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19화
“쿨럭!”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여전히 철용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다시 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내부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눈에 띄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네놈은 누…… 쿨럭! 구냐?”
말하는 도중에 다시금 검은 피를 토해냈지만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힘겹게 걸음을 내딛으며 비슬라바 국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벅 저벅 저벅!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의 뒤에서 들려왔다.
침실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다크나이트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흑풍대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너, 너희들은……!”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이를 악물고 왕귀진을 노려보았다.
“항복하라! 죽이지는 않겠다.”
왕귀진의 말에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검을 잡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게 뭔가?”
비슬라바 국왕이었다.
“테누타 왕국의 항복.”
“트로켄 왕국의 승리!”
왕귀진의 말을 월코트 자작이 이어 받았다.
“너, 너는?”
페로스 공작은 월코트 자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무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 수는……. 전하, 소신이 어떻게든…….”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비슬라바 국왕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저지했던 것이다.
“됐다. 짐은 자네까지 잃고 싶진 않아.”
“저, 전하! 쿨럭!”
감정이 격앙돼서일까. 결국 켈리안 근위기사단장은 또다시 피를 토하고는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 *
“가이진 경. 어찌 말리시오?”
비슬라바 국왕과 두 공작을 밀실에 가둬둔 채 잠시 대전으로 나온 월코트 자작이 왕귀진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주군의 복수는 우리 손으로 할 것이오. 그러니 네 마탑주에 대한 처리 문제는 거론치 마시오.”
이런 일은 왕귀진보다 철용이 제격이었다.
그렇기에 철용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오나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
월코트 자작의 말에 철용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는 짓이오.”
월코트 자작이 아무리 기사 가문 출신의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정치판을 굴러본 귀족이었다.
철용이 말하는 바를 곧 알아들었다.
어찌어찌하여 테누타 왕국이 규정을 어긴 것을 시인한다고 해도 네 마탑주가 끝끝내 부인하면 끝이다. 다른 왕국들 역시 알고도 모른척할 것이다. 이 일을 들먹여 훗날 마탑에 도움을 받으려면 빚으로 남겨두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월코트 자작은 울분이 커지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대의 마음만 받겠소. 감사하오.”
철용은 진심을 담아 포권을 취했다.
“이 순간부터 그 일은 잊어주시오. 지금부터 마탑과의 전쟁은 우리 일이오.”
철용의 눈에서는 차가운 살기가 폭사되었다.
* * *
최약소국으로서의 불이익이 컸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갈구했던 승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켄 왕국 중앙지휘실의 분위기는 허공에 납덩이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카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버드런트 공작을 비롯해 지휘관들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 비록 카칸은 용병이지만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 험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모두가 비관적으로 본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신들에게, 아니 조국 트로켄 왕국에 안겨주었다.
바람 앞에 힘없이 나풀거리는 촛불과도 같은 왕국의 운명을 지켜준 이가 바로 카칸이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카칸의 죽음을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제대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 한 번 나눠보지 못했지만.
하지만 그들의 그런 비통함이 케이슨보다 더할까?
케이슨은 큰 충격에 비틀거리며 중앙지휘군막을 나섰다.
“단장, 주군은 언제 온답디까?”
막사로 돌아오자 제이든이 물었다.
그 물음에 케이슨은 대답하지 못했다.
울분에 찬 한숨도 내쉬지 않았다.
그저 고개 들어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단장?”
제이든은 불길함에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재차 거듭된 물음이 슬픔을 절제하던 마음의 둑을 무너뜨린 것일까? 케이슨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뭐, 뭐야? 왜 그래?”
제이든은 애써 불길함을 떨쳐내려는 듯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럴수록 케이슨의 뺨은 눈물로 얼룩져갔다.
“아이, 씨팔! 단장!”
제이든은 케이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주군은? 주군은? 왜 대답을 안 해?”
제이든은 케이슨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다.
케이슨은 힘없이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그의 우격다짐에 휘둘릴 뿐이었다.
“정신 차려, 제이든!”
그레오가 다가와 제이든을 뒤에서 꽉 안았다.
“놔 봐! 놔 보라고!”
제이든은 그런 그레오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레오는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케이슨 단장.”
“……케이슨.”
자브라와 아이작이 케이슨에게로 다가왔다.
“끄으……, 끄으으.”
케이슨의 입술 사이로 꾹꾹 눌러 참았던 슬픔이 결국 흘러나왔다.
청명한 하늘에 석양이 깔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 긴 시간 동안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군막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적막감만 흐르고 있었다.
