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23화
“안 돼!”
“로, 로드!”
라케르크 제1기사단은 한순간 혼란에 빠져들었다.
“죽여라! 로드의 원한을 갚아라!”
혼란으로 치닫기 직전 라케르크 제1기사단의 부단장은 빠르게 분위기를 수습했다. 그리고는 일제히 철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조건 방어에만 치중한다. 아이작, 내 빈자리를 맡아라. 케이슨 단장, 대열을 유지해 주십시오.』
마현은 전음으로 명을 내리며 철용에게로 몸을 날렸다.
“철용,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자구나!”
“주군과 함께라면 어디에서라도 신납니다!”
마현과 철용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후 라케르크 제1기사단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쿵!
8군단 지휘군막 중앙에 놓인 대형 탁자 위에 라케르크 백작의 수급이 올려졌다. 그로 인해 핏물이 탁자 위를 뒤덮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흠!”
그 수급을 보던 포크너 후작은 한참이 지나서야 뒤에 앉아 있는 마현을 쳐다보며 나직하게 신음했다.
오늘의 전과는 단지 지금 탁자 위에 올려놓은 라케르크 백작의 수급뿐만이 아니었다. 라케르크 제1기사단의 전멸에 가까운 궤멸.
대승도 이런 대승이 없었다.
그토록 자신을 못살게 굴던 라케르크 백작과 그의 제1기사단이 아니었던가.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다.
좋다.
너무 좋다.
아무도 없다면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너무 좋으면 웃음이 아니라 신음이 흘러나온다는 걸 포크너 후작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군단장님?”
포크너 후작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마현을 빤히 쳐다보자 고디머 자작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런.”
포크너 후작은 이내 상념에서 벗어나 저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카칸.”
“말씀하시지요.”
“정체 모를 적국의 소드 마스터가 이번에 함께 넘어왔다고 하더군. 사실인가?”
포크너 후작의 질문에 당연히 지휘관들은 마현을 쳐다보았다.
한순간 등장한 적국의 소드 마스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신비에 휩싸인 인물이었다. 그런 소드 마스터가 돌연 마현과 함께 소속 기사단장이었던 라케르크 백작을 죽이고 그의 제1기사단을 궤멸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진영으로까지 왔으니 호기심이 이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사실입니다.”
“왜인지 물어봐도 되겠지?”
당연한 질문이었다.
“사연이 있어 헤어졌던 제 수하입니다.”
“수, 수하?”
포크너 후작은 그답지 않게 놀란 표정을 너무도 확연히 드러냈다. 평상시라면 이런 모습에 지휘관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수군거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들 역시 너무 놀라 포크너 후작의 표정을 인식할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군단장님.”
“으, 응. 말해보게.”
“일단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편입시킬 생각입니다. 다만 신분이 불확실하니 군단장님께서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편입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철제 허리띠를 포크너 후작 앞에 내려놓았다. 그 철제 허리띠는 카이샨 메일이었다.
“이것도 손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 카이샨 메일 상단에는 라케르크 기사단을 뜻하는 ‘L’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후우.”
포크너 후작은 카이샨 메일을 내려다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지. 고디머 부관.”
“예, 군단장님.”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일을 처리해 주게.”
“알겠습니다.”
마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계약 완료되었다는 증명자료도 부탁드립니다.”
“너무 단칼에 자르려고 하는군. 그래도 어정쩡한 것보다는 확실한 게 좋기는 하지. 고디머 부관, 그 일도 함께 처리해 주게.”
고디머 자작이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름 높던 기사가 아닌가. 그만한 대우는 해줘야겠지. 누가 브루넬로 왕국 측에 사절로 가겠나?”
“제가 가겠습니다.”
한 지휘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10여 명 안팎으로 기사들을 대동한 채 갔다 오라. 그리고 라케르크 백작을 애도하는 의미로 내일 하루 휴전을 제안하고. 그들도 나름 시간이 필요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좋아. 대승은 대승이니 기분 한 번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오늘 전군에 고기와 술을 돌려라. 오늘 야간 경계를 맡은 곳은 어딘가?”
“속하입니다.”
“그대 소속 병사들에게는 내일 술과 고기를 지급하겠다.”
“알겠습니다.”
“큰 일이 없는 이상 내일은 아마 휴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귀관들도 오늘 하루쯤은 푹 쉬도록. 이상, 오늘 회의를 마친다.”
포크너 후작은 기분 좋게 회의를 끝냈다.
* * *
아이작은 눈을 감은 채 야전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철용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요?”
제이든의 목소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그 목소리에 철용은 조용히 눈을 뜨고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벙어리야 뭐야? 이름이 뭐냐고?”
“찰튼.”
“찰튼? 그게 이름이오?”
“찰튼.”
“거참. 못 알아듣는 거야,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야?”
“찰튼.”
철용의 반복된 말에 제이든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만해, 제이든.”
케이슨이 조용히 제이든을 말렸다.
“밀러 님, 거 왜 말이 안 통해도 대화를 주고받는 마법 있잖습니까?”
“통역 마법을 말하는 건가?”
“아! 그래 그거! 밀러 님, 답답해서 그러니까 그거 좀 펼쳐주십시오. 이놈하고 카칸의 속셈 좀 알아보게.”
