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4화
해가 막 하늘 꼭대기에 올라섰을 정오 무렵이었다.
대림학당이 보이는 길목에 마현과 걸왕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떻게 들어가려고 그러냐?”
걸왕이 대림학당 곳곳에 서 있는 금의군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마현의 목소리에 걸왕의 눈에 못마땅함이 묻어나왔다.
“혼자 들어가려고?”
“예.”
“네 눈에는 내가 어디 숫제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보이느냐?”
걸왕이 따지듯이 물었지만 마현은 그저 담담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금세 다녀오겠습니다.”
“내 말이 어디 귓구…….”
걸왕은 끝까지 자신의 말을 잇지 못했다.
마현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 허공에 대고 말을 외쳐봤자 미친놈밖에 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끄응!”
‘괴물 같은 놈.’
걸왕의 머릿속에는 순간 허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현 같은 제자를 키워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부러움이 생겼다. 그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걸왕은 고개를 마구 좌우로 저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암!’
그렇게 다짐했지만 걸왕은 입 안에서 느껴지는 껄끄러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 연신 입맛을 다셨다.
* * *
송겸은, 송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유는 정말로 잠을 자고 있었다. 고단함 때문에 잠이 든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 마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현은 송겸을 내려다보며 그의 방에 음파차단 마법을 펼쳤다. 이곳의 목소리가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한 것이다.
마현은 웨이크업 마법으로 송겸의 잠을 강제로 깨웠다.
그 부작용으로 지독한 두통을 느끼며 고유가 눈을 떴다.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흔들던 고유는 자신 앞에 서 있는 마현을 보자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 누구냐!”
고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밖에 경비를 서고 있는 금의군을 불러들이려고 하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창문에 비치는 금의군의 그림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고유는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 당신은 누구요?”
마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고유는 뒤로 몸을 슬쩍 내빼며 물었다. 최대한 침착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현의 눈썹이 가늘게 치켜 올라갔다.
“네놈은 누구냐?”
송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유가 진짜 송겸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송겸이라면 반드시 단번에 자신을 알아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순간 고유는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마현은 미간을 좁히며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다. 자신도 빨랐지만 송겸은 더 빨랐다.
누가 봐도 송겸이라 믿을 만큼 똑같은 이를 자신의 자리에 놔두고 사라진 것이다.
“컥!”
마현은 허공섭물의 수로 고유의 목줄을 쥐어틀며 그를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코앞으로 잡아당겼다. 마현은 숨이 막힌 채 허공에서 발버둥을 치는 고유를 잠시 노려보다가 그의 몸을 풀어주었다.
콰당!
고유는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크헉! 켁켁켁!”
자신의 발치에서 숨을 헐떡이는 고유를 노려보던 마현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가 굳이 꼭두각시까지 마련해놓고 몸을 피했다면 분명 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는 뜻.
‘그렇다면 죽일 수 있겠군.’
마현의 미소에 죽음의 그림자가 투영되었다.
만약 그가 황명에 의해 대림학당에 연금되어 있다면 이번 일의 원흉을 눈앞에 두고도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스스로 전장에 끼어든 것이다.
“후후.”
살기가 담긴 마현의 나직한 웃음소리에 고유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고유의 눈앞에서 마현이 사라졌다.
“게 누구 없느냐!”
마현이 사라지자 고유는 밖을 향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금의군 병사 두 명과 총관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인?”
“조금 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인가?”
고유는 노기가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지만 금의군 병사와 총관은 그저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무슨 소리이온지…….”
고유의 얼굴이 구겨졌다.
금의군 병사들이나 총관의 표정을 보건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 안에서 그 난리가 일어났는데도, 그 큰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말이다.
결국 여기서 더 난리를 쳐봤자 자신만 미친놈이 될 판이었다.
“……아닐세. 내가 악몽을 꾼 모양이군. 다들 나가거라.”
고유는 손을 휘휘 저어 축객령을 내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니 땀으로 축축해진 등짝이 느껴졌다.
“하아.”
참으로 귀신같은 자였다.
특히나 그의 눈빛은 꼭 저승사자의 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겨지던 살기. 그 눈빛을 떠올리자 고유의 몸은 오한이 들며 부르르 떨렸다. 어느새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구구구구구!
땅바닥이 몹시 흔들렸다.
그로 인해 대림학당 건물들이 몸서리를 치며 먼지들을 토해냈다.
‘서, 성공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유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이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고유의 눈은 웃고 있었다. 이 진동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황사라면…….’
주먹을 쥔 고유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 * *
걸왕은 다시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현을 보며 노골적으로 인상을 확 찌푸렸다.
“노기가 나신 겁니까?”
“노기? 이 일이 마무리되고 너와 다시 상종하면 내가 네놈 아들이다!”
걸왕의 말에 마현이 고소를 머금자, 그 웃음에 걸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날 입으로만 선배님, 선배님 그러면서 어디 선배 대접을 제대로 하기나 하냐? 그나저나 왜 이렇게 빨리 나온 것이냐?”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황사가 자리에 있지만, 자리에 없더군요.”
“이잉? 좀 알아듣게 말해라.”
마현은 조금 전 일을 세세히 풀어서 이야기해 주었다.
“흐음!”
