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15화
하르센 대륙으로 넘어왔지만 다크 스켈레톤이 소멸된 것을 제외하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또한 현재의 무력도 하르센 대륙에서는 충분히 강했고, 그 전에 자신들은 검사가 아닌 네크로나이트였다. 그렇기에 굳이 내력을 키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새롭게 다크 스켈레톤들을 복속시키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는 했다.
흑풍대원들의 눈에서 그런 의구심을 읽은 마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중원에서는 다크 스켈레톤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곳은 다르다. 하여 너희들에게 중원에서처럼 다크 스켈레톤이 아닌 다크 나이트를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단전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흑풍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다크 나이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흑사신이 바로 다크 나이트가 아니었던가? 물론 흑사신만큼의 무력은 가지지는 못하겠지만 다크 나이트라는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무력 상승이 이뤄진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만큼 더 위험하고 힘든 길이 될 거라는 소리다.”
마현의 이어진 목소리에 흑풍대원들은 흥분되었던 감정을 추슬렀다.
“모두 살아서 돌아가자. 우리의 고향으로!”
“명!”
“명!”
흑풍대는 일제히 한목소리를 복명했다.
“좋아.”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원들의 내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케이슨과 아이작에게는 최상급 힐링포션 3병을, 그리고 나머지 단원들에게는 5병씩, 시간을 들여 복용시킬 생각이었다. 마현이 여섯 명의 단원들에게 일일이 최상급 힐링포션을 먹인 후 독기를 제거하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마현은 케이슨에게는 왕귀진이, 아이작에게는 철용이, 그리고 나머지 단원들에게는 흑풍대원이 각기 한 명씩 맡아 그 일을 전담하게 할 생각이었다.
마현과 흑풍대가 연무장으로 들어서자 단원들은 수련을 멈췄다. 마현은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창문 하나 없는 밀실이었다.
잠시 후 밀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그라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선 그라스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커다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다섯 마탑주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사이 네 녀석의 처지를 잊은 모양이구나.”
이베른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라스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스의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미천한 사냥개 주제에 감히 주인 앞에서 두 다리를 꼿꼿하게 세우다니!”
하얗게 겁에 질린 그라스는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네가 잠시 잊은 모양인데, 너를 대신할 사냥개들은 아주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 다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라스는 숙인 머리를 더욱 깊게 조아렸다.
“네 녀석이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명만 내리십시오.”
“케이슨 용병기사단이라고 들어봤겠지?”
그 이름이 나오자 그라스는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다 이베른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용병계에서 회자가 되고 있는 곳이니 들어본 모양이군. 아참, 그 정도가 아니지.”
이베른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용병길드에서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검은여우 용병대와 동급으로 승격시켰다지?”
“그, 그렇습니다.”
“그 기사단에 카칸이라는 자가 있다. 그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보라.”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순간 그라스의 눈동자는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주, 주인님.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그라스는 힘겹게 입을 뗐다.
“그동안 네놈이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잊긴 잊은 모양이구나. 내 명에 조건을 내세우다니.”
이베런의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폭사되었다. 그 기운은 살기로 바뀌어 그라스의 몸을 옥죄었다.
“크으으으!”
그라스는 지독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시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었다.
“사, 사냥개라도 가끔은 먹이가 필요합니다.”
그라스의 말에 이베른은 히죽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그라스를 옥죄던 기운이 한순간 사라졌다.
“크크크, 먹이라……. 그게 무어냐?”
이베른이 허락하자 그라스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격한 숨을 삼키며 힘겹게 대답했다.
“카이샨 메일이 필요합니다.”
“카이샨 메일?”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베른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충실하게 사냥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라스는 용기를 내었다.
그 말이 이베른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과한 먹이지만 주지.”
“가, 감사합니다.”
그라스는 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쿵 찧으며 몸을 더 납작 웅크렸다.
그르륵.
이어 무거운 석문이 열리고 십여 명의 전라의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들은 단숨에 침대 위로 올라가 다섯 백마법사의 품에 안겨 온갖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허허, 허허허.”
그녀들의 손길과 뜨거운 입김에 다섯 백마법사는 기분 좋은, 하지만 음탕함이 깃든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여인들의 눈동자는 초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라스는 머리를 더욱 깊게 조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여인들과 뒤엉킨 이베른은 그저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 * *
쐐애액!
뚜렷하지는 않지만 분명 제이든이 휘두르는 롱소드에 마나가 담겼다.
쾅!
그 롱소드를 막는 흑풍대원의 롱소드에도 마나가 담겼다. 그로 인해 폭음이 두 롱소드 사이에서 터졌다.
