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11화
포크너 후작가를 찾은 마현은 곧장 그의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포크너 후작은 마현 뒤로 시선을 돌렸다.
“집사는 같이 안 왔나?”
“……?”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마현의 표정에 포크너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면 몰라? 집사가 찾아서 온 게 아니라 네게 볼일이 있어서 왔구만.”
고개를 돌려보니 하야스 후작이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앉아 있었다.
“하야스 후작님도 계셨군요?”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하야스 후작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영지전 때문일 것이다.
“앉게.”
하야스 후작은 마치 자신의 집처럼 마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마현이 앉자 마침 그에게 볼일이 있는 포크너 후작도 함께 앉았다.
“불러서 온 게 아니면 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 전에 오면서 들었는데, 자작 한 명 때문에 골치가 아프시다고요?”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
포크너 후작은 꼬인 심사를 표정으로 표출시켰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들.”
하야스 후작은 나직하게 이를 박박 갈았다.
“그래서 불렀다. 급히 용병길드를 통해 의뢰를 넣었는데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전쟁이 끝난 것과 동시에 미하일 준남작에게 장기 고용이 되어 있더군.”
“친분이 있어 그리했습니다.”
“그래서 말이야, 어떻게 안 되겠나? 의뢰비는 넉넉히 챙겨주겠네.”
“왜 직접 나서시지 않구요?”
마현은 하야스 후작을 쳐다보았다.
“내가 나서면 옥타비오 공작도 움직이게 되네. 그러면 그의 최측근인 소드마스터 가르시아 백작도 움직이게 될 거고. 클로드 공작이 있어 내전으로까지 번지지는 않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혼란과 희생이 따르게 되네. 빌어먹을 새끼!”
하야스 후작은 마지막으로 옥타비오 공작을 향해 욕을 내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하야스 후작의 모습에 포크너 후작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해하게. 사실 우리도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은 몰랐거든. 집단속 시켜놨더니 돌아온 주인에게 칼을 들이미는 꼴이니.”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옥타비오 공작은 상당히 교활한 인물일 것 같았다.
대략적으로 사정을 더 들어보니 한 마디로 하야스 후작이나 포크너 후작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집사를 보낸 것이다.”
“흠…….”
마현은 고심하는 척 침음을 흘렸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전장에 있을 때 잠시 종자로 온 한스라는 아이를 기억하십니까?”
“종자를 보낸 것은 기억이 나는데 한스라는 아이는 잘 모르겠군. 하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는 있네.”
포크너 후작은 왜 그 아이를 찾느냐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
“그 아이를 저희 용병기사단에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약간 의외라고 여긴 탓인지 포크너 후작은 마현을 잠시 쳐다보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싸게 먹히는군. 당장 보내줄 수는 있지만 그래도 담보거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영지전이 끝나면 그때 보내주겠네.”
매정하다고 여겨질 수 있었지만 포크너 후작의 처지를 알았기에 마현은 흔쾌히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약조하신 겁니다?”
“적어도 나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는 않아.”
포크너 후작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약속을 확인시켜 주었다.
“뭔가 당한 느낌인데.”
하야스 후작은 마현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설마요.”
마현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보려고?”
하야스 후작은 여전히 마현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물었다.
“볼일이 끝났으니 가보겠습니다.”
콰당!
그때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중년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후작님. 크, 큰일이…….”
“무슨 일인가?”
포크너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하일 준남작의 별장에 옥타비오 공작이 직접 방문했습니다.”
“뭐라?”
하야스 후작이 그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흠!”
마현이 짧게 침음했다.
옥타비오 공작이 별장을 방문했다는 소리는 곧, 지금 미하일 준남작, 그러니까 흑도를 만나고 있을 거라는 소리다.
그를 만나 흑도가 또 무슨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큰 걱정거리까지는 아니었다. 여차하면 하야스 후작과 포크너 후작과 손을 잡고 옥타비오 공작의 목을 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단순한 흑도의 성격 때문에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을까 그게 더 큰 걱정이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마현은 서둘러 포크너 후작가를 떠나 흑도의 별장으로 향했다.
* * *
별장 앞에는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마차 곁으로는 십여 명의 병사들이 부리부리한 눈빛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옥타비오 공작의 마차일 것이 분명했다.
마현은 그 마차를 지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카칸.”
별장 앞에는 단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중 케이슨이 마현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케이슨이 눈으로 옥타비오 공작의 마차를 가리켰다.
하긴 케이슨과 단원들도 상당히 궁금해 할 것이 분명했다.
대략적이나마 상황을 막 설명하려는 그때 별장 본채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 무리 중앙에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거만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올라간 턱 위에는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들은 옆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죠. 일단 미하일 준남작부터 만나봐야겠습니다.”
