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
15화
바닥에서 쓰러져 꿈틀거리던 카뮈가 갑자기 철용의 등에 올라타며 목을 꽉 물었다.
“컥!”
철용은 귀찮다는 듯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 짧은 순간 허점이 드러났다.
케이디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네티는 블리자드의 방향을 철용 쪽으로 바꿨다.
쏴아아―
철용은 급히 카뮈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사크스를 향해 다시 롱소드를 들어 올렸지만 무섭게 날아오는 블리자드를 감지하자 무작정 휘두를 수 없었다. 눈앞의 위험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철용은 하는 수 없이 롱소드를 들어 블리자드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순간 블리자드는 부드러운 춘풍처럼 바뀌며 사크스의 몸을 휘감아 마나동결 마법이 펼쳐진 옥상 밖으로 끌어와 버린 것이다.
“부마탑주님!”
카네티는 허공으로 떠오른 사크스의 몸을 염력 마법으로 부드럽게 안았다.
“크윽!”
그 모습을 보자마자 케이디는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무리하게 마나동결 마법을 시전한 여파로 탈진하고 만 것이다.
“젠장!”
왕귀진과 철용의 입에서 안타까운 침음이 터져 나왔을 때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사크스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져 내렸다.
“꺼억!”
그 그림자는 사크스의 목 줄기를 틀어쥐었다.
* * *
“차라리 나를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마이런은 부서진 서클이 있는 가슴을 틀어쥔 채 절규했다.
“가라. 이베른에게로. 그리고 전해라, 내가 다시 왔다고.”
마현은 오열하고 있는 마이런에게서 몸을 돌렸다.
“주군, 나머지 졸개들은 어떻게 할까요?”
흑권이었다.
대로 한 중앙에 70여 명의 마탑 마법사들이 오들오들 떨며 모여 있었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주변에 싸늘한 육신이 된 채 방치되어 있는 30여 명의 마탑 마법사들의 시신들을 내려다보았다.
“목숨만은 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소리에 마현이 고개를 돌렸다.
“알고 보면 그들도 불쌍한 이들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장장이, 샤토 마탑을 상징하는 망치가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대장장이, 샤토 마탑주 게오르게였다.
“누구지?”
“대장장이, 샤토 마탑의 마탑주 자리를 맡고 있는 게오르게라고 합니다.”
게오르게는 예의를 갖춰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마현의 눈동자는 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대장장이, 샤토 마탑.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와 마현이 가장 먼저 죽인 마탑주의 마탑이기도 했다.
체스와프 마탑주가 죽은 후 마탑의 허울만 유지한 채 다른 마탑의 하부 마탑으로 전락해가는 곳이었다.
다른 마탑주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마탑주가 된 게오르게. 그런 그가 대장장이, 샤토 마탑을 통합 마탑의 소속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마탑으로 소개한 것이다.
그 짧은 소개를 듣고 마현은 그가 무엇을 꿈꾸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간파했다.
“반란을 꿈꾸는군.”
마현은 피식 웃음을 머금으며 시선을 게오르게에게서 흑권에게 옮겼다.
“모두 점혈로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금제를 가하라.”
게오르게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마탑 마법사들을 모두 죽일 생각은 없었다. 지금껏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굳이 장기판의 말 신세인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모두 죽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마현의 명에 게오르게는 자신의 뜻이 조금이라도 전해졌다고 느꼈다. 그는 마현 앞으로 걸어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원하는 게 뭐지?”
“대장장이, 샤토 마탑의 자유를 찾아주십시오.”
담담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게오르게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밑바닥을 제대로 경험한 모양이군.”
냉랭한 말에 게오르게는 그저 마현의 발아래 더욱 낮게 몸을 낮출 뿐이었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마탑의 마탑주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모자라 부복할 정도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제껏 모든 것을 모른 척 외면하다가 뒤늦게 상황이 변하자 합류하려고 하는 기회적인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마현의 질문에 게오르게는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현의 질문이 더 아프게 그의 가슴을 후벼 판 것이다.
“힘없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생존방식이라고……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게오르게는 더욱 깊게 몸을 낮췄다.
“좋아, 그리 해주면 내게 무얼 주겠나?”
“드릴 수 있는 건 ……제 목숨 하나뿐입니다.”
결의에 찬 목소리.
게오르게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그 한 마디만큼은 마현의 마음에 들었다.
“좋아, 자유를 주지. 조건이 있다.”
마현의 말에 게오르게는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마탑을 해체하라.”
“……?”
게오르게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었다.
“나는 하르센 대륙에서 모든 마탑을 해체할 것이다. 권력을 탐하지 않는, 누구라도 평등하게 마법을 접할 수 있는 순수한 마법계를 만들 것이다.”