그 충격에 뒤로 한 걸음 밀려난 제이든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제멋대로 흔들리는 롱소드를 희열이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좋은 마나였소.”
흑풍대원은 롱소드를 거둬들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내가…….”
제이든은 고개를 번쩍 들어 흑풍대원을 쳐다보았다.
“……방금.”
“소드익스퍼트에 오른 것을 축하하오.”
제이든은 흑풍대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의 눈이, 그리고 내부에서 폭발하듯이 롱소드로 표출된 마나가 환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짜릿한 느낌이 여전했다.
동시에 몸 안에 마나가 고갈되며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최상급 힐링포션을 복용한 뒤, 다음날 자브라가 소드익스퍼트에 올랐고, 이틀 뒤 제이든이 그녀의 뒤를 이어 소드익스퍼트에 오른 것이다.
“하하하하하!”
성취욕에 제이든은 목청껏 웃음을 터트렸다.
“봤냐? 봤어? 봤냐고!”
제이든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양팔을 들어 소리쳤다.
쾅!
그때 또 다른 폭음이 연무장 한구석에서 터졌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이든은 방금 자신이 겪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린 것은 단짝 친구 그레오가 연습하는 곳이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레오가 멍하니 부르르 떨리는 양손과 들고 있는 메이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마나로 인해 연무장 바닥이 깊게 파여 있었다.
제이든에 이어 그레오도 드디어 마나를 경험한 것이다.
“부럽다!”
그런 셋을 보며 야솝이 선망 어린 눈빛을 띠었다.
콩!
그런 야솝의 머리에 검세옥이 제법 매서운 꿀밤을 먹였다.
“아얏!”
야솝의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어디다가 한눈을 팔아?”
야솝의 천진한 얼굴을 보며 검세옥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부럽냐?”
“당연하죠.”
“부러우면 더 많이 검을 휘두르고 더 많이 명상을 해라.”
“쳇!”
검세옥은 야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련할 기분도 아닐 터이니 30분만 쉬다가 할까?”
“부러우면 더 많이 검을 휘두르라면서요!”
야솝은 투덜거리며 다시 롱소드를 들어올렸다.
“다들 열심이군.”
그때 밀러가 마현과 함께 연무장에 들어서며 말했다.
“원하는 목표가 분명하니까요.”
마현의 대답에 밀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현의 말은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이면서 동시에 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하긴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데 고민만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지.”
밀러가 몸을 틀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오늘 저녁에 의식을 치르세.”
밀러의 눈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 * *
마법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 사람들의 피부에 가장 와 닿는 것을 꼽으라면 바로 워프게이트진을 이용한 장거리 순간이동 마법일 것이다.
각 왕국 내에서의 워프게이트진은 사실상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왕국과 왕국을 잇는 워프게이트진은 다르다.
그런 점을 들어 각 왕국의 수도와 공작령, 거기에 준하는 주요 도시를 잇는 워프게이트진은 바로 조화, 스플린 마탑에서 관할하며 운용하고 있었다.
파밧!
몬테팔코 왕국 수도 외각에 위치한 조화, 스플린 마탑 관할 워프게이트진에서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라스는 이베른의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홀로 움직인 것이다.
그는 몬테팔코 왕국에서 파견된 관리에게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친 후 곧바로 워프게이트진 지점에서 나왔다.
‘일단 용병길드로 가야겠군. 알랜 지부장이라고 했던가?’
그라스는 이미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용병길드를 먼저 찾았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알랜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라.”
자신에게 안내될 정도라면 단지 평범한 고객은 아니라는 걸 뜻했다.
알랜은 보던 서류를 정리해 서랍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모셔라.”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로 그라스였다. 피골이 상접하다는 표현이 금세 떠오를 정도로 마른데다가 창백한 피부를 대하자 알랜은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몬테팔코 왕국 수도지부의 부지부장인 알랜이라고 합니다.”
“그라스입니다. 검은여우 용병대의…….”
“아! 부대장으로 계시는?”
알랜은 그를 오늘 처음 보지만 용병길드를 경영하며 주요 인물들의 신상정보를 미리 숙지해 놓았기에 어렵지 않게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들은 것보다 더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군.’
알랜의 그런 생각은 표정에는 일체 드러나지는 않았다.
알랜이 자신의 신분을 바로 알아차리자 그라스는 붉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웃었다.
소름마저 돋게 하는 그 음산한 미소에 알랜의 얼굴이 다시금 굳어졌지만 그는 이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라스가 자리에 앉자 알랜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검은여우 용병대 부대장께서 어인 일로 저를 멀리서 찾아오셨는지요?”
알랜은 마주앉아 그라스를 대하는 것조차 상당히 불편했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