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32화>
"드르렁."
뒷좌석에 앉은 미하일이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다.
"헛! 미안."
마찬가지로 보조석에서 졸다가 고개를 번쩍 든 무로이가 사과를 건넸다.
종혁은 푸근히 웃었다.
"피곤하면 자요. 난 괜찮으니까."
"아니야. 그러면 안 되지. 예의가 아니잖아."
그냥 여행을 가더라도 예의가 아닌데, 지금은 미행을 하는 중이다.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미하일이 나쁜 거였다.
양 볼을 치며 잠을 쫒던 무로이는 얼굴에 피로 한 점 없이 운전하는 종혁을 존경스럽다는 듯 봤다.
벌써 6일째.
지리가 익숙하지 않은 자신들을 대신해 종혁이 운전대를 잡은 시간이었다.
"정말 괜찮아? 지금이라도 바꿀까?"
종혁은 피식 웃었다.
"됐습니다. 차선이 반대인 나라에서 온 양반이 뭘 하겠다고."
"끄응."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자요."
이는 진심이다. 미행을 할 때 모두 깨어 있으면 오히려 안 좋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누군가는 체력을 비축하고 있어야 하는 거다. 갑작스런 상황이 생기면 곧바로 대처할 수 있게.
물론 지금 상황에선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거의 없지만, 원만한 형사 생활을 하려면 기본으로 가져야 할 개념이다.
‘그리고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무슨.’
미행을 눈치챈 조폭들이 진로를 막을 염려도 없고, 뽕쟁이들이 차로 들이받을 위험도 없다. 또한 갑자기 추격전을 벌일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다.
게다가 지금 타고 있는 차는 고가의 외제차다. 다 낡은 승용차를 끌고 미행을 다니던 시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 수준이었다.
시트 쿠션이 맛이 가서 생리 활동을 참는 것보다 허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던 시절과 비교하면 말이다.
그래도 좀 심심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좀 다른 곳에 가 주려나.’
그동안 집, 한방병원, 경마장만 왔다 갔다 한 정천우.
일관성이 있다면 참 일관성이 있는 놈이었다.
-치익! 여기는 1호차.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1호차인 검은색 승합차를 모는 권순호의 무전.
‘좌회전?’
종혁의 눈이 반짝이고, 무로이가 엉덩이를 들썩인다. 어느새 깬 미하일도 무전기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드디어 놈이 평소와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종혁은 냉큼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2호차. 따라붙겠습니다. 뒤로 빠질 준비해 주세요."
-치익. 수신.
곧 따라 붙은 종혁은 7미터 앞에서 나아가는 정천우의 외제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달리던 정천우의 차는 압구정의 한 2층 고급 주택 앞에 섰고, 잠시 후 봄처녀처럼 하늘하늘 원피스를 입은 효정이 나왔다.
‘하.’
종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쪽, 저리 쪽 하는 둘.
한 쪽은 아내를 죽이려는 살인마고, 다른 쪽은 그런 그와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가 집 앞에서 난리블루스를 춘다.
그리고 2층 거실 창문에 선 중년 여성은 그런 둘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목이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이년놈들 봐라?’
까드득! 까드득!
"……시끄러워요, 쿄 형."
"넌 아무렇지도 않아?!"
종혁은 무로이를 봤다. 딱딱하게 굳어 있지만, 활활 타오르는 종혁의 눈을 본 무로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에 종혁도 눈에 힘을 풀며 입을 열었다.
"쿄 형, 범인을 쫒는 형사는 절대 감정에 휩쓸리면 안 돼요."
형사가 감정에 휩쓸려 행동하면 사건을 망칠 수 있다. 그래서 검거 직전까지 형사는 감정을 눌러야 한다.
죽이고 싶어도, 수갑을 채우고 죽여야 한다.
그게 형사다.
실제로 감정에 휩쓸려 사건을 망치는 초임 형사들을 제법 봐 온 종혁은 단호히 말했고, 무언가 깨닫는 부분이 생긴 무로이와 미하일은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칙! 출발한다. 우리가 따라붙을게.
1호차에는 권순호뿐만 아니라 지원 요청을 받은 특수범죄수사과 형사들이 타고 있었다.
살인미수는 확실하고, 여차하면 살인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사건이다. 종혁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도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예. 저도 곧 출발 하겠습니다."
