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5화
대략적인 큰 틀이 세워지자 마현은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왔다.
바로 조금 전 두 후작의 제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현은 그 제안에 대해서는 큰 틀 안에서 결론을 내리고자 했다. 그러려면 그 발판이 될 수 있는 케이슨 용병대와 함께해야 한다. 마현이 그들을 자신의 계획에서 배제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동료를 위해 생명마저 던졌던 바로 그 헌신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후에 서로의 신념이 달라 헤어질 수는 있어도 서로의 등에 칼을 꽂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과 함께라…….’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자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두 후작이 원하는 건 자신의 무력이 뒷받침된 기사단이다.
하지만 현재 마현이 원하는 건 케이슨 용병대와 함께하는 것이다.
‘잠깐!’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마현의 머리를 스쳤다.
‘용병대라고 기사단을 꾸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무림이라는 세상을 거치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진 까닭이었을까. 전이었다면 아예 떠올리지 못할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이었다.
‘용병기사단이라…….’
그 때부터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도 착착 정리가 되어갔다.
더욱이 포크너 후작에게는 지원까지 약속 받았다.
그를 통해 기사단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용병들이 중갑옷과 기마에 익숙해지는 시간이다.
‘나머지는 케이슨과 상의를 해봐야겠군.’
생각을 마친 마현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려와 케이슨 용병대의 군막으로 향했다.
* * *
“흠…….”
마현에 대한 이야기를 밀러를 통해 들은 케이슨은 팔짱을 끼며 깊게 침음했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마음고생을 하느라 밀러 님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케이슨이 밀러를 위로했다.
어찌 보면 케이슨은 용병으로는 참 안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밀러가 세상을 등지지 않고 케이슨 용병대에 몸을 담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따뜻함.
그 따뜻함이 오늘 절실히 느껴지자 밀러는 더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차피 그를 받아들인 건 저였습니다.”
케이슨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여기에 계셨습니까?”
그때 마현이 군막 옆 그들이 둘러앉아 있는 모닥불로 다가왔다.
“저녁은 먹었는가?”
마현은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케이슨과 밀러의 무거운 분위기로 보아 분명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케이슨은 저녁을 먹었는지부터 먼저 물었다.
“아직 못 먹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못 얻어먹고 나온 것이다.
“시장하겠군. 야솝?”
케이슨은 군막을 잡고 흔들었다.
“예, 대장.”
야솝이 그 소리에 군막에서 나왔다.
“저녁거리 남은 거 준비 좀 해줘.”
케이슨의 말에 야솝은 딱딱한 빵을 마현에게 넘긴 후 식은 스프가 담긴 철제 냄비를 모닥불 위에 얹었다.
“고맙다. 나머지는 내가 하지.”
“그래, 들어가서 쉬어.”
야솝이 들어가고 잠시 후 마현은 따뜻해진 스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저녁을 때웠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케이슨이 입을 뗐다.
“밀러에게 자네에 대한 얘기를 대략 들었네.”
“그렇습니까?”
마현은 손에 묻은 빵가루를 탁탁 털며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소도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는 말도 들었겠군요.”
“들었네.”
“그렇다면 비빌 언덕이 되어주십시오.”
마현은 정중하게 케이슨에게 고개를 숙였다.
강한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몸을 숙이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특히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이런 사내를 대할 때는 더더욱…….
가장 좋은 건 천천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탈퇴가 불가능하니 자네가 그냥 비벼도 되지 않은가? 하긴 그 정도 능력이면 비빌 언덕조차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제게 있어 인생에 배신은 한 번이면 족합니다. 또다시 등에 단검이 꽂히기는 싫습니다.”
마현의 말에 케이슨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밀러의 눈도 살짝 커졌다.
“배신이라……, 후후.”
케이슨은 자조적인 웃음을 무겁게 흘렸다.
분명 케이슨도 자신처럼 평생 멍에로 남을 배신을 겪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마현은 내침 김에 그의 마음을 더 건드렸다.
“오늘 제가 본 케이슨 용병대는 최소한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등을 찌르지는 않을 거라 여겼습니다. 일단 살아야 하기에 케이슨 용병대에 들어왔지만, 오늘 전투를 치루는 것을 보고 참으로 잘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러 님.”
마현의 말을 한동안 곱씹던 케이슨이 밀러를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오늘 제게 했던 말은 그냥 잊어주십시오.”
케이슨의 말은 마현을 용병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케, 케이슨.”
“정이야 서로 부딪히다 보면 들겠지.”
밀러는 차마 겉으로도 한숨을 내쉬지 못했다.
