물론 맹주와 나 역시 이 일로 하여 만들어진 불신을 모두 종식시켜 드리겠소이다.”
제갈묘는 일단 진필성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은 다들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 정오를 기해 회합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모습에 불취개는 발끈했지만 그냥 속으로 삭혔다. 이미 원하는 대로 무림맹을 흔든 것으로 족했다.
제갈묘는 몸을 돌려 제갈영영과 제갈문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