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안젤리카. 좀 더 침대에서 쉬는 게 좋겠다.”
크로셀이 비틀거리는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동안 나는 나무토막처럼 긴장한 채로 숨도 못 쉬고 굳어 있었다. 걱정이 많은 시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안젤리카 님, 왜 그러세요? 안젤리카 님의 아바마마이신 걸요. 더 어리광을 부리셔도 좋아요.”
“으, 으, 응, 나, 나나, 나나나도 이제 다 컸으니까 어리광은 졸업할 때가 됐지.”
“어머, 안젤리카 님도 참…….”
시녀가 감격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마.왕.꾸>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백 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고르고 골라 흑막 크로셀의 딸로 빙의하다니, 내 빙의자 라이프 왜 이렇게 가시밭길이람!
흑막이라도 하나뿐인 자기 딸은 예뻐하지 않겠느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이제야 기억났다. 안젤리카 데네브, 크로셀의 딸은 내가 크로셀 데네브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금화 벌이용으로 만든 캐릭터였다.
크로셀은 안젤리카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옆 나라의 소공작과 약혼시킨다. 정략결혼이라고는 하나 나이대도 비슷하겠다,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평범하게 자기 딸을 좋은 상대와 약혼시키면 최악의 흑막 캐릭터가 아니잖아!
약혼식은 그저 옆 나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약혼식이 한창 치러지는 사이, 크로셀은 약혼식 장소를 통째로 폭파했다.
안젤리카와 약혼자는 그대로 사망. 크로셀은 약혼 상대인 소공작이 들고 있던 금화와 아이템을 뺏었다.
“…….”
실행범은 크로셀이지만, 크로셀을 조종하여 악행을 저지르게 한 사람은 플레이어인 나. 즉…….
‘다 나 때문이구나…….’
그치만 공략 사이트에 그렇게 나와 있었단 말야. 히든 엔딩을 보려면 딸 캐릭터를 죽여서 악명을 높이라고.
돈을 위해 딸을 죽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 소공작의 물건을 꿀꺽 삼키는 졸렬함. 모두 엔딩을 위해 필수 불가결의 요소였다.
안젤리카의 능력치가 엉망진창인 이유도 이제 알겠다. 쉽게 죽이고 확실하게 돈과 아이템을 챙기기 위해 캐릭터를 최대한 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HP는 시스템상 최저치인 10으로 설정했다.
그런 졸렬 플레이를 한 결과, 나는 HP 10짜리에다가 죽을 운명인 흑막의 딸이 되었다.
‘이것이 업보란 걸까…….’
“……안젤리카.”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크로셀이 부드럽게 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대답했다.
“네, 네네네, 네, 네네!”
최종 흑막의 앞에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잠시만 기다리렴. 연고를 발라 주마.”
파란 눈동자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속에서 한 가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가만. 이 크로셀이 꼭 내가 한 게임 플레이 속 캐릭터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나는 크로셀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한 캐릭터로 설정했었다. 도덕, 양심, 자비는 바닥을 쳤고 잔혹함과 냉정함은 최대치를 찍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크로셀은 겉으로 보기에 무척 다정했다. 내 상처에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 주는 모습은 조금도 사악해 보이지 않는다.
‘후우, 그래. 그 게임 플레이 속 크로셀과는 달라. 쫄지 말자.’
그때, 연고 통의 뚜껑을 닫으며 크로셀이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오늘은 이웃 나라에서 편지가 왔단다. 아들을 우리 안젤리카와 약혼시키고 싶다고 하는구나.”
“……히끅.”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나왔다. 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취소, 취소, 취소!
다르기는 무슨. 역시 크로셀은 사악한 흑막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약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 좀 봐!
“안심하렴. 제안은 거절했으니까.”
“왜…… 왜요?”
“안젤리카는 아직 아빠 곁에 있을 나이야. 게다가 우리 안젤리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어.”
아하.
약혼 제안 상대의 소지금이 마음에 차지 않으셨나 보군요. 하긴 악행 플레이로 돈을 많이 뜯어내기 위해서는 더 돈이 많은 혼처를 찾아야겠지요.
그게 내가 열네 살 때 한, 이웃 리어 왕국의 소공작 세이르와 한 약혼이다. 소공작은 S급 성검 소지자인 데다가 돈도 많았으니까.
“……휴우.”