케이슨의 아픈 과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케이슨은 아픈 배신의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사람을 이렇게 믿고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네. 자네가 비록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용병대에서의 대우가 달라지지는 않네. 이건 케이슨 용병대의 변하지 않는 철칙이야.”
“알겠습니다.”
케이슨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야야, 다들 나와!”
케이슨은 군막을 다시 흔들며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을 불렀다.
“대장, 그 전에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혹시 나와 단둘이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것인가?”
“예.”
“우리 용병대는 중요한 일은 나 혼자 결정하지 않아. 언제나 함께 결정하네.”
“그렇군요.”
그러는 사이 군막 안에서 케이슨 용병대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래봐야 여섯 명뿐이지만.
짝짝짝.
그렇게 모닥불에 모두 둘러앉자 케이슨이 박수를 쳤다.
“카칸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다들 그리 알아.”
“……예?”
그 결과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지, 모두 한목소리를 내며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케이슨, 혹시 카칸의 능력을 보고 그렇게 결정한 건 아니죠?”
자브라가 신기한 듯 마현과 케이슨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보여?”
“너무 뜻밖이니까 그렇죠.”
“하긴 그럴 만도 하겠군.”
그때 제이든이 신경질을 냈다.
“대장, 그래도 이러는 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으흐흐.”
산만한 덩치의 그레오가 장난기가 다분한 웃음을 내뱉으며 제이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잡아당겼다.
“하긴 네가 텃세를 꽤나 부렸지. 뭐 그러다 한 방 맞기는 했지만……. 이를 어쩌냐, 제이든?”
제이든은 신경질적으로 그레오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마현을 노려보며 구시렁거렸다.
“하하하하.”
“호호호!”
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밀러 님은 왜 아무 말이 없으세요?”
자브라가 웃지도 않은 채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밀러를 보며 물었다.
“아닐세.”
“또 마법 때문에 고민에 빠진 거예요?”
밀러는 그게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내세요.”
자브라의 눈웃음에 밀러도 억지로 표정을 풀며 어색한 웃음을 만들었다.
“이렇게 모이게 한 것은 그것을 알려주는 것 말고도 달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다. 카칸이 중앙사령부 부사령관을 만나고 온 것은 다들 알고 있지? 카칸이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케이슨은 대원들을 한 번씩 훑어본 후 마지막으로 마현을 쳐다보았다.
“뭐예요?”
대원들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야솝이 마현 곁으로 바싹 붙으며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거액의 포상금이라도 준데요?”
야솝은 자연스레 마현에게 말을 높였다.
쿵!
그 모습에 그레오가 큼지막한 주먹으로 야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얏! 형, 왜 때려? 아프잖아!”
그런 야솝을 보며 그레오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쳇!”
야솝은 투덜거리며 그레오의 눈을 피했다.
그들의 짓궂은 모습에 분위기가 한결 더 밝아졌다.
“중앙사령부 부사령관, 그러니까 하야스 후작께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다들 마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뭔가?”
“저보고 기사단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케이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마현이 곧 소속을 옮겨야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배신을 운운한 마현에게서 그 소리를 들으니 케이슨으로선 어이없기까지 했다.
“그래서?”
케이슨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일단 답은 내일 주기로 하고 왔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제이든이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래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마현은 케이슨의 눈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하야스 후작이나 제8전선 군단장인 포크너 후작이 바라는 건 제 힘입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뭔가?”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제 힘이 들어간, 브루넬로 왕국 기사단에 대항할 수 있는 기사단이지 않습니까?”
케이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유 답답해.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 주면 안 되겠소?”
그레오가 답답한 듯 가슴을 탕탕 치며 물었다.
“대장.”
마현은 케이슨을 직시하며 천천히 불렀다.
“용병대 중 최초로, 용병으로 구성된 기사단을 만들어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서서히 풀려가던 케이슨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자브라와 그레오, 그리고 제이든과 야솝은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또한 밀러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케이슨 역시 상당히 놀랐는지 대답이 늦었다.
“우리라고 못할 법도 없지요.”
마현은 의도적으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해 은연 중 자신과 케이슨 용병대가 하나임을 각인시켰다.
“불가능하네.”
“왜 해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군마며 중갑옷이며…….”
“그거야 몬테팔코 왕국에서 뜯어내면 됩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세. 그럼 그에 필요한 유지비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하나의 기사단이 되면 그에 따르는 수입이 생기는 법이지요.”
케이슨이 불가능한 이유를 댈 때마다 마현은 그에 대한 대답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착착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