일단 일의 선후를 알기에 케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현은 서둘러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음트트트트!”
흑도의 서재 겸 집무실인 방 안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웃음을 배웠는지 흑도는 잘도 우중충한 웃음을 아무렇지 않게 터트리고 있었다.
“주군.”
그때 흑도를 제외한 흑사신이 다가왔다.
“옥타비오 공작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아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희도 그 자리에 배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그 와중에도 흑도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끊여지지 않았다.
덜컹.
마현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허억!”
흑도가 헛바람을 터트리며 다급히 무언가를 숨기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옥타비오 공작이 찾아왔었다고?”
마현은 모른 척 흑도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으로 다가가 앉았다.
“하하, 하하하. 빨리 왔네, 주인.”
흑도는 갑자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옥타비오 공작이 왜 찾아온 거지?”
“으,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흑도는 안절부절못하며 눈의 초점마저 한군데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 뭔가를 숨기려고 급급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소파 밑으로 철궤의 한쪽이 살짝 튀어나오자 움찔 놀라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발뒤꿈치로 밀어 넣기까지 했다.
마현은 투시 마법으로 소파 아래 철궤를 살폈다.
총 세 개의 자그만 철궤였는데 어림잡아 상자마다 500골드씩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흑도가 옥타비오 공작에게서 1,500골드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흑도에게 저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옥타비오 공작이 흑도에게 저렇게 엄청난 돈을 주었을까?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나와 있었다.
옥타비오 공작이 직접 흑도를 찾아와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다른 곳의 의뢰를 이중으로 받지 못하도록 부탁했고, 흑도는 1,500골드라는 거금을 받고 그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것이다.
‘1,500골드라…….’
그런 거금이 달갑지 않을 리 없었다.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다는 의미다.
문제는 하야스 후작과 포크너 후작이었다.
굳이 그들과 인연을 이어갈 필요는 없었지만 또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아이작과 밀러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고심할 필요는 없었다.
‘하긴,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움직이지 않으면 되는 거지. 약속만 어기지 않으면 되는 것을.’
마현의 입언저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흑도.”
“으응, 주인.”
기분 좋은 얼굴에 차갑게 살짝 말려 올라간 마현의 미소. 그것이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흑도가 모를 리 없었다. 그 미소에 지레 놀랐는지 흑도는 딸꾹질을 해댔다.
“잘했다.”
“무, 무슨 말인지…….”
“그래도 섭섭해.”
흑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흑권.”
“예, 주군.”
“흑도를 잡아라.”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권과 흑검이 흑도에게 달려들었다.
“흑창, 소파 아래에 자그만 철궤가 있을 거다.”
“아, 안 돼! 안 돼애애애!”
흑도는 마현의 명에 따라 소파 아래로 몸을 웅크리는 흑창을 보며 절규를 터트렸다.
쿵쿵쿵!
묵직한 무게감이 탁자 위를 짓눌렀다.
“흑도, 우리 사이가 겨우 이 정도였나?”
마현은 철궤를 열어 금화를 확인하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다 같이 잘 살자고 그런 것이었는데 말이야.”
“주군, 어떻게 할까요?”
흑검이 흑도의 목을 강하게 조이며 물었다.
“본교의 배신은?”
마현의 질문에 흑검의 입술이 기분 좋게 비틀어졌다.
“죽음!”
“그래도 죽일 수는 없으니 알아서 해라.”
“충!”
그 어느 때보다 흑검이 복명하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주, 주인! ……그, 그게 아니라. 으아아아! 주인 미워!”
흑도는 흑검과 흑권의 손에 이끌려 집무실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흑창, 나가서 흑풍대주와 세욱이를 데리고 와.”
흑창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복명을 대신하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후 왕귀진과 흑풍대원 검세욱이 함께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생겼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일단…….”
그때 약간의 소란과 함께 알랜이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머리는 다 헝클어져 있고, 거친 숨을 좀처럼 다스리지 못했다.
“헉헉, 카칸 님. 조금 전에 옥타비오 공작 측에서 사람이…….”
“일단 앉으시오.”
마현이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찌되었든 숨을 골라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랜도 알고 있었기에 마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건지 알고 있소.”
“하지만 일이 어떻게…….”
“그리 되었소. 나도 설마 옥타비오 공작이 이곳에 찾아올 줄은 몰랐소.”
“허어!”
그 사실까지는 몰랐는지 알랜도 탄식을 터트렸다.
“그럼 이걸 어쩐다.”
눈앞에 앉아 있는 마현은 소드마스터라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알랜은 그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리 걱정할 거 없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휴우!”
너무나도 태연한 마현의 위로에 알랜은 잠시 그의 앞에 있다는 것을 까먹고 발끈했다가 금세 표정을 추스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랜 부길드장.”
“말씀하십시오.”
알랜의 목소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