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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92화 (292/351)

# 292

16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라스는 앞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 모습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알랜 역시 그에게로 몸을 숙이며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었다.

스스스―

그라스의 눈에서 검은 마기가 새어나와 알랜의 눈으로 스며들었다.

“가브리엘라의 미혹은 달콤하나니 스스로 그녀의 종복이 되어 충심을 다하리라, 인다크트러네이션(indoctrination)!”

그라스의 목소리와 함께 마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알랜의 귀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알랜의 눈빛이 탁하게 흐려졌다.

“내가 누구지?”

“나의 주인이십니다.”

알랜의 대답에 그라스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 * *

사락, 사락.

적막한 방에서는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흐음.”

잠시 후 그라스의 입에서 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철을 넘기고 있는 그라스 앞에는 알랜이 인형처럼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탁!

그라스는 알랜이 가져온 서류철을 탁자 위에 던지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정확한 게 아무것도 없군.”

못마땅한 감정이 눈가의 주름으로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일급기밀로 분류돼 있는 서류철에는 마현에 관한 신상정보가 적혀 있었지만 대부분 ‘추측’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용병길드에서도 마현에 대한 정확한 신상정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카칸이라는 자와 소통한다고 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애써 찾아온 보람이 없군. 이걸 어쩌나…….”

그라스는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긁으며 미간을 좁혔다.

이것을 정보라고 가지고 돌아갔다가는 크게 낭패를 당할 게 분명했다. 이베른을 비롯한 다섯 마탑주는 정말로 자신을 쓸모없는 사냥개처럼 처리해 버릴지도 모른다.

“카칸, 카칸…….”

그라스는 골똘한 얼굴로 마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품에서 보랏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몇 달 전 이베른이 넘겨준 흑마법서를 통해 만들어낸 일종의 환각제였다.

하지만 단순한 환각제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환각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체내의 마나를 동결시켜 버리는 마법이 담겨 있었다.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이걸 마신다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환각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자신의 미혹에 빠져 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알랜처럼.

하지만 그라스가 사용하기를 망설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환락의 늪’이라 명명한 이 보랏빛 액체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다시 만들려면 흑마법에 관련된 것이기에 재료조차 구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거기에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

그라스는 이 환락의 늪을 적당한 소드마스터에게 복용시켜 자신만의 수족으로 만들려 했다.

물론 환락의 늪을 사용해 카칸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섯 백마법사가 그를 살려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과거의 흑마법사 카칸이든, 아니면 단지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또 환락의 늪이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를 손쉽게 종으로 만든다 해도, 그것을 이용해 설령 수십 명의 소드마스터를 부릴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은 다섯 마탑주를 죽일 수 없었다.

그라스는 다섯 마법사에게 마법으로 금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선택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저주가 되어버린 ‘복종의 인’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라스는 그들을 배신할 수도, 아니 배신에 관한 생각조차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크윽!”

잠시 배신에 대한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지독한 고통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잠식했다.

“으으으으!”

마치 오한에 든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던 그라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며 바닥에 쓰러져 한동안 뒹굴어야 했다.

잠시 후 정신이 들자 어느새 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새 탈진까지 한 모양인지 그라스는 누운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 속에는 탁자 위에 놓인 환각의 늪이 담겨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요? 마음에 안 들지만 저도 살고 봐야 하니…….”

지독한 고통은 그라스의 고민을 단숨에 끝내게 만들었다.

* * *

역오망성 중앙에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밀러를 보며 마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의외군.’

어젯밤 의식에서 밀러가 받아들인 권능의 부신은 바로 광란의 신, 블로흐였다.

과거 마검사들 중에 블로흐의 권능을 받아 전장에서 특유의 광기를 보여준 이들을 버서커(Berserker)라 일컬었다.

‘온화한 성품에 광란의 블로흐 신이라……. 후후, 기대되는군.’

마치 한 번 죽음을 맞이했다가 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숙면을 통해 어둠의 마기를 받아들이고 나면 분명 밀러는 5서클에 올라있을 것이다.

“어둠의 세계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현은 조용히 밀러의 방에서 나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락(Lock)’ 마법을 걸어놓았다. 그리고 한스에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피곤하군.’

하루 꼬박 밤을 새웠다.

하지만 그보다 마현의 심신이 특히 피로에 휩싸인 건 어둠의 신을 현신시키는 의식 때문이다.

이미 날이 밝아 잠자리에 들기는 그렇고 해서 마현은 운기조식으로 피곤함을 떨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데 철용이 다가왔다.

“주군.”

“무슨 일이냐?”

“용병길드 알랜 부지부장이 잠시 들려달라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잠시 들려달라고?”

마현이 아는 알랜은 직접 오면 왔지 자신 보고 오라 마라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이유는?”

“그저 심부름을 통해 온 전갈인지라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알았다.”

