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18화
파삭!
그리고는 왼손을 들어 목에 채워진 마나속박 아티팩트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러자 몸 안에 강제로 잠들어 있던 마나가 다시 활성화되며 전신에 힘이 돌았다. 하지만 그 마나를 담는 그릇인 몸이 엉망이라서 그런지 마나는 그다지 큰 힘을 주지는 못했다.
왕귀진은 그런 그의 몸을 잠시 쳐다본 후 몸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몸을 추스를 시간을 줄 수 없소.”
“걱정하지 마시오.”
월코트 자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횃불이 간신히 어둠을 밝히고 있는 음습한 감옥 통로로 나왔다.
“로드!”
“자작님!”
그의 기사들 역시 엇비슷한 시간에 자유를 찾은 것인지 통로로 나와 있거나 감옥 안에서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소. 이 시각 이후로 낙오자는 버리겠소.”
왕귀진이 얼굴이 핼쑥한 기사들을 둘러보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든 따라오라는 뜻이다.
그가 바란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세옥.”
“예, 대주.”
왕귀진은 고개를 돌려 검세옥을 불렀다.
“너는 후미를 맡는다.”
“알겠습니다.”
“고맙소.”
월코트 자작이 왕귀진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낙오자는 버리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자신과 수하들은 그들의 행보를 따라가기에도 벅찰 것이다. 아마 검을 들어봐야 큰 보탬이 안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검세옥을 후미에 붙여준 것이다.
무뚝뚝했지만 자신들에 대한 배려가 마음에 가득 와 닿은 것이다.
“낙오자는 버리겠소.”
왕귀진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뜻을 힘주어 밝히고는 몸을 돌렸다.
* * *
내성 정문은 평소보다 몇 배나 달하는 병력이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외성이 무너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쏴아아아―
폭우도 이런 폭우가 없었다.
얼마나 빗발이 굵고 거센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시야가 흐려질 정도였다.
“날씨도 지랄맞군.”
경비를 서고 있는 한 기사가 툴툴거렸다.
비록 머리 위에 비를 막을 커다란 차양이 세워져 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있으나마나할 정도로 기사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바람이 거센 탓에 차양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게 말이야. 비가 와서 그런지 더 음침하게 보이는군.”
동료 기사는 고개를 돌려 폐허가 된 외성을 쳐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쉿, 그러다가 치도곤 당할라.”
함께 경비를 서고 있는 동료 기사가 재빨리 입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어차피 이런 폭우면 어지간한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괜찮아.”
기사는 뭘 그리 걱정을 사서하냐는 듯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슬쩍 내성 경비초소에 마치 석상처럼 오연하게 서 있는 기사단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미 적군은 모두 사로잡혀 있잖아.”
기사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동료 기사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렸다.
“그러고 보니 슬슬 처형할 시간이 되었겠지?”
동료 기사는 굵어질 대로 굵어진 빗줄기를 보며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응?”
“뭔데?”
기사의 반응에 동료 기사가 매섭게 눈빛을 번뜩였다.
“저기 뭔가 보이지 않아?”
동료 기사는 기사의 손가락을 따라 폐허가 된 외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장막과도 같은 굵은 빗방울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뭔가 움직인 거 같은데…….”
기사의 말에 동료 기사는 더욱 눈에 힘을 주고 전면을 주시했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있기는 뭐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투덜거리는 동료 기사의 눈에도 뭔가 흐릿한 것이 보였다. 그래서 눈에 더 신경을 집중했을 때였다.
빗줄기 사이로 녹색 안광이 둥실둥실 떠 있었다.
“히익!”
서서히 다가온 녹색 안광의 주인은 다름 아닌 검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 다크나이트였다.
―캬아아아!
다크나이트의 입이 벌어지며 기괴한 괴음이 빗줄기를 뚫고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기사는 떨리는 손으로 목에 걸린 피리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힘껏 바람을 불어넣었다.
쐐애애액!
하지만 다크나이트의 검이 먼저였다.
서걱!
기사의 머리는 피리를 입에 문 채 질퍽한 진흙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 마물이 나…….”
석상처럼 얼어붙은 동료 기사는 입을 쩍 벌린 채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동료를 죽인 녹색 안광을 가진 다크나이트 뒤로 수십 개의 녹색 안광이 거센 빗줄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저벅.
빗물에 질척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그의 귀를 가득 채웠다.
―크하아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수십 기의 다크나이트의 흉광과 마기에 몸이 얼어붙은 기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물이 나타났다! 마물이…… 컥!”
목청껏 소리를 지르던 기사의 몸이 반으로 토막 나 흙탕물에 나뒹굴었다.
삐이익!
기사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기력을 짜내 소리를 지른 덕분인지 호각 소리가 폭우를 뚫고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자 내성 주위는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나이트들은 여전히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내성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백 기의 다크나이트는 어둠과 비에 몸을 숨긴 채 내성 정문을 장악해 들어갔다.
