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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60화 (260/351)

# 260

9화

“……그 정도였던 겐가?”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서 작성하기 전에 대련을 한 판 해볼걸 그랬어. 그래서 말인데……, 치졸한 방법이지만 자네가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게.”

“……?”

“계약 불이행을 들어 그를 몬테팔코 귀족으로 기필코 만들어야겠어.”

“나보고 악역이 되라 이거군.”

포크너 후작은 잠시 고심에 빠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해야지.”

그때였다.

“아버지.”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청년 기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바로 하야스 후작의 차남인 아이작 하야스였다. 그는 하야스 후작이 이끄는 백마기사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공무 중에는 정식 호칭을 쓰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야스 후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나무랐다.

“사적인 일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그런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작은 넉살 좋게 웃음을 보였다.

“카칸 때문이냐?”

아이작의 능글맞은 눈웃음 속에 활활 타오르는 투기가 담겨 있었다.

“천상 아버지 아들인데 그 근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아이작.”

하야스 후작은 진중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허락하시는 겁니까?”

“케이슨 용병대로 가거라.”

“역시 아버지입니다.”

“가서 입단해.”

“예?”

아이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동시에 포크너 후작의 눈동자도 커졌다.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야스 후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로 인해 아이작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진심이시군요.”

“그렇다.”

“제가 너무 손해가 아닌가요?”

“항상 페트릭보다 이 아비를 잘 안다고 큰소리를 치던 놈이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하야스 후작은 장남이자 왕실근위기사단에 있는 페트릭 하야스의 이름을 거론했다.

“카칸이라는 자, 띄워준 것이 아니군요.”

“너와 비슷한 나이에 이 아비와 똑같은 성취를 이룬 자다. 그 녀석에게서 무엇을 배우든, 아니면 끈이라도 만들어 놓든, 무엇이든지 해라.”

“하아, 귀족을 버리고 용병이라……. 아버지도 너무하십니다.”

“그러냐?”

“예.”

말과 행동이 상당히 가벼워 보였지만 아이작의 눈동자만큼은 진지했다.

“하야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몬테팔코 왕국의 검으로 살아온 가문이다. 비록 지금은 이 아비가 못나 그 자리를 브로드키 경에게 빼앗겼지만, 앞으로도 몬테팔코 왕국의 검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아, 이것 참. 곤란하군요.”

푸념 어린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작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언제까지입니까?”

“이 아비도 나름 움직이겠지만……, 아무래도 네가 결과를 만들 때까지일 거다.”

“기약도 없는 고생길이라……. 에효. 수많은 레이디들의 웃음을 볼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프군요.”

그 와중에도 아이작은 넉살 좋게 농담을 곁들였다.

그러던 아이작이 진중한 얼굴로 절도 있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백마기사단 단원 아이작 하야스. 이 시간 이후로 백마기사단을 탈퇴하려 합니다.”

“허락한다.”

하야스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작은 허리에 찬 카이샨 메일을 벗어 그에게 넘겼다.

“충!”

그리고는 뒤로 다시 물러난 후 절도 있게 군례를 취하며 하야스 후작의 명을 받들었다.

“무엇보다 카이샨 메일이 아까운데요.”

언제 절도 있는 모습을 취했냐는 듯 아이작은 가벼운 어투를 내뱉으며 자신의 것이었던 카이샨 메일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진득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백마 심벌을 지우고 검은 바람이 다시 새겨져 네게 지급될 거다.”

* * *

8군단과 용병연대 구역이 만나는 지점에 용병연대장의 군막이 있었고 그 옆으로 그의 개인 기사단이 머무는 군막과 임시 마구간이 들어서 있었다.

케이슨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기사단은 모두 징집된 후 새로이 편제되어 전쟁에 참전하지만 예외가 있다고 했다. 그건 지휘관의 경호를 위해 개별적으로 능력에 따라 적게는 다섯 명에서 많게는 열 명 내외로 호위기사단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용병연대장 호위기사단의 군막 옆으로 새로운 군막과 마구간이 농노병으로 이루어진 공병들의 손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군막과 임시 마구간이 무슨 공사냐 싶지만 어찌되었든 갑작스러운 공사에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기사 몇이 보였다.

아마 용병연대장 호위기사단의 기사들인 모양이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용병연대장의 군막이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찾아가 인사를 나누면 될 겁니다.”

고디머 자작이 직접 인사를 시켜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가능하면 서로 안 부딪……, 아닙니다.”

고디머 자작은 뭔가 말을 더 하려다가 그냥 입을 꾹 닫았다.

“……?”

그런 고디머 자작의 모습에 마현은 고개를 돌려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케이슨은 그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겠다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야기해줌세.”

그러는 사이 군막이 다 만들어졌다.

고디머 자작은 다 지어진 군막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한 뒤 다시 군단으로 돌아갔다.

“기사단이 좋긴 좋군요.”

