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317화 (317/351)

# 317

16화

화려하기 그지없는 식당.

달그락 달그락.

고급 자기로 만들어진 접시 위에 포크와 나이프가 부딪히며 자그만 소음이 흘러나왔다. 20여 명의 인원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소음은 그저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며 나오는 소리가 전부였다.

“흠……. 맛있군.”

마현은 두툼한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입안에 도는 느끼함을 포도주를 머금어 가시게 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맛이 없소?”

마현은 다시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다가 마치 질긴 가죽을 씹고 있는 것처럼 인상을 굳힌 채 기계적으로 포크질을 하고 있는 월코트 자작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맛있게, 제대로 음미하고 있는 건 흑풍대뿐이었다. 월코트 자작과 그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먹는 둥 마는 둥 기계적으로 포크질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 아닙…… 컥컥컥,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월코트 자작은 마현의 질문에 급히 대답을 하느라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내뱉었다.

대답은 그리했어도 월코트 자작은, 아니 그의 기사들 모두 하나같이 돌덩이를 삼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지금 여기가 어딘가?

테누타 왕국의 수도가 지척인 어느 남작령이었다.

그리고 이 식당은 그 남작령을 관할하는 영주성의 식당이었다.

더욱이 이 남작령을 점령했다고 카칸은 페로스 공작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당장 테누타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들이닥쳐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그런데도 영주성 식당에서 이처럼 호화찬란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으니 보통사람이라면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월코트 자작은 지금 음식이 넘어가느냐고 마현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마현과 흑풍대는 태평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든든하게 먹어두시오. 내일은 험난한 하루가 될 터이니.”

마현은 월코트 자작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잠시 멈췄던 포크질을 다시 시작했다.

월코트 자작은 그런 마현의 모습에 그저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키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그 시각.

테누타 왕국의 수도 중앙에 위치한 왕궁.

왕좌에 앉아 있는 비슬라바 국왕의 침묵은 대전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 방법밖에 없겠느냐?”

오랜 침묵을 깨고 비슬라바 국왕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망하오나 제가 생각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듯하옵니다.”

이베른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허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비슬라바 국왕의 목소리에는 참담함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게 이 소신의 무능력 때문이오니 엄히 벌하여 주시옵소서.”

페로스 공작이 왕궁으로 온 것은 정확히 삼 일 전.

그 혼자 온 것이 아니다.

하멘 평원의 주요 전력인 알베르 후작을 비롯해 세 명의 소드마스터, 그리고 이베른을 포함한 네 명의 마탑주와 함께 왔다.

그런 까닭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어제부로 하멘 평원을 트로켄 왕국의 손에 완전히 빼앗겼다. 게다가 켄타키 성을 시작으로 주요 영지가 마현의 손에 함락되었다.

페로스 공작이 바닥에 엎드리며 다시 침울하게 말했다.

“전하, 이 모든 것이 소신의 무능력 때문이오니 엄히 벌하여 주시옵소서.”

페로스 공작 옆에 서 있던 또 한 명의 공작인 사라마구 공작이 대전 바닥에 엎드리며 머리를 쿵 찧었다. 이 전쟁의 원인을 굳이 찾는다면 사라마구 공작의 강력한 주전론이 국론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을 탓할 생각은 없느니라. 짐이 그대들의 입장이었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황망하나이다, 전하.”

두 공작은 다시 머리를 바닥에 쿵 찧었다.

“허나…….”

문득 비슬라바 국왕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담겼다.

“치욕도 여기까지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명심하겠나이다.”

“반드시 그자들의 목을 베고, 이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겠나이다, 전하.”

“그래, 그거다. 그게 테누타 왕국의 정신이다.”

비슬라바 국왕은 고개를 돌려 네 명의 마탑주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염려 붙들어 매시옵소서.”

이베른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대들이 이 일을 잘만 해결해 준다면 섭섭하지 않게 사례를 하겠노라.”

“그 마음 감사히 받아들이겠나이다.”

이베른과 나머지 세 마탑주는 깊지도, 그렇다고 얕지도 않게 허리를 숙였다.

* * *

암울한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데도 테누타 왕국의 수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분위기였다. 남문에서 남쪽 번화가를 지나 왕궁까지 이어진 대로 위에는 마차들과 행인들이 저마다 바삐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테누타의 왕궁 역시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분명 오늘 왕궁을 습격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왕궁뿐만 아니라 수도에도 철통같은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 마현은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비웃기라도 한 것처럼 여느 날과 다름없이 테누타 왕국의 수도는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흠…….’