이내 곧 다시 미행을 시작한 종혁은 정천우와 이효정이 도착한 곳을 보곤 피식 웃었다.
"이 씹새들이 영화를 볼 줄도 아네."
목적지가 경기도의 자동차극장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무로이와 미하일은 그런 종혁을 보며 어이없어 했다.
‘뭐? 왜?’
베테랑 형사는 이래도 됐다. 감정에 휩쓸린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까.
햇병아리인 둘과는 레벨이 달랐다.
그래도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종혁은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타악!
차문을 닫으며 내린 이효정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죽고 못 살던 둘이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싸운 게 분명했다.
‘왜?’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단 기회란 생각이 떠올랐다.
종혁은 얼른 차에서 내렸다.
* * *
‘……또 여기야?’
정천우의 차가 서울의 빌딩 숲을 벗어나다 못해 먼 곳의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싱글벙글했던 이효정의 표정이 해가 어스름히 저무는 오후,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다 결국 몇 번 와 봤던 자동차극장에 도착하자 부글부글 끓던 화가 결국 폭발했다.
"천우 씨…… 음?"
이효정은 스윽 내밀어지는 초대장 같은 봉투에 의아해했다.
"만날 이런 곳만 데려와서 미안해요. 그러니 다음 주 저녁은 좋은 곳에서 보내요."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도 기대하는 표정.
일단 화를 누른 이효정은 봉투 속 내용물을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꺅!’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참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레스토랑의 식사권과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 숙박권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이걸 힘들게 준비했을 정천우의 정성이 더 크게 다가왔다.
"……치이. 알긴 아나 보네요."
"당연히 알죠. 그래서 언제나 이렇게 불만 없이 따라와 주는 효정 씨가 고맙고요."
정천우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누가 봐요……."
"차 안에 있는데 보긴 누가 본다고. 그리고 보면 어때요? 내가 내 여자 어깨 주물러 주는 건데?"
꿈틀 입술이 흔들린 그녀의 화가 사르르 녹는다.
거기다 애인의 어깨를 진지하게 주무르는 내 남자의 얼굴.
‘……그 여자는 이런 걸 받아 보기라도 했을까?’
묘한 성취감과 함께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 충족감이 들었다.
"이만하면 됐어요. 저 팝콘 사 올게요."
"아니, 그건 제가……"
"어허. 운전하느라 힘든 사람은 스톱."
정천우의 볼에 입을 맞춘 그녀는 차문을 열었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던 정천우는 그런 이효정을 사랑스럽다는 듯 봤다.
그런데.
탁!
문이 닫히자 이효정의 표정이 굳는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비밀 데이트를 해야 되는 거야?’
레스토랑 식사권은 식사권이고, 이건 이거다.
언제나 자동차 안에서만 하는 데이트.
그 흔한 가로수길 데이트나 영화관 데이트는 해 본 적이 없고, 해수욕장은 꿈도 못 꾼다.
혹여 그런 곳에 가도 호텔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차나 호텔을 벗어난다면, 어디 멀리에 있는 산에 등산을 갈 때나 어디 외진 곳에서 이름 모를 풀들을 볼 때뿐이다.
"짜증 나."
그녀는 혹여 정천우가 이 표정을 볼까 고개를 돌리며 매점으로 향했다.
"어머. 또 오셨네요? 남자친구가 너무 다정한 거 아니에요? 만날 여기까지 데려와 주고?"
순간 표정이 굳었던 효정은 옆에 선 덩치 큰 사내를 힐끗 보곤 애써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팝콘이랑 버터오징어 주세요! 콜라도 두개!"
"네!"
잠시 후 여전이 웃는 낯으로 팝콘 등을 건네받으며 돌아선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진짜 짜증 나. 내가 이런 델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그녀는 성큼성큼 차를 향해 걸었고, 핫바를 입에 물며 돌아선 덩치 큰 사내, 종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라?"
왜인지 모르겠지만 여길 원해서 따라온 게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이런 곳이 아니라 이런 데이트가 싫은 거다.
‘자동차극장. 차 안. ……비밀 데이트?’
수많은 불륜 커플이 하는 비밀 데이트다.
떳떳하지 못해 결코 사람 많은 곳을 갈 수 없는 불륜 커플이 하는 비밀 데이트를 정천우와 이효정도 하는 거다.
"……오호라."