새로 배급된 군막은 전에 사용하던 용병대 군막과는 확연히 달랐다.

큼지막한 군막은 호화롭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내부에 어지간한 편의시설들은 다 갖춰져 있었다.

마현은 군막 구석에 놓인 푹신한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런 마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이유는 바로 탁자 위에 포크너 후작의 군막에서 맛보았던 그 포도주가 한 병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포크너 후작이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뜻이리라.

케이슨도 군막 안을 둘러본 후 마현 앞에 앉았다.

“아직도 제가 불편하십니까?”

케이슨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색함이 담겨 있었다.

나름 편하게 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어색함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아직은 그러하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케이슨도 그 점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렇다 해도 자네가 내 가족임에는 틀림없네. 그리고 내가 없을 때 우리 단원들을 지켜줘야 하는 부대장임에도 틀림없고.”

“언제나 솔직하시군요.”

“그런가?”

케이슨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용병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성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케이슨 대장이 그래서 더 좋습니다. 아니 이제는 단장이라고 불러야겠군요.”

“그렇군, 대외적으로 이제 용병대가 아닌 용병기사단이 되었으니 호칭 등을 새롭게 바꿔야겠어.”

미처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적으로야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외부의 시선이 있기에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거야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대장이야 단장이 되시면 될 것이고…….”

“자네는 부단장이면 되고?”

케이슨이 농이 담긴 목소리로 눈웃음을 지었다.

“대원들, 아니 단원들이 오면 정식으로 케이슨 용병기사단임을 알려줘도 무방할 것입니다.”

마현도 케이슨의 웃음을 따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케이슨의 농담에 어색함이 사라졌을 때 군막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바로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단원들이 군막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우와아아아!”

가장 먼저 들어선 야솝이 군막 안을 보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한 마리 다람쥐처럼 군막 안을 뛰어다녔다.

“고마워요, 카칸.”

자브라는 여자라서 그런지 가장 먼저 야전침대로 가서 누운 후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전에 쓰던 딱딱한 침상이 아닌 푹신한 고급 야전침대의 느낌이 좋은지 자브라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 뒤로 그레오와 밀러, 제이든이 웬 꼬마 아이와 함께 군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내아이는 케이슨과 마현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허리를 넙죽 숙였다.

“한스라고 합니다.”

“한스? 아!”

사내아이의 이름을 반문하던 케이슨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크너 후작이 임시로 종자 한 명을 붙여준다고 했던 말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너로구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스는 케이슨의 말에 다시 한 번 더 넙죽 허리를 숙였다.

붙임성도 있어 보이고 눈동자도 반짝거리는 것이 또랑또랑해 보였다.

“우리가 얼마나 함께 지낼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잘 부탁하마.”

케이슨은 한스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단원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얼마 안 되는 짐을 풀었다.

그 시간, 느긋한 군막 안의 분위기와는 달리 밖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아마도 출전 준비 때문일 것이다. 그런 소란도 잠시, 곧 적막할 정도로 밖은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한스가 평소에 먹던 급조된 요리가 아닌 제법 고급스러운 식사를 가져왔다.

전쟁에 참가하기 전인 평화로운 시기에도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새하얀 빵, 신선한 고기와 야채가 수북한 스프며, 비록 양은 많지 않지만 향긋한 소스가 뿌려진 스테이크까지.

다들 그랬지만 특히 그레오가 입술이 찢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막 포크와 숟가락을 들 때였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한스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식탁에 다 차리고는 머리를 꾸벅 숙였다.

“같이 안 먹는 거냐?”

포크를 들던 케이슨이 밖으로 나가려는 한스를 불러 세웠다.

“네?”

“너는 식사를 어떻게 하고?”

“그게……, 저는 밖에서…….”

한스는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아마도 밖에서 전에 자신들이 먹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못한 음식으로 홀로 배를 채울 것이 분명했다.

“먹자! 먹자!”

눈치 없이 그레오가 큼지막한 스테이크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딱!

제이든이 그런 그레오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다.

“뭐, 뭐야?”

항상 온순한 모습을 보여 오던 그레오답지 않게 살기등등하게 눈을 부라리며 제이든을 노려보았다.

“쯧쯧.”

제이든은 그런 그레오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그는 엉덩이로 그레오를 밀치며 자리를 넓혔다.

“앉아라.”

제이든은 몹시 무뚝뚝한 말투로 손짓하며 자신이 넓힌 자리를 가리켰다.

“하, 하지만…….”

이런 일에는 자브라가 적격이었다.

자브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는 한스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며 제이든의 옆에 앉혔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식사하도록 해.”

“고, 고맙습니다.”

“먹자.”

절로 훈훈한 웃음이 묻어나오는 장면을 보며 마현도 포크를 들었다.

푸짐했던 음식이 말끔히 비워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들 불룩 튀어나온 배를 툭툭 두들기면서 오랜만의 여유와 함께 포만감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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