“사실일 리가 없잖아!”
제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다들 말이 없어! 사실일 리가 없잖아! 사실일 리가!”
“닥치지 못해?”
결국 아이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이든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죽기를 바란 것이야? 그래 네놈은 주군의 죽…….”
“이 새끼!”
아이작은 제이든의 빈정거림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쿠당탕탕!
제이든은 뒤로 날아가 침상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만해요, 아이작. 제이든도 그만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이든은 그레오가 막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아이작은 자브라가 막았다.
“그만해요, 아이작. 제이든도…….”
“알아, 안다고.”
“…….”
자브라는 조용히 아이작의 얼굴을 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렇게 아이작은 자브라의 품에서 숨죽여 울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어울리지 않게 몸을 떨어가며.
자브라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모두가 울었다.
어떤 이는 소리 내어, 어떤 이는 소리 죽여.
모두가 울었다.
* * *
“뭐라고?”
이베른은 수석마법사의 보고에 낯을 찡그렸다.
“테누타 왕국이 패전? 수도가 함락?”
“그렇습니다, 마탑주님.”
“그 외에 다른 말은 없더냐?”
“없는 듯 보입니다.”
이베른은 손을 휘저으며 그만 물러가라는 뜻을 밝혔다. 수석마법사가 나가고 이베른은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떻게 된 일이지?”
테누타 왕국이 패전할 리가 없다.
더욱이 왕궁이 함락되고 비슬라바 국왕이 볼모가 되어 치욕적인 패배를 자인했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테누타 왕국의 수도에 있었으니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카칸은 죽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트로켄 왕국의 기사들 모두 사로잡았다.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테누타 왕국 측과 트로켄 왕국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니 더 이상 알 길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직접 마탑을 이용해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아직까지는 다른 시선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칸을 죽이고 오랜만에 시원하게 두 발을 뻗고 잤었다. 그런데 조금 전 수석마법사의 보고를 듣자 이젠 사라졌다고 느낀 찜찜함이 다시 살아나는 듯싶었다.
* * *
횃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
통로 끝에는 굳게 닫힌 석문 네 개가 짝을 지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지 통로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즐비하게 쳐져 있었다.
크그극, 콰광!
영원히 굳게 닫혀 있을 것만 같은 석문이 우르르 몸부림치더니 실금이 쩍쩍 만들어졌다. 그리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부서져 내렸다.
하나의 문이 아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네 개의 석문이 동시에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그 안에서 어둠마저 꿰뚫는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안광이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통로를 가득 메웠던 마기도 사라졌다.
“태양이 보고 싶군.”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바로 흑권의 것이었다.
“시원한 바람도 곁들이고 싶군요.”
흑검이었다.
“…….”
흑창은 조용히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부서진 석문을 밟고 통로로 나왔다.
“크크크크! 기다려라, 아이작!”
흑사신이 장장 1년 6개월 동안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가자, 주군이 계신 곳으로.”
* * *
카스텔로 연방국 빌더 시외.
시끌벅적한 소규모 번화가로 흑사신이 들어섰다.
“아 그러지 말고……. 딱! 딱 한 잔만 하고 가자니까요.”
흑도가 흑권 옆에 철썩 달라붙어 검지를 치켜세우며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일단은 주군 먼저 뵙는 게 먼저다, 흑도.”
“아 글쎄, 누가 주군을 보지 말자고 했습니까? 그냥 주군 만나기 전에 가볍게! 가볍게 딱 한 잔만 하고 가자니까요. 어차피 주군 만나면 한동안 술 구경하기도 힘들 텐데.”
흑도는 흑권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의 눈앞으로 바짝 세운 검지를 들이밀었다.
“아 진짜! 나 안 가! 못 가! 술 한 잔 먹을 때까지 못 가! 안 가!”
흑도가 마차와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철퍼덕 주저앉아서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훗.”
그 모습에 흑권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오랫동안 폐관수련을 한다고 답답했을 법도 하니 그럼 가볍게 한 잔 하고 갈까?”
결국 흑도의 투정 어린 생떼를 이기지 못한 흑권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흑검과 흑창을 쳐다보았다.
흑창 역시 술이 당겼던지 고개를 끄덕였고, 흑검은 흑도를 노려보며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흑권의 말에 흑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진짜죠? 진짜? 한 입 가지고 두말하기 없깁니다.”
흑도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근처 주점을 겸하고 있는 식당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훤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안은 제법 붐볐다.
그래도 아주 사람이 꽉 찬 것은 아니었기에 금방 넓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