언제 흥분했냐는 듯 걸왕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총타로 가면 좋겠지만 일단 이곳 분타로 가자구나. 그가 사라졌다고 하니 뭔가 일이 터질 게야.”
“그렇다면 총타로 가시죠.”
“초, 총타? 한시가 급하…….”
마현은 다시 짜증을 내려는 걸왕의 손을 잡으며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어두운 빛과 함께 사라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구구구구구!
미약한 지진이 대림학당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 * *
“크하하하하!”
어마어마한 내력이 담긴 웃음소리가 석실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무섭게 뒤흔들었다. 바로 석탁 위에서 눈을 뜬 송겸이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몸 안에서 날뛰는 내력으로 인해 그는 내부가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고통 뒤에는 짜릿한 쾌감도 느껴졌다.
마치 억센 힘으로 안마를 받았을 때 참기 힘든 고통이 먼저 온 후 느껴지는 시원함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문제는 그 고통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크고, 시원함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짜릿하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송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음?’
송겸은 자신이 누워 있던 석단 위에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 놓은 듯한 반투명한 껍질들이 어지럽게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송겸은 곧 그 껍질들이 자신의 몸에서 벗겨진 것임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매끈하게 바뀐 몸에 껍질들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 약간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겸은 신기한 듯 몸에 붙은 껍질을 손으로 떼어내며 매끈하게 바뀐 몸을 어루만졌다. 몸이 노쇠해지며 곳곳에 번졌던 검버섯도 보이지 않았다. 주글주글했던 피부는 이십 대처럼 매끈해져 있었다.
송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역시나 얼굴도 매끈했다.
‘이게 반로환동이라는 것인가?’
신기했다. 비록 면경이 없어 자신의 모습을 세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송겸은 흡족한 눈빛으로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원함 후에 또다시 찾아든 지독한 고통 때문이었다.
그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에는 고유의 금침 시술에 의해 어마어마한 양의 내력들이 움직였지만 송겸이 정신을 차리자 내력들은 서서히 갈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을 차린 송겸은 재빨리 가부좌를 틀었다.
이미 자신의 것이 된 내력들이다.
이제 그 내력들을 온전히 자신의 지배 아래 거두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송겸은 이제껏 머리로만 외우고 있던 대천황존신공(大天皇尊神功)의 구결을 떠올렸다.
원래 대천황존신공은 황실서고에서 절대로 유출이 불가능한 무공서일 뿐더러 황족이 아니면 절대로 보지도, 익히지도 못하는 금서 중 금서였다.
오로지 황족을 위한 무공서였다.
송겸은 그 무공서를 황제의 지극한 총애를 이용해 빼돌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내력을 만든 온갖 영약들도 양호를 시작으로 사환과 송겸에 이르기까지, 삼대에 걸쳐 황실보고에서 꾸준히 몰래 빼돌려왔다.
그 영약들을 송겸은 매일매일 꾸준히 섭취한 것이다.
하지만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제아무리 영약이라도 매일매일 섭취하는 것은 지독히도 위험한 일.
그런 영약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또한 안전하게 몸에 쌓이도록 고유가 직접 매년에 걸쳐 금침을 이용해 시술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유가 그 시술을 거두자 몸에서 잠들어 있던 영약들의 힘이 일시에 일어난 것이었다.
송겸은 이날을 위해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대천황존심법의 구결을 이용해 그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미 고유가 금침대법을 시행하면서 강제적으로 길을 닦아놓은 터라 영약들의 기운은 굳이 송겸이 의도하지 않아도 대천황존심법의 구결대로 움직였다.
또한 금침대법을 이용해 기경팔맥의 주요 혈도뿐만 아니라 세맥까지 영약들의 힘을 이용해 조금씩 뚫어놓고 더 나아가 더욱 튼튼히 길을 터놓았기에 송겸은 손쉽게 내력을 단전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삼대에 걸친 집념과 무수한 영약, 그리고 천하의 그 어떤 무공에도 뒤지지 않는 상승심법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거침없이 단전으로 모이고 기결팔맥으로 뻗어나가던 내력이 하나의 벽에 가로막혀 강제적으로 멈춰야 했다.
“크으으!”
그 고통으로 인해 미약한 신음이 송겸의 꽉 다문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고통을 안겨준 벽은 바로 백회혈(百匯穴)이었다.
고유가 유일하게 뚫어놓지 않은 곳이었다.
뚫고자 한다면 못 뚫을 리 없었지만 위험하고 부작용이 크기에 고유는 감히 뚫지 않고 놓아둔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송겸이 수십 년간 몸에 차곡차곡 쌓인 영약들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고 제 것으로 만들려면 반드시 백회혈만은 그 스스로 뚫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회혈은 태어나면서 벌모세수를 받지 않은 이상 그 누구도 쉽게 뚫지 못한다. 태반이 목숨을 걸고 뚫는 혈이 바로 백회혈이었다.
쾅!
그런 백회혈이 몇 번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허망할 정도로 쉽게 뚫려 버렸다.
거센 파도를 한 손으로 다 막지 못하는 이치와 같았다.
그 거센 파도는 영약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내력이었고, 한 손은 바로 백회혈이었다.
백회혈이 뚫리는 충격에 송겸의 몸이 휘청거렸고, 그의 코와 입, 그리고 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순리에 따라 백회혈을 뚫은 것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내력으로 강제로 뚫은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