뭔가 답이 보일 것 같았다.
이 심심한 미행을 끝낼 답이.
‘이거 잘만 자극하면?’
종혁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여기 있습니다! 어휴, 많아라. 감사합니다!"
종혁은 정말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커다란 봉투 꾸러미 두 개를 내미는 40대 여성을 봤다.
그러자 순간 재밌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장님을 뵐 수 있을까요?"
"……네?"
종혁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향해 씩 웃어줬다.
* * *
영화는 몇 달 전 개봉했던 외국의 로맨스 영화였다.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하면 정천우와 이효정도 서로 키스를 했고,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몸을 탐닉하면 그들도 서로의 속살을 만졌다.
선팅을 짙게 한 것도 모자라 저녁이라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차. 둘은 거침없었다.
그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그들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네요.
차 라디오에서 달콤한 발라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을 비추던 스크린에서 예쁜 분홍색의 벚꽃이 점점 피어난다.
뭔가를 직감한 이효정의 표정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가 프러포즈 하나 보네요."
움찔!
"그, 그러게요."
정천우가 당황하는 이유를 알아차린 효정은 피식 웃으며 스크린을 봤다. 솔직히 얼른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정천우가 이런 걸 보고 배우길 바라서다.
"기대할게요, 천우 씨."
"……걱정 마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프러포즈를 해 줄 테니까."
열의로 타오르는 내 남자의 눈에 잔뜩 기대감을 머금었던 이효정은 이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노래가 끝나서가 아니다. 벚꽃이나 사랑과 애정이 가득했던 영상이 끝나서도 아니다.
-사랑한다, 박효정! 결혼하자!
"……."
이효정은 정천우의 손등을 덮었던 자신의 손을 빼냈고, 정천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빵빵!
-워후우!
-멋지다-!
주위에서 온갖 환호성이 쏟아지지만 둘은 웃을 수 없었다.
딱 이름 한 글자 차이.
‘빌어먹을! 하필이면!’
힐끗 이효정의 얼굴을 살핀 정천우는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겨우 삼켜야 했다.
"……가요."
"네."
침묵이 내려앉은 둘의 차는 그렇게 자동차극장을 빠져나갔다.
부우웅!
주위에 아무것도 없기에 더 크게 들리는 배기음.
곧 서울에 접어들며 온갖 소음이 그들을 두드렸지만, 침묵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부르릉!
"……천우 씨."
정천우는 집 앞에 도착하자 결국 침묵을 깨는 그녀의 부름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는데, 눈치가 빠른 효정은 그걸 캐치했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타앙!
문을 거칠게 닫으며 차에서 내린 효정은 여느 때보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날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 거머리도, 애들도 제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해 줘요."
움찔!
영우와 희설.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순간 떠올랐지만, 떠오른 속도만큼 지워지는 속도도 빨랐다.
‘미안하지만 아빠도 아빠 인생 좀 살자!’
정천우는 효정을 지긋이 보며 웃어 주었다.
"……걱정 말아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결혼식, 결혼 생활을 하게 해 줄 테니까."
빤히 정천우를 보던 이효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고, 집으로 들어가는 효정을 빤히 응시하던 정천우는 이내 한숨과 함께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세우며 핸드폰을 들었다.
"난데. 그 쥐약 성능 좋은 거 맞아? 죽지를 않잖아, 죽지를!"
-아니, 그럼 끈끈이를 쓰든가요!
철물점을 이어받은 고등학교 후배.
만약을 대비하여 쥐약을 구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도움을 준 후배였다.
"몰라! 아무튼 더 센 걸로 준비해 놔! 알았지?!"
전화를 끊은 그는 불을 켜며 담배를 찾았다.
찰칵, 치익!
내려지는 창문 사이로 희뿌연 담배 연기가 빠져나간다.
"하아. 이희선 이 거머리 같은 년. 이 쥐약으로는 꼭 죽어라. 진짜 제발 죽어서 내 앞길 막지 마!"
뿌드득! 뿌득!
이를 갈던 그는 다 핀 담배를 던지며 차를 출발시켰고.
계획대로 된 듯 정천우가 온갖 짜증과 분노를 터트렸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던 이효정의 차갑던 얼굴.
무로이와 미하일은 감탄을 하며 종혁을 봤다.
영화가 끝날 때 나온 프러포즈 영상.
