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16화
나집은 이유도 모른 채 아버지인 클로드 공작의 뜻에 따라 8군단 용병연대장을 맡은 것 때문에 가뜩이나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찰나에 적당한 스트레스 해소 거리를 찾은 것이다.
“정말 아이작 그놈이 백마기사단에서 탈퇴해 케이슨 용병기사단으로 갔는지부터 알아봐.”
“알겠습니다, 마이 로드.”
나집의 뜻에 따라 호위기사 한 명이 8군단 사령부로 향했다.
“만약 그렇다면……. 후후후, 예전에 내가 아님을 이번 기회에 각인시켜 주지. 더욱이 부단장이란 놈. 빠드득!”
나집의 눈에서는 시퍼런 살기가 맴돌았다.
* * *
“후우, 힘들군.”
하야스 후작은 땀에 전 모습으로 포크너 후작의 군막으로 들어오더니 그냥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로 인해 퀴퀴한 냄새가 한순간 주위로 퍼졌다.
그 냄새를 맡은 포크너 후작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건 당연지사.
“여기가 자네 군막도 아니고, 좀 씻고 오는 게 예의가 아닌가?”
포크너 후작은 코끝을 찡그리며 하야스 후작을 노려보았다.
“자네 군막이 내 군막이고, 내 군막이 자네 군막 아닌가? 억울하면 자네도 씻지 않고 내 군막에 들리게.”
하야스 후작의 얼굴은 참으로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와 같은 무례한 언행은 포크너 후작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거니와 입 아프게 말을 해봤자 하야스 후작은 한 귀로 듣고, 언제 들었냐는 듯 흘러버릴 것이 뻔했다.
“끄응.”
결국 포크너 후작이 앓는 소리로 그 이야기를 끝내야만 했다.
“그건 그렇고, 방금도 나집의 호위기사가 왔다갔네. 비록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비장의 한 수라고 해도 나집 녀석에게까지 숨길 이유가 있는가?”
“우리가 언제 숨겼나? 조금만 살피면 누군지 금방 알 텐데 말이야.”
포크너 후작은 나집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전장에서도 앞뒤 분간을 못하고 돌출행동을 곧잘 하는 것이 나집이었다.
그렇기에 나집도, 또 그가 데리고 있는 기사단도 마치 자신들이 후작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기에 항상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이나, 아니면 지금처럼 하야스 후작만 찾아와 항의하는 것이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하다못해 조금만 발품을 팔아가며 기사들에게 묻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건만, 아둔하기 그지없는 나집과 그의 호위기사들은 그 정도의 융통성도 없었다.
그러니 8군단 안에서 잠시 화제가 되었던 일을 그들만 모르는 비밀이 된 것이다.
“그리고 말이야, 전쟁 중에 새로운 소드 마스터의 출현은 원래부터 일급기밀로 취급되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특히 브루넬로 쪽 첩자가 곳곳에 있을 테니 더더욱 일급기밀로 취급해야 하지 않겠는가.”
포크너 후작의 말은 다소 억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하야스 후작은 나집이 포크너 후작의 눈 밖에 단단히 나 있음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지금처럼 전장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는 관계 때문에 나집을 어릴 적부터 줄곧 지켜본 하야스 후작이었다.
‘그 턱없는 특권의식과 오만함만 아니라면 장래가 촉망되는 녀석이기는 하지.’
나집은 어쨌거나 용맹하고 교활한 클로드 공작이라는 사자에게서 태어난 범상치 않은 사자새끼였다. 다만 아비의 장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성질이 지독하게 고약한 얼치기 사자로 커나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솔직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아비인 클로드 공작이 자식의 그런 아둔함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결혼 후 뒤늦게 얻은 독자이니 그럴 법도 했다.
하야스 후작은 그저 입맛만 쓰게 다실뿐이었다.
“그래도 보아하니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한 번쯤은 부딪힐 것 같으니 넌지시 기별이라도 넣어주는 게 어떻겠나?”
“왜, 자네 아들이 거기로 가 있어서 걱정되는가?”
포크너 후작이 입술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깨물며 물었다.
“내 아들? 뭐 그것만이라면 걱정 안 해. 왜냐하면 나집, 그 녀석 한 번도 내 아들을 이겨본 적이 없거든.”
하야스 후작은 가슴을 쭉 펴며 아들 자랑을 태연하게 했다. 아마도 아이작이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봤다면 눈을 휘둥그렇게 떴겠지만, 하야스 후작은 한 번도 아들에게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럼 아무 문제도 없지 않나?”
포크너 후작은 그제야 등을 의자등받이에 깊게 파묻었다.
“이 기회에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군.”
그답지 않게 짓궂은 표정이 얼굴에서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내일이면 총사령부로 복귀하겠군.”
“당분간 볼 일이 없어질 것 같으니 술 한 잔 하겠나?”
“그렇겠지만……, 아마도 다시 8전선이 불안해지면 사령관께서 보내지 않을까?”
하야스 후작과 포크너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모든 눈길이 자신에게 쏠린다. 그리고 알아서 피한다.
그들과 자신은 같은 기사다.
하지만 기사라고 다 같은 기사가 아니다.
마르틴은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런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마르틴의 얼굴에서 잠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역시 이 기분이다.’
마르틴은 의식적으로 턱을 살짝 더 치켜세웠다.
그는 원래 클로드 공작의 측근 기사였다. 그런 그가 자처해서 나집의 기사가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 때문이었다. 마르틴이 아들의 호위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클로드 공작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흡족한 얼굴로 허락해 주었다.