“미안하네만 고위 마법이라 아직 무리네.”
밀러의 쓴웃음에 케이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든. 그만 해라. 카칸이 오면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
그런 소란 속에서도 아이작은 철용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전장을 떠올렸다.
아이작은 백마기사단 소속으로 아버지인 하야스 후작과 수많은 전장을 치러왔었다. 그렇기에 소드 마스터의 힘을 가까운 곳에서 수없이 보아왔었다.
하지만 전율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흥분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 마현과 찰튼이라는 기사의 싸움을 보고 있자니 흥분으로 인해 숨결이 거칠어지고, 온몸에는 전율이 흘렀었다.
처음으로 검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아이작은 이제껏 검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하는 한 폭의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건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다니!
아이작은 전장에서 마현과 철용에게서 연신 눈을 떼지 못했었다.
이것이었다.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의 목표가.
흐릿하기만 하던 자신의 길이 바로 이것이었다.
너무나도 강하고 패도적이여서 오히려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이것. 바로 이것이었다.
아이작은 전장에서의 아름다웠던 마현과 찰튼, 특히 찰튼의 검술을 떠올리니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눈에서 아른거리는 찰튼의 검을 쫓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이었다.
“아이작, 어디 가?”
아이작이 투핸드소드를 들고 군막을 나서자 제이든이 그를 불렀다.
“땀 좀 빼려고.”
아이작은 임시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가 눈을 감았다.
‘패도적이지만 분명 자유로웠다.’
스르릉.
아이작은 철용의 검술을 떠올리며 투핸드소드를 빼어들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전장에서 보여줬던 그의 검을 쫓아 투핸드소드를 휘둘렀다.
* * *
마현은 군막으로 돌아가기 전 임시 무구점에 들려 밋밋한 은팔찌 하나를 샀다. 그리고 그 은팔찌에 통역 마법의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그것은 철용 때문이었다.
당장 하르센 대륙의 언어를 익힐 수 없고, 또 익힐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구적인 아트팩트는 아니지만 당분간은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그렇게 군막으로 들어설 때 임시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검이 만들어낸 파공음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
아이작은 홀로 임시 연무장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야스 가문의 검술이었지만 또한 하야스 가문의 검술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기에, 하야스 가문의 검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여전히 조잡하고 엉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아이작의 얼굴은 매우 밝아 보였다.
‘철용 때문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야 인정하고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들어왔지만 철용은 아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소드 마스터가 뚝 떨어진 느낌일 것이다.
더욱이 철용은 자신과 달리 검에 목숨을 바쳤던 이다. 물론 자신을 만나 네크로나이트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철용의 검술 기풍이 아이작을 더 자극했을지도 모르겠군.’
철용은 삼류마인 출신이었다. 낭인들도 저리가라 할 만큼 자유로운 이였다. 그렇기에 패도적인 마검을 익혔지만 그 속에 자유로움이 자연스레 묻어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비단 철용뿐만 아니라 흑풍대 모두의 검이 다 그랬다.
아이작도 마현의 기척을 느꼈는지 투핸드소드를 거뒀다.
“아직 멀었다.”
“……?”
“멀고 먼 나라의 말 중에 ‘무아지경’이란 말이 있다. 그것은 자신조차 잊을 만큼 몰두한다는 뜻이지. 만일 너를 잊고 검이 된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당장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훗날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가지.”
마현은 아이작과 함께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마현이 들어서자마자 철용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철용, 이곳은 본교가 아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나를 대할 필요가 없다.”
마현은 철용에게 은팔찌를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이곳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다. 그곳에 기를 주입하면 작동할 거다.”
이미 마현을 통해 마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철용인지라 그다지 거부감 없이 팔찌를 팔목에 찼다.
“단장,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무리한 부탁이라니, 나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맞아요, 카칸. 제이든만 빼고 다 찬성했죠. 호호호.”
자브라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제이든을 놀렸다.
“익!”
제이든은 발끈하는 음성을 삼켰다가 투덜거리며 자신의 야전침상으로 걸어가 벌러덩 누워 버렸다.
“찰튼,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용병기사단의 단장이시다.”
“찰튼입니다.”
철용은 케이슨에게로 걸어가 중원식으로 포권을 취했다.
통역 마법으로 인해 철용의 목소리는 어색하게 들렸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입모양과 목소리가 통일되지 않아 약간 귀에 거슬리는 정도일 뿐이었다.
“케이슨이라고 하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철용은 몸을 돌려 다른 단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찰튼. 그대는 이곳 사람이 아닌가 봐요?”
자브라의 질문에 철용은 흠칫 놀라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다른 대륙에서 왔소.”
“다른 대륙?”
자브라가 놀란 듯 되물었다.
“자세한 것은 때가 되면 알려주리다.”
마현은 완곡하게 말을 잘랐다.
“찰튼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런, 내가 무심했군.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이야기가 많을 거라는 것을 잊고 있었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현은 철용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중원어를 이용하면 상관이 없겠지만 일부러 단원들 앞에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질적인 언어는 오히려 서로 간의 벽을 쌓을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차원이동 마법진에 휘말린 것이군. 이곳으로 넘어온 것은 그대뿐인가?”
“아닙니다, 주군. 대주를 비롯해 열 명 내외로 왔을 거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