마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알랜을 만나기 위해 용병길드로 향했다. 용병길드 수도지부는 2층 건물이었고, 알랜의 집무실은 2층에 있었다.

용병길드 1층에 근무하는 직원의 인사를 받고 2층으로 올라가던 마현의 발걸음이 계단 끝부분에서 딱 멈췄다.

희미하지만 어둠의 향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둠의 향기는 곧 마기를 뜻한다.

너무나도 그 향이 미미해 평소라면 알아차리기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제의 의식으로 인해 평소보다 기감이 더욱 민감해진 까닭이었다.

“저기, 무슨 일 있으십니까?”

계단 아래에서 용병길드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아니오.”

마현은 걸음을 내딛어 2층으로 올라섰다.

알랜의 집무실 앞에 다가서니 마기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마현은 문고리를 잡으며 투시마법을 시전해 빠르게 방 안을 살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알랜이 보였다.

하지만 그 혼자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마현은 문을 열며 재빨리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저자군.’

방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마현은 투시마법을 거두며 서클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려 전신으로 돌렸다. 그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짧은 순간 이루어졌다.

“오랜만이오.”

“이른 아침부터 오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알랜은 평소처럼 넉살 좋은 웃음을 보였다.

마현은 알랜의 맞은편 소파로 가 앉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마침 좋은 차가 들어온 게 있습니다.”

잠시 후 알랜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마현 앞으로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알랜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유심히 살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순간 마현의 눈은 평소와 다른 알랜의 면모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는 알랜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 안에 꿈틀거리는 마기를 발견했던 것이다.

‘가브리엘라.’

미혹의 신, 가브리엘라를 떠올렸다.

마현이 찻잔을 들어 가볍게 향을 맡자 전신에서 마력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미세한 독향에 마력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마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순순히 당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당한 척하며 상대를 끌어내는 것도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후후.”

마현은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파밧!

순간 미약한 파공음과 함께 마현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곳은 알랜의 방 한구석, 미묘하게 사각지대를 이룬 옷장 옆, 바로 그라스가 숨어 있는 곳이었다.

“헉!”

마현이 바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라스는 너무 놀라 헛바람을 터트렸다. 마현은 손을 뻗어 그라스의 목을 움켜잡으며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네놈이냐?”

이대로는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그라스는 모든 기력을 짜내 마현에게 미혹의 마기를 흘려보냈다.

비록 마현을 완전히 현혹시킬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흔들어 틈을 만든 후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서 도망을 치기 위함이었다.

가브리엘라의 권능에 의한 세뇌 마법인 인다크트러네이션이었다. 그것은 마현이 과거 마교에서 무영대주에게 세뇌를 걸었던 블라인드 마인드 마법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마법이었다.

만약 대등한 조건이라면 현혹되는 쪽은 마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대등하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 무림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는 이 세상에 없는 비기(秘技)가 있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그라스를 올려다보는 마현의 미소가 더욱 차가워졌다.

“크윽!”

마현의 손아귀의 힘에 더욱 가해지자 완전히 숨이 막힌 듯 그라스의 입에서는 신음조차 끊겼다. 그러자 마현을 덮쳐오던 미혹의 마기도 목표를 찾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현의 눈에서 마력이 폭사되었다.

섭백겁마안(攝魄劫魔眼), 마교의 섭혼술 중 최상에 해당하는 마공이었다. 섭백겁마안에 의해 만들어진 묵빛 마력이 그라스의 눈을 덮쳤지만 파고들지는 못했다.

“내 눈을 보라!”

마현은 섭혼술의 일종인 섭령마소(攝魄魔笑)까지 일으켜 그라스의 심령을 뒤흔들었다.

“꺼억, 꺼억!”

그라스는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사시나무처럼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저항하는 것이다.

확실히 미혹의 신, 가브리엘라의 권능을 이어받은 자여서 그런지 섭혼술을 중첩으로 펼쳤지만 완벽히 먹혀들지 않았다.

마현은 그라스의 몸을 놓아주며 몸에서 살기를 일으켰다. 그라스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살기였다. 거기에 무형의 기세를 일으켰다.

저항하는 의지마저 베어버리기 위함이었다.

아마 스승 허진이라면 심검의 일종으로 마음을 베어버렸겠지만 지금 마현의 무위로는 어림도 없는 경지였다. 그렇기에 살기와 기세로 최대한 비슷한 수준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끄억, 끄어억!”

그라스의 눈과 귀에서 거무칙칙한 피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시도하면 분명 그라스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마현은 멈추지 않았다.

죽음 직전 섭혼술이 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섭혼술이 통하지 않아 죽어도 상관없다. 죽어 혼백이 되어도 다시 불러내 제압하면 그만이었다.

그라스의 숨결이 흐려지더니 곧 끊어지기 지적까지 왔다. 그 순간 아주 실낱같은 가느다란 마력이 그라스의 눈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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