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
8화
“잠시 모두 물러나라.”
흑권의 명에 아그논과 덩컨, 바드는 뒤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흑권은 마기을 일으켜 왕귀진의 명문혈을 통해 흘려보냈다.
초조하다 못해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약 1시간쯤 지나자 거뭇하던 왕귀진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귀진이 눈을 떴다.
“끄으으……, 우웩!”
왕귀진은 잠시 신음을 흘리더니 검은 피를 한 바가지나 토했다. 기혈을 잠식하고 있던 사혈이었다.
“후우.”
그때서야 흑권이 그의 명문혈에서 손을 떼며 나직하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나며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소매로 훔쳤다.
“괜, 괜찮으십니까?”
아그논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흑권의 경고가 있어서인지 왕귀진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물을 뿐이었다.
“어르신!”
왕귀진은 주변에서 호법을 서고 있던 흑사신을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완쾌된 것이 아니다. 무리하지 말거라.”
“이 은혜를 어떻게…….”
“은혜라 생각한다면 어서 몸을 추스른 후 주군의 복수만을 생각하여라.”
마현이 떠올라서일까. 왕귀진은 울분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그에게 아그논과 덩컨, 바드가 다가섰다.
“괜찮소. 다른 이들은?”
“일단 몸을 피해 있으라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왕귀진의 목소리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장소를 옮겨야겠구나. 긴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어라. 바람 식당이라고 했느냐?”
왕귀진은 아직까지 기혈이 온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심신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렇기에 흑권이 일부러 둘 사이의 말을 끊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가자.”
“뭐 해? 업지 않고.”
흑도가 덩치가 좋은 덩컨의 등을 팡 쳤다.
“예, 예. 알겠습니다.”
* * *
용병 길드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제법 인파가 붐비는 도로변에 위치한 아담한 규모의 바람 식당.
철용은 뒷골목에 은밀히 몸을 숨기고 바람 식당 정문을 쳐다보았다.
“푸른 등이군.”
바람 식당 정문 위에는 푸른 등이 걸려 있었다.
밀러의 말에 철용은 고개를 끄덕인 후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바로 바람 식당 뒤편, 뒤채가 있는 담벼락이었다.
쿵 쿵쿵 쿵 쿵쿵!
담벼락 한 모퉁이에 선 철용은 돌로 만들어진 벽을 주먹으로 박자를 맞춰 두들겼다.
쿵쿵쿵!
그러자 안에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철용은 주위를 힐끗 살핀 후 다시 박자를 맞춰 벽을 두들겼다.
스륵!
그때 담벼락에서 작은 구멍이 만들어지며 한 쌍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바로 케이슨이었다.
후웅!
옅은 마나의 파장과 함께 담벼락 일부분이 문처럼 열렸다. 철용과 밀러는 그 문을 통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철용과 밀러가 들어서자 케이슨은 밖을 유심히 살핀 후 안에 빼곡하게 그려진 마법진 일부를 건드려 다시 담벼락을 복원시켰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오.”
케이슨은 안도감을 내보였다.
“꼬리를 끊느라 조금 늦었을 뿐이오.”
철용의 대답에 케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모였소이까?”
철용의 질문에 케이슨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흑풍대주에겐 연락이 없습니다.”
“대주께서?”
철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탑이 통합되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게 들었소.”
“여섯 개의 마탑이 전부 통합된 것이오?”
“그건 아닌 것 같소. 일단 바람, 로쉴드 마탑은 네이폴 마탑주와 그의 직계 제자들이 몰살당하면서 와해된 것 같다고 하오. 그래서 그들은 통합된 마탑에서는 배재가 된 듯하고, 또 한 군데 대장장이 샤토 마탑 역시 마탑 간의 알력 관계에서 밀려난 지 오래라 그곳 역시 배재가 되었을 거라 하오.”
그 설명을 듣자 철용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촤아아악!
그때였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방어 마법진이 찢어졌다.
“누구냐!”
그 소리에 케이슨과 철용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바스타드소드와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또한 밀러도 마력을 끌어올리며 허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잠깐!”
허공에 떠 있는 몇몇 그림자의 얼굴을 확인한 철용이 서둘러 손을 들어 케이슨과 밀러를 제지했다.
“오랜만이구려.”
“아!”
흑권을 본 케이슨은 목례를 취하며 바스타드소드를 검집에 넣었다.
흑권에 이어 세 흑사신이 나타났고, 그 뒤를 따라 왕귀진을 비롯해 아그논과 덩컨, 바드가 속속 뒤채 마당으로 내려섰다.
콰당!
그때 별채 문이 벌컥 열리며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흑풍대원들이 일제히 기세를 풍기며 우르르 뛰어 내려왔다. 마법진이 갈라지는 기운을 그들도 느낀 모양이었다.
“일단 대주를 안으로 모시게.”
흑권의 말에 철용은 덩컨과 바드의 어깨에 몸을 의지한 채 힘겹게 서 있는 왕귀진을 뒤늦게 발견했다.
“대, 대주!”
