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21화
“단단히 준비하십시오, 단장.”
“무슨 일인가?”
“옵니다. 브루넬로 왕국의 소드 마스터.”
마현은 롱소드를 들어 올리며 짧게 명을 내렸다.
“전열 재정비!”
단원들은 마현을 중심으로 싸움으로 인해 흐트러진 대열을 다시 튼튼하게 만들었다.
“후우.”
마현은 길게 날숨을 내뱉으며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뿌우우우―
등 뒤에서 퇴각을 명하는 고동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퇴각?’
마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포크너 후작이 있는 언덕에서 퇴각을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쉽군!’
말 그대로 아쉬운 감정이 눈동자에서 묻어나왔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마현은 롱소드를 착검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퇴각!”
마현은 빠르게 뒤로 빠지는 아군 병사들을 따라 본영으로 퇴각했다.
* * *
8군단 지휘군막.
“으하하하!”
참모들이 배석하자마자 포크너 후작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1시간이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다.
눈에 띄는 성과물은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통쾌한 승리를 얻어냈다.
“하하하하!”
“푸하하하!”
승리감에 도취되어 지휘관들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쯧쯧.’
마현은 그런 지휘관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 포크너 후작이 호탕하게 웃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형일 뿐,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쾅!
갑자기 포크너 후작이 안색을 굳히며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지금 웃음이 나오는가?”
아니나 다를까, 포크너 후작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승리?”
포크너 후작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겨우 우리 힘으로 가벼운 주먹 한 방 날린 것뿐이다.”
그 냉랭한 호통에 8군단 지휘군막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위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몬테팔코 왕국의 라케르크 백작의 제1기사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드 마스터가 등장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지금 웃음이 나오느냐 말이다!”
마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것이 이유였나?’
기세 좋던 전장의 흐름을 무시하고 퇴각을 명한 이유가 그제야 납득이 되었다.
“부관.”
포크너 후작은 고디머 자작을 불렀다.
“예, 군단장님.”
“그자의 정체를 알아보았나?”
“여러 경로로 알아봤으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브루넬로 왕국 측에서도 일급기밀로 다루는지라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그나마 알아낸 인상착의로 미뤄보아 이제껏 알려진 소드 마스터는 아닌 듯합니다.”
그 보고에 포크너 후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모처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는데, 호락호락하게 시간을 끌게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포크너 후작은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카칸.”
“말씀하시지요.”
“소드 마스터가 둘. 막을 수 있겠나?”
사안이 매우 중대해서 그런지 포크너 후작은 케이슨이 아닌 마현에게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견제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한 번 부딪혀봐야 알 것 같습니다.”
“휘하 기사단의 수를 늘린다고 해도?”
“현 상황으로는 짐만 될 뿐입니다.”
“그래도 전처럼 최악의 상황은 아니군.”
포크너 후작은 그나마 안도하는 듯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달라진 것은 없군.”
포크너 후작은 자조 어린 웃음을 슬쩍 지었다가 바로 지웠다.
그때 몬테팔코 왕국을 상징하는 마크가 가슴에 새겨진 한 마법사가 지휘군막 안으로 들어와 고디머 자작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군단장님.”
“응답이 온 것인가?”
그 순간 포크너 후작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디머 자작을 쳐다보았다.
“마탑 중 샤토 마탑에서 저희 쪽 제안에 응해왔습니다.”
“샤토 마탑? 대장장이 마탑 말인가?”
“그렇습니다, 군단장님.”
“가뜩이나 전쟁으로 인해 왕국 재정도 안 좋은데, 그나마 바닥이 나겠군.”
“그렇기는 하지만 이 기회에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득이지요.”
고디머 자작의 목소리에 포크너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전장에서 마법을 별로 볼 수 없었군.’
마탑이 대륙의 마법을 독점했다더니 그 심각성은 생각보다 컸다. 어지간해서는 왕국마다 왕실 소속 마법사들이 존재하는데, 군단에서 마법사를 본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샤토 마탑이면 체스와프가 오겠군.’
마현은 차가운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파격적으로 체스와프 마탑주가 친히 전장으로 온다고 합니다.”
“그래?”
포크너 후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체스와프 마탑주에 케이슨 용병기사단이면 이 지리한 이 전쟁을 끝내는 것도 시간문제겠군. 언제쯤 도착한다던가?”
“빠르면 열흘, 늦어도 보름 정도면 도착할 것이라는 전갈입니다.”
“좋아!”
포크너 후작은 탁자를 탕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보름간 이 전선을 유지한다.”
“충!”
“충!”
오랜만에 8군단 지휘군막 내에서 후끈거리는 열기를 담은 하나로 통일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군막으로 돌아가는 내내 상념에 빠져 있는 마현의 모습에 케이슨이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현은 군막에 도착하자마자 밀러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밀러는 보고 있던 마법서를 흔쾌히 접으며 야전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용한 곳으로 가겠나?”
“그러면 더 좋습니다.”
마현과 밀러는 군막에서 조금 떨어진 숲으로 들어갔다. 숲 안에는 마침 둘이 마주앉기에 딱 좋은 바위가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열흘에서 보름 정도 후에 샤토의 마탑주인 체스와프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떠오른 것입니다만……. 지금껏 군단에서 마법사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마법사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 뵙자고 한 것입니다.”