마르틴은 공작가 기사들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이였다. 그러니 클로드 공작 역시 마르틴 같은 뛰어난 기사가 아들 곁에 있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함을 느낀 것이다.
더욱이 그 스스로가 나서서 먼저 나집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뜻을 밝혔으니 훗날 아들의 충성스러운 가신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마르틴은 그 모든 것을 내다보고 먼저 움직였고, 결과는 언제나 그의 뜻대로 흘러갔다. 마르틴은 스스로가 결코 충성심이 강은 인물은 아니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아니 충성심은 있다. 다만 그 충성심을 바친 대상이 클로드 공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이 선택한 주군 나집도 아니었지만.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의 충성심이 향한 곳은 ‘그들’이었지만,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를 보좌하는 핵심 인물이 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그는 클로드 공작을 모시면서 누구보다도 약삭빠르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국왕 다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권력의 한계점까지 도달한 클로드 공작의 측근보다는 클로드 공작가의 다음 주인인 나집을 선택한 것이었다.
당장은 전에 비해 권력과 그에 따른 보상이 적어질 것이다. 하지만 훗날 나집이 클로드 공작의 모든 것을 이어받는 날이 온다면 자신은 지금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위치에서 권력의 단맛을 톡톡히 맛보게 되리라는 것을 마르틴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르틴은 그 혼자만 나집에게 간 것이 아니다. 이왕 움직일 거면 확실하게 나집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힘은 그리 크지 않지만, 나집이 원하는 가장 확실한 것을 줄 수는 있었다.
바로 나집만을 떠받드는 기사단.
그렇기에 마르틴은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을 설득해 나집에게 함께 간 것이다.
자신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비슷한 성정끼리 모이게 마련인지 마르틴을 따르는 기사들은 다들 적당히 권력 지향적이고 탐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틴은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동족들.
권력의 단맛과 재물에 탐욕을 부렸지만, 그들은 넘지 않아야 될 명확한 선을 아는 현명한 자들이었다.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도 큰 미덕이 아니겠는가?’
마르틴은 그렇게 자문하며 8군단 사령부에서 나와 용병연대에 들어섰다.
“단장님, 다녀오셨습니까?”
자신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헤세가 다가오며 친근하게 물었다.
“음, 그래.”
“대체 어떤 놈들이랍니까?”
그도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일급기밀이라고 하더군. 그래, 용병들 쪽에서 뭐 좀 알아본 것이 있나?”
마르틴은 8군단 사령부로 떠나며 헤세에게 시켰던 일을 물어보았다.
“용병 길드에서는 입을 닫고 있었고, 몇몇 용병대장을 통해 알아보니 명망은 있는데 솔직히 그렇고 그런 용병단이라는 것까지만 알아냈습니다.”
사실 헤세뿐만 아니라 마르틴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들의 주인이 비록 용병연대의 연대장임에도, 현재 용병들 중 그들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런 그들에게 어느 용병이 정확한 정보를 알려 주겠는가.
“특별한 건 없다는 뜻이군.”
마르틴은 고개를 돌려 임시 연무장 중앙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경계를 두고 모여 있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 비천한 용병 놈들은 아이작 경의 위세를 등에 업은 모양이군.”
마르틴은 얄팍한 입술을 들어올렸다.
“수고했다.”
마르틴은 헤세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나집의 군막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마이 로드.”
“뭔가 알아봤나?”
기분이 여전히 안 좋은 듯 냉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가 나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대해서 사령부 쪽에서는 일급기밀을 이유로 들어 어떤 정보도 알려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일급기밀이라고 해도 그렇지, 감히 나에게까지. 빠드득!”
“그래서 여러 방향으로 알아본 바…….”
마르틴의 입술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렸다.
“아이작 경을 제외하고는 별반 내세울 것이 없는 용병기사단이라고 합니다. 또한 하야스 후작에게서 아이작 경은 이미 가문을 떠났으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답도 얻어왔습니다.”
“그래?”
나집은 반색하며 물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용병단이라고 해도 일급기밀로 취급되는데다가 기사단입니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나집의 부관인 시몽 남작이 조심스레 자신의 뜻을 내비쳤다.
사실 그 부분이 찜찜하기는 했다.
그렇기에 나집도, 마르틴도 이제껏 망설였던 것이다. 하지만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카칸이라는 부단장이군. 그자에 대해선 상세하게 알아봤나?”
“얼마 전 일어난 원인 모를 폭발에서 간신히 살아난 용병이라고 합니다. 길드장을 약간 윽박질러서 알아보니 D급 용병패를 가진 자라고 합니다.”
마르틴의 보고에 나집은 입술 끝을 질끈 깨물며 냉혹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군단 사령부에서 용병기사단을 만든 이유는 단지 용병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겉만 화려하게 포장된 그런 전시용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런데 명색이 용병연대장인 나한테까지 사령부에서 그걸 일급기밀이라며 사전에 통보해 주지 않은 건 또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건 아마도……, 비록 전시용 용병기사단일지라도 직속상관인 우리까지 깜빡 속여야만 용병들의 사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높일 거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 말해 놓고도 허점이 많은 궁색한 논리였지만, 마르틴은 찜찜함을 애써 무시했다.
자신은 기사다.
그리고 귀족이다.
제아무리 기사단을 꾸린 용병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밀린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자신을 비롯해 수하들 모두가 소드 익스퍼트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하긴 나답지 않은 고민을 했군.”
“그렇습니다, 마이 로드.”
나집의 동조에 마르틴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한편에서 여전히 가시지 않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버리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