* * *
대전과 비슬라바 국왕의 침실 사이에 위치한 아담한 규모의 방. 그곳은 특별한 이름이 붙은 방은 아니었지만 비슬라바 국왕이 두 공작과 주로 국정에 대해 논의하는 밀실로 사용되곤 했다.
오늘도 비슬라바 국왕은 그 밀실에서 두 공작과 자리하고 있었다.
“과해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전하.”
사라마구 공작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 명의 마탑주가 요구한 대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기 때문이다.
“그 일은 됐네. 많이 과하다고는 하지만 왕국의 명운과 맞바꿀 수는 없지 않나?”
사석이라서 그런지 비슬라바 국왕은 좀 더 편안한 어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월코트 자작이라고 했나?”
“그렇지 않아도 막 사람을 보냈습니다. 왕국에서 그들의 흔적은 모두 지워질 것입니다.”
“실수 없이 처리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비슬라바 국왕의 말에 사라마구 공작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페로스 공작.”
비슬라바 국왕은 고개를 돌려 이번엔 페로스 공작을 쳐다보았다.
“전장의 상황은 어떤가? 많이 안 좋지?”
“일단 현 전선은 유지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피해가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서 이 방에서 나서면 즉시 전장으로 향할까 하옵니다.”
“하지만 전선을 뒤집는 건 힘들겠지?”
비슬라바 국왕은 페로스 공작과 사라마구 공작, 둘 모두를 쳐다보며 의견을 물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미천한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하멘 평원이라…… 속이 쓰리군.”
비슬라바 국왕은 주름이 잡힌 미간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페로스 공작, 힘들겠지만 사력을 다해 하멘 평원의 일부라도 되찾게. 그래야 하멘 평원을 협상안으로 휴전을 할 수 있으니까.”
비슬라바 국왕은 하멘 평원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러한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던지 페로스 공작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훗날 다시 찾아오면 되는 게야.”
그렇게 말하는 비슬라바 국왕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이 전쟁에서 테누타 왕국의 손해는 사실상 막대했다.
“……알겠나이다, 전하.”
페로스 공작은 힘겹게 복명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콰당!
그 순간 밀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왕실 근위기사단장인 켈리안 후작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사라마구 공작은 언짢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그 수가 족히 백은 되어 보이는 마물들이 왕궁을 습격했사옵니다. 어서 대피를 하셔야 하옵니다.”
“마, 마물?”
너무 놀라 사라마구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물이라니! 마물이라니…… 소상하게 말해보게.”
“다크나이트이옵니다.”
“다크나이트?”
비슬라바 국왕과 두 공작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죽지 않은 것인가?”
페로스 공작은 카칸의 시신을 찾지 못한 점을 떠올렸다. 네 마탑주가 워낙 강력한 마법으로 인해 시신조차 남아나지 못했을 거라 장담하기에 그런가 보다 했었다.
“모르겠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하옵니다. 곧 다크나이트들이…….”
콰과광!
폭음이 터졌다.
“으아악!”
“크아아악!”
공포에 질려 죽어가며 내지르는 단발마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에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어서!”
마음이 다급해지자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심상치 않은 공기와 점점 가까워지는 처절한 비명 소리에 비슬라바 국왕과 두 공작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은 전하의 침소 쪽으로 길을 뚫어라.”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이 함께 온 두 명의 가사에게 명을 내리자 두 기사는 비슬라바 국왕과 두 공작을 지나쳐 반대쪽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두 기사가 비슬라바 국왕의 침실로 막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서걱, 푸학!
이질적인 소리와 함께 붉은 핏방울이 밀실 쪽으로 흩뿌려졌다. 그중 피 몇 방울이 비슬라바 국왕의 얼굴에 떨어졌다.
우지끈 콰당탕탕!
이어 대전의 문이 부서지며 녹색 흉광을 번뜩이는 다크나이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크하아아!
한 무더기의 다크나이트가 침실에서 밀실 쪽을 바라보며 흉성을 터트렸다.
“도대체…….”
비슬라바 국왕은 침실까지 들어온 다크나이트들을 보며 중얼거린 것이 아니었다.
바로 침실에서 이미 몇 개의 고깃덩이로 변한 두 기사의 시신을 밟으며 마기를 뿜어내는 다크나이트 몇 기를 향해 중얼거린 것이었다.
챙!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서슴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페로스 공작도 검을 뽑았다.
“하압!”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비슬라바 국왕의 침실로 몸을 날렸다.
후우우웅!
검에 한순간 오러가 맺혔다.
오러가 담긴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의 검이 다크나이트의 몸을 가르려는 순간, 그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바로 철용이었다.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의 품으로 순식간에 파고든 철용은 그의 팔을 옆으로 밀치며 강력한 내력을 면장에 담아 가슴을 후려쳤다.
파방!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의 가슴에서 육중한 파음이 터졌고, 그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
쿠당탕탕탕!
탁자와 함께 나뒹굴던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서둘러 검을 지팡이로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내 한 모금의 검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