철용이 놀란 얼굴로 왕귀진에게 다가서자 흑풍대원이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들을 둘러쌌다.
“이거 면목이 서지 않는군.”
왕귀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지, 듀락의 탑이 습격했습니다.”
아그논이 왕귀진을 대신해 대답해 주었다.
안면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전장에서 서로 얼굴을 익힌 바 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둘은 짧게 눈인사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세한 상황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지요. 어서 대주를 안으로 모셔라.”
철용의 명에 흑풍대원 둘이 왕귀진을 부축했고 흑풍대와 아그논 일행이 먼저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별채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흑사신과 케이슨 용병기사단만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 이쁜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정적을 깨트린 것은 바로 반가움이 절절하게 묻어난 흑도의 목소리였다. 흑도의 목소리가 향한 곳에는 자브라가 서 있었다.
흑도는 헤픈 웃음을 지으며 자브라에게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이야!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는데. 어때? 오늘밤 단둘이…….”
“단둘이 뭐?”
당연히 자브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면서 뭘 물어.”
흑도는 팔꿈치로 자브라의 어깨를 툭 치며 몸을 꽈배기처럼 베베 꼬았다.
“응응.”
그리고는 콧소리로 흘리며 반달 눈웃음을 지었다.
빠직!
만약 이맛살에 핏줄이 돋아나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소리가 났을 것이다.
“본좌가 기가 막힌 밤을…….”
이어진 흑도의 말에 자브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아이작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큭큭큭!”
흑도는 득의에 찬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작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한판 붙어볼까?”
그리고는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뭐, 뭐야?”
아이작이 미간을 좁히며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겁나냐?”
흑도는 껄렁한 목소리로 아이작을 한껏 자극했다.
그러자 아이작은 손을 뻗어 자브라를 등 뒤로 끌어당기며 투핸드소드의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진짜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구나!”
아이작은 투핸드소드를 살짝 빼며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흐흐흐흐!”
흑도의 기도가 한순간 바뀌었다.
그 기운에 눌린 아이작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흑도는 아이작에게 다가가 검집에서 조금 빠져나온 검을 왼손으로 지그시 눌러 밀어 넣고는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큭!”
순간 아이작의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
‘자식, 겁먹었군.’
흑도는 자신의 엄청난 기세에 아이작이 위축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흑도의 착각이었다.
오랜만에 본 자브라 앞에서 피를 보기 싫은 흑도는 그 정도면 아이작이 꼬리를 말 것이라 여겼다. 만약 보통 전장에서나 시비 끝에 싸움이 벌어졌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흑도는 검집을 잡고 있는 아이작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나고 있음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홀로 착각 속에 빠진 흑도가 그새 아이작을 잊어버리고 자브라를 향해 헤픈 눈웃음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릉―
그때 아이작의 투핸드소드가 반쯤 뽑혔다.
“갈!”
흑도는 아이작을 향해 마후(魔吼)를 터트렸다.
“컥!”
그 지독한 음공에 아이작은 짧게 몸을 바르르 떤 후 그대로 허물어졌다.
“짜식! 어디서 까불어!”
흑도는 손바닥을 탁탁 털더니 양손을 마주 꼭 잡으며 다시 자브라를 향해 방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이쁜이, 오늘밤에…….”
“감히! 감히!”
자브라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자브라가 성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노려보자 흑도는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너 이 새끼, 죽여 버릴 테다!”
오뉴월에나 내린다는 서릿발과도 같은 여인의 원독 가득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러 퍼졌다.
부웅!
자브라는 성큼 다가와 흑도의 낭심을 향해 발을 걷어 차올렸다.
‘어? 이게 아닌데!’
느릿한 정지화면처럼 세상이 멈췄다.
‘왜 갑자기 레이디 자브라가…….’
갑자기 흑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자신의 중요한! 낭심으로 날아오는 자브라의 발부터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것이니까.
흑도는 한쪽 무릎을 꺾으며 자브라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고인 자브라의 눈망울이 보였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런데 왠지 막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막아야 하는데.’
흑도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퍽!
이윽고 자브라의 발이 흑도의 낭심에 꽂혔다.
“컥!”
흑도의 눈이 뒤집혔다.
이어 들려온 자브라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
“자기야!”
‘젠장! 막을 걸!’
흑도는 울분을 삼키며 그대로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 * *
언제나 활기로 넘치는 빌더 시 남쪽 용병들의 거리.
왁자지껄한 활기가 흐르던 용병들의 거리에 통합 마탑 소속 조화, 스플린의 탑 차석 마법사 갈리오와 그 휘하 연구 마법사 셋이 들어서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한순간 조용해졌다.
활기를 대신해 들어선 건 오로지 싸늘한 시선.
그 이유는 단 하나.
어제 대지, 듀락의 탑의 기습에 늑대왕 용병대가 반수 가깝게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기분 나쁘군.”
용병들의 적의에 찬 눈빛에 갈리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갈리오 님.”
휘하 연구 마법사 한 명이 갈리오의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노골적으로 반감 어린 시선을 보내는 용병들의 눈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