밀러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마현을 보는 시선은 미묘하게 복잡했다.
“사람을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을 알아간다고 하지. 그런데 자네는 보면 볼수록 더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소드 마스터인 자네가 4서클 마법서를 완성시켜 준 것도 그렇고, 비록 잠시지만 마법사의 길을 걸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과할 정도로 호기심을 드러내니 말일세.”
“제 사…….”
“자네 사람이 되면 알려주겠다는 말로 또 얼버무리려는군.”
밀러의 말에 마현은 고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내가 아는 것만큼 이야기해 줌세.”
밀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대륙의 마법은 7대 마탑에서 독점하고 있다네. 마법의 독점은 당연히 마법사들로 하여금 왕국을 떠나 마탑으로 모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실재 그들을 모이게 만들었네. 사실 전 대륙 마법사들의 절반 이상이 마탑 소속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큰 오차가 나지 않을 걸세.
그중 절반은 나와 같은 버림받은 용병마법사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각 왕국의 귀족 가문에 몸을 의탁한 마법사들이네. 그나마 각 왕국의 귀족 가문의 마법사들이 있어 왕실마법사들이 근근이 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일세.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고위 마법사들은 점점 사라지고 어느 왕국에 가나 왕실마법사장의 서클은 5서클을 넘기지 못하네.”
밀러의 목소리는 한없이 어두웠다.
“이 정도가 현재 마법에 대한 정세일세.”
“그렇군요.”
“그것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한 건가?”
“아닙니다. 오늘 회의에 따르자면 우리가 상대할 라케르크 제1기사단에 라케르크 백작 외에 소드 마스터가 한 명 더 있다고 합니다.”
“허어. 그다지 유쾌한 정보는 아니군.”
“아마 전장이 더 위험해지겠지요. 그만큼 밀러 님의 활약도 더 필요하기도 하구요.”
“휴우, 내게 큰 짐을 얹어주는군.”
밀러는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돌아앉아 주시겠습니까?”
“돌아앉아서?”
밀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현을 등지고 앉았다.
마현은 밀러의 등 쪽, 명문혈에 손을 얹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제 기운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또한 입을 열면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그냥 저를 믿으시면 됩니다.”
마현은 밀러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밀러는 잠시 고민하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현은 마력을 끌어올려 부드럽게 밀러의 명문혈로 밀어 넣었다.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자 밀러의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 느낌은? 어둠?’
밀러는 다급히 눈을 뜨려 했지만 마현의 말이 떠올라 일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마현의 마력은 밀러의 몸을 누비더니 서서히 심장을 뒤덮었다.
‘흠.’
마현은 밀러의 심장과 그 주위에 만들어져 있는 서클을 관조하며 침음했다.
‘역시.’
마현의 짐작이 맞았다.
밀러의 서클은 온전하지 못했다.
서클이 조밀하고 단단해야 하는데 성글기 짝이 없었다.
오늘 전장에서 느낀 밀러의 마법의 위력은 확실히 부족함이 많았다. 어둠의 힘을 가지지 못했다고 쳐도 뭔가 불안전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밀러의 서클은 완벽하게 고리를 만들고 있지 못하고 이었다.
그나마 독학으로 이 정도까지 서클을 만든 것도 밀러의 피나는 집념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마현은 마력을 밀러의 서클에 밀어 넣었다.
찢어질 듯한 고통에 밀러의 눈이 강제로 떠졌다.
『밀러 님!』
마현의 전음에 밀러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이빨로 깨물었다. 그 고통은 한순간이었다. 그 뒤에 상쾌함이 밀러의 몸을 장악했다.
‘이, 이럴 수가!’
온전하지 못한 밀러의 서클이 조밀해지고 더욱 단단해져갔다. 마현의 마력에 의해서. 동시에 밀러는 탈피하는 자신의 서클에서 패도적인 힘을 느꼈다.
분명 어둠의 힘이었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의 힘.
하지만 걷지 못한 힘.
그리고 갈망하던 그 힘.
바로 어둠의 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꿈결 같은 달콤한 마력이 밀러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텅 비어 버린 서클로 인해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나머지는 밀러 님의 몫입니다.”
마현은 이마에서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소매로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정말 자네는…….”
밀러는 왼쪽 가슴을 손으로 움켜잡으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제 사람이 되면.”
마현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군막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밀러는 여전히 자신의 심장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과 달리 묵직한 서클을 느끼면서 말이다.
* * *
마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피와 단발마의 비명으로 얼룩진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버텨주마! 네놈이 올 때까지.’
마현은 체스와프를 떠올리며 살기를 억눌렀다.
“카칸! 우측 용병연대 쪽이다!”
포크너 후작의 명에 마현은 고개를 돌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용병연대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한 무리의 야수 떼가 양 떼 속을 날뛰는 듯 적국의 기사단이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라케르크 제1기사단이 틀림없었다.
특히 그 무리에서 사자를 연상케하는 두 명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라케르크 백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드 마스터겠군.’
“출전 준비!”
마현의 간결한 명이 떨어졌다.
촤르르륵!
은빛 광채가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을 에워쌌다. 짧은 시각 안에 완전무장을 마친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일제히 말고삐를 당겨 라케르크 제1기사단이 날뛰고 있는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