그것을 만든 게 종혁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극장을 빌린 것도 모자라 1시간 만에 프러포즈영상을 만들어 상영시켰다.
‘고작 저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많은 돈을…….’
고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다.
그 시선을 받은 종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김 감독님에게 감사해야겠네.’
1시간 만에 그런 영상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모두 인연을 맺은 김영진 감독이 그런 이벤트 영상 제작자를 소개시켜 줘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종혁은 무전기를 들었다.
"자, 그럼 마지막 단계로 넘어갑시다!"
* * *
띵동!
청소를 하던 이희선이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네, 나가요! 누구…… 응?"
흠칫!
경찰 두 명이 이쪽을 보고 있다.
"당신은?"
그중 한 명은 남편의 차 유리창이 깨졌을 때 봤던 경찰, 종혁이다.
종혁은 거수경례를 했다.
"아, 쉬시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요새 이 동네에 자동차를 파손하고 도망치는 범죄자들이 있어서 그런데 협조를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자신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 때문에 오른 보험료 탓에 얼마나 속이 쓰렸던가.
"그런 거라면 도와 드려야죠! 그런데 제가 뭘 도와 드릴 수 있을지……."
"혹시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을 보여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그렇지 않아도 마침 오늘 아침 누가 자신들의 차 바로 뒤에 주차한 뒤 연락조차 되지 않아서 주차장에 남아있는 상태다.
삑! 딸깍!
열린 차문 안으로 몸을 집어넣어 능숙하게 블랙박스를 분리한 종혁은 가져온 노트북과 연결했다.
"금방 확인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전 저기 있을게요."
그렇게 그녀가 잠시 옆으로 비켜선 사이, 진호와 형사들은 블랙박스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희선 이 거머리 같은 년. 이 쥐약으로는 꼭 죽어라. 진짜 제발 죽어서 내 앞길 막지 마!
움찔!
찾았다.
증거를 확보했다. 명백한 살해 의도를 가진 용의자, 아니 피의자의 살인 예고를.
그토록 바라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왤까.
"뿌드드득!"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슬프고, 머리가 녹아 버릴 것처럼 화가 솟는다.
종혁은 애써 이희선을 봤다.
그리고 겨우 입을 떼서 그녀를 불렀다.
"사모님, 잠시 이것 좀 확인해 주시겠어요?"
"……네?"
"이쪽으로."
의아해하며 다가온 그녀는 이내 재생되는 화면에, 그리고 그 음성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그 거머리도, 애들도 제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해 줘요.
-……걱정 말아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결혼식, 결혼 생활을 하게 해 줄 테니까.
-이희선 이 거머리 같은 년. 이 쥐약으로는 꼭 죽어라. 진짜 제발 죽어서 내 앞길 막지 마!
종혁과 권순호는 망연자실 모니터를 보는 그녀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올 게 왔구나. 어쩌지?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왜 몰랐겠는가.
6년 동안 살을 부대끼며 살았는데 왜…….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결혼해 여러 가지를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아이들과 그녀 본인을 향한 남편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도 남편을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런데도 외면한 이유는.
필사적으로 직장 동료겠거니, 사촌이겠거니 외면한 이유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영우와 희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둘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뎠다.
남편을 떠볼 생각도, 알아볼 생각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명백한 증거가 들이밀어지자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 어떻게 해야 하죠? 저 어떻게 해야 되요?!"
현실을 외면하며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그녀의 정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패닉에 빠지고,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종혁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정천우 씨는 바로 체포될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체, 체포요?"
이희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아이들이 떠올랐다.
아빠가 교도소에 가면 아빠를 찾지 않을까.
나중에 아빠 없는 아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진 않을까.
그때, 종혁이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진짜 아이들을 위한 게 어떤 걸까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시잖아요."
그 순간 방금 전 들었던 블랙박스의 대화 내용이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애들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여자의 말.
그러겠다는 남편의 대답.
그리고 아내도 나타나지 않게 할 거라며 쥐약을 먹인 남편.
"……어머니."
어머니.
그 단어가 가진 힘이 그녀를 혼란과 절망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생기를 잃었던 그녀의 눈빛이 결연한 의지로 채워졌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강한 의지로 단단하게 굳은 눈빛.
그 눈빛을 확인한 종혁은 조금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지옥에 가자, 이 악마 새끼야!’
종혁은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