마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왕궁으로 다가갈수록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왕궁.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것이다.

마현은 그들에게 시간을 줬고, 그들은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마현의 가늘어진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무엇이든 부숴 버린다!’

방비를 하고 있거나 말거나 어차피 상관없다.

“가자!”

마현은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낮게 명을 내렸다.

“명!”

마현을 선두로 흑풍대가 뒤를 따랐고, 다시 그 뒤를 월코트 자작과 그의 기사단이 따라갔다.

* * *

“오는군.”

대로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무리들을 보며 이베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은 얼굴을 식별할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멀었지만 이베른은 정확히 카칸을 알아보았다. 아니 느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카칸의 장점 중 하나를 꼽으라면 거침없이 패도적인 행보다. 사람에 따라선 그것이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한 힘을 가졌기에 그러한 그런 심성은 그를 최고로 만들었다.

‘이놈, 달라진 것이 없구나!’

이베른은 입으로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렇기에 너는 오늘 다시 죽는다!’

이베른은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최상급 마나석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외성 정문을 시작점으로 세 방위에 은신하고 있는 세 마탑주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말 이걸로 되겠소?”

페로스 공작이 다가와 숨을 죽였다.

“제아무리 7서클 흑마법사라고 해도,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확신에 찬 이베른의 목소리에 페로스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왕궁 외성 정문과 내성으로 통하는 정문 사이에 잔디가 깔려 있는 광장이었다.

네 명의 7서클 마탑주가 꼬박 하루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진이 잔디로 이뤄진 광장 아래 숨겨져 있었다.

페로스 공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베른의 손에 들린 최상급 마나석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제각각 자리를 잡고 숨어 있는 마탑주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들도 저마다 최상급 마나석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마법진인지는 몰라도 마탑주들은 충분히 카칸을 잡아둘 거라 호언장담했다.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등 뒤로 돌렸다.

네 명의 소드마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전장에서 자신과 함께 급히 왕궁으로 귀환한 알베르 후작, 살바토레 백작, 쿳시 백작. 그리고 왕실 근위기사단장이자 소드마스터인 켈리안 후작까지.

‘반드시 죽인다!’

고개를 주억거린 페로스 공작이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콰광!

그때 정문이 붉은 화염에 휩싸이며 부서졌다.

페로스 공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억세게 말아 쥐었다.

화염 속으로 그림자들이 황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때다!”

이베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콰과과광!

중첩시킨 파이어볼 마법에 테누타 왕궁의 외성 정문은 힘없이 무너졌다. 마현과 흑풍대는 화염을 헤치며 빠르게 외성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마현과 흑풍대는 외성의 정문을 넘어 잔디가 깔린 광장에 내려섰다.

“이때다!”

그때였다.

짧은 외침이 들려옴과 동시에 급격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순간 마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나의 흐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자의 목소리, 바로 이베른의 목소리였다.

후우우우웅―

난데없이 대기가 요동치며 뒤끓는 용암이 폭발하듯 엄청난 마나가 그들을 뒤덮었다.

“귀납대법을 펼쳐라, 어…… 쿨럭! 서!”

마현의 명에 흑풍대의 신형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미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그들이 사라진 잔디 위로 붉은 핏물이 번져 있었다.

“커헉!”

마현은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마나속박마법진이 펼쳐진 것이다.

마나속박마법진은 단순히 마법사의 마법을 차단하기 위해 외부의 마나를 동결시키는 마나동결마법진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상위 마법진이었다.

마나속박마법진은 외부의 마나뿐만 아니라 사람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나까지도 동결시켜 버리는 무서운 마법진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광장에는 마나속박마법진과 함께 또 하나의 마법진이 복합적으로 펼쳐졌다. 그것은 바로 어둠과 상극이자, 어둠의 힘을 억누르는 빛의 마법진이었다.

그 두 마법진으로 인해 마현의 몸 안의 마나가 동결되고, 또 동결된 어둠의 마나는 빛의 힘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강제로 마나가 부서지니 마현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휩싸인 것이다.

“카, 카칸 경, 크윽!”

월코트 자작과 그의 기사단이 멋모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가 마나속박마법진에 휘말려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기사들이었다.

비록 몸 안의 마나가 굳어지며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그 이상의 타격은 받지 않았다.

“무, 물러나…… 크윽! 라!”

월코트 자작이 힘겹게 내뱉은 명령에 기사들은 비틀거리며 마법진에서 벗어났다.

“지긋지긋한 악연이로구나!”

그때 은신해 있던 네 명의 마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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