마현의 그런 생각은 과거 하르센 대륙에서 활동할 때와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특히나 마탑주들의 복수행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권력, 그 탐욕의 집요함과 무서움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생각했던 흑탑의 건립 계획을 완전히 생각에서 지웠다.
물론 어딘가에 흑탑을 세운다면 누구에게도 좌우되지 않을 마법사들과 용병들만의 세상을 한동안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마현 스스로도 권력에 잡아먹히지 않을 거라 자신 있게 장담할 수도 없다.
흑탑을 만들면 하나의 기구가 될 것이고, 거기에서 권력이 파생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흑탑을 만들어 권력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아무리 공평하게 일을 처리한다 해도, 훗날 언젠가는 다른 이에게 흑탑주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그 후임이, 아니면 좀 더 세월이 흘러 그 후대의 흑탑주가 탐욕을 부린다면 지금과 같은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기에 마현은 모든 권력이 나오는 마탑 자체를 아예 없앨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 목숨 버렸습니다.”
게오르게로서는 이미 이베른의 통합 마탑에 등을 돌렸기에 별다른 대안도 없었다.
장차 마현이 무얼 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윤곽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생각했던 미래와는 많이 달랐지만 마현의 말처럼만 이뤄진다면 대장장이, 샤토 마탑의 제자들의 미래가 지금처럼 암울하지만은 않을 듯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게오르게가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콰과과과광!
게오르게 등 뒤쪽으로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무섭게 치솟아 올랐다.
수 초 후.
콰르르르르!
그 폭발의 여파로 마현이 서 있는 대로와 주변 건물들이 가볍게 흔들렸다.
“통합 마탑의 사크스 부마탑주가 이끄는 마탑 마법사들이 십좌왕과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암습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뭐, 뭐라?”
마현도 긴장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나의 파장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흑풍대에는 마탑 마법사들을 상대할 마법사가 없다는 점이 마현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그들을 믿지만 마탑 마법사들을 상대하려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일단 저희 마탑 제자들을 급히 보냈지만 통합 마탑 마법사들을 상대로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고맙다.”
“……?”
마현의 감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오르게의 눈앞에서 마현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낄낄낄.”
깜짝 놀라는 게오르게의 표정을 보며 밀러는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도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게오르게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 자리에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금제를 당해 땅바닥에 뒹굴며 신음하는 마탑의 마법사들 외에는. 게오르게가 서둘러 격전장으로 이동하려 할 때 힘겨운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마이런의 뒷모습이 보였다.
* * *
“부마탑주님,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
염력 마법으로 빼낸 사크스를 카네티가 재빨리 부축하며 다급히 외칠 때, 한 사내가 뚝 떨어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허공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 사크스 앞으로 성큼 다가와 목을 틀어쥐었다.
“컥!”
그는 바로 마현이었다.
“주군!”
왕귀진과 철용은 마현의 등장에 두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죽었다고 믿었던 마현이 갑자기 나타나자 그들은 반가움에 말문이 막혔다.
“카, 카칸?”
카네티는 과거 먼발치에서 마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마현을 본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그 다음 그의 머릿속에서 퍼뜩 떠오른 것은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은 곧바로 실행으로 이어졌다.
“빛의 힘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카네티는 식은땀을 흘리며 텔레포테이션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그때 카네티의 눈과 마현의 눈이 마주쳤다.
카네티의 눈에 마현의 차가운 미소가 들어왔다.
지금 마현이 공격해 들어온다면 꼼짝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카네티는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가운데에도 모든 힘을 쥐어짜 힘겹게 캐스팅을 맞췄다.
『전하라, 지금 간다고!』
마현의 싸늘한 전음이 카네티의 뇌리를 때렸다.
카네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그의 몸 주위로 빛 무리가 피어올랐다.
“텔레포테이션!”
곧 밝은 빛 무리와 함께 카네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훗!”
마현은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주군. 왜 그자를…….”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흑권이 충분히 카네티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놓아 주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렸다.”
마현은 피로 얼룩진 용병들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컥컥!”
마현은 숨이 막혀 발버둥치는 사크스를 여전히 혈전을 벌이고 있는 용병들의 거리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쳤다.
쾅!
사크스의 몸은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허공으로 1미터가량 튀어 올랐다.
“크악!”
그 충격으로 사크스의 입에서 비명과 함께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콰직!
마현은 그런 사크스의 가슴을 발로 밟아 함몰시켰다.
사크스의 눈이 부릅떠졌고, 이내 그의 몸은 차가운 바닥에 축 늘어졌다.
“싸움은 끝났다!”
마현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부, 부마탑주님!”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 간악한…….”
한 마탑 마법사가 마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런 그의 앞을 흑도가 가로막았다.
서걱!
흑도의 도가 마법사의 허리를 갈랐다.
푸학―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그의 몸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