내게 푹 쉬라고 말한 다음, 크로셀과 시녀가 방을 떠났다. 그제야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상태창을 향해 중얼중얼 기도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악행 플레이를 하지 않겠습니다. 착하게 게임할게요. 게임의 신님, 이런 버그 망겜 만든 게임사, 아무튼 누구든 간에……. 반성할 테니까 돌려보내 주세요!”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플레이 데이터를 로딩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나 상태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환영 그만 보여 주고 집에 보내 줘! 앞으로 세끼 꼬박꼬박 먹고, 운동도 하고, 여덟 시간 이상 숙면하면서 규칙적으로 게임할게요!”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플레이 데이터를 로딩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러니까 버그 망겜이지!”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플레이 데이터를 로딩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김×× 불러 와!”
하다 하다 <마.왕.꾸>의 성공에 들떠 요식업 등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싹 말아먹고, <마.왕.꾸2>를 개발한다며 언플만 하다가 결국 도산한 게임사 사장까지 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시스템과 무익한 싸움을 반복하다가 내린 결론은 한 가지였다.
당장 게임에서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돌아간다고 해도 심장 마비로 쓰러진 채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죽겠지.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흑막의 손에 의해 약혼식에서 죽는 운명이다.
으, 그건 싫다.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겠다.
* * *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게임에 빙의했건, HP 10의 비실비실한 열 살짜리 꼬맹이가 되었건, 어쨌건 살고 싶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세운 계획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숨죽이고 조용히 살다가 약혼식 전에 도망친다.
약혼식은 왕국 바깥에 있는 신전에서 치러지니까 도망칠 틈이 있을 테다. 나는 <마.왕.꾸> 지식이 있으니 망명하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는 있다.
두 번째, 크로셀 데네브에게 잘 보인다.
왕국 경영 능력을 증명해서, 나를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게 하는 작전이다. 잘되면 최고지만 첫 번째 계획보다 위험 부담이 크다.
‘역시, 첫 번째가 쉽겠지.’
크로셀 데네브는 눈이 높다.
성에 차지 않는 부하는 가차 없이 잘라 내는 성미다. 상대가 딸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여기서 튀는 쪽이 생존 확률이 높을 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문 너머에서 시녀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방문을 열었다.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안전하게 이곳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도망의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돈, 도주로, 보안이다.
즉, 돈을 모아서, 도망칠 루트를 확보한 뒤, 아무도 모르게 움직여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확보하기 위해 나는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왕성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분명 어딘가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있을 거야. 그걸 찾자.’
왕성의 보물 창고를 발견하면 대박이고, 아니면 자투리 물건이라도 좋다. 미술품은 무거운 데다 환금성이 나쁘니까 별로고, 가능하면 보석이나 금화로.
그런데 복도를 걷던 나는 곧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이 왕성, 어제 얼추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난해 보이는데?’
창문의 유리가 싸구려인지 흐리고 탁했다. 장식품이 거의 없는 복도는 허전했으며, 카펫은 낡은 티가 났다. 창밖 풍경도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안젤리카가 열 살이니 아직 초반이기는 하지만……. 왕성이 왜 이렇게 자그마하지?
내가 정성 들여 키운 암흑 기사단과 마물 군대는 어딜 간 거야?
“흐음…….”
나는 곧장 시스템에 접속해 [데네브 왕국 종합 정보] 메뉴를 열었다.
[<데네브 왕국 종합 정보>
왕국 레벨 : ???
자금 : ???
호화도 : ???
종합 평가 : ???
……(로딩 중)]
이 망할 버그 망겜은 여전히 로딩 중이라 모든 정보가 ‘???’로 떴다. 이렇게 로딩이 오래 걸릴 일인가.
“으으으음…….”
정보값이라고는 없는 상태창을 보며 머리를 감싸는 그때, 복도 반대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기둥 뒤에 몸을 숨긴 다음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 크로셀 데네브다.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어떤 중년 남자와 함께였다. 중년 남자가 크로셀에게 뭐라 뭐라 열렬히 설명하고 있었다.
‘살짝만 엿들어 볼까?’
크로셀 데네브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내 머릿속을 더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인물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는 계속 다정하고 상냥한 아빠처럼 행동했다.
모두 나를 훗날 금화 벌이용으로 쓰고 버리기 위한 연기겠지만, 연기가 너무 능숙해서 <마.왕.꾸>에 대해서 잘 아는 나조차도 헷갈릴 정도였다.
어쩌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본성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이 남자의 본성을 정확히 알아내면, 살아남기 위한 두 가지 계획 중 무엇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있을 테다.
‘아니면,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살금살금…….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응접실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턱에 살이 넉넉하게 붙은 중년 남자가 가방에서 꺼낸 어떤 물건을 크로셀에게 내밀었다.
“이걸 봐 주십시오. 고대 왕국의 희귀한 기념 금화입니다. 아주 어렵게 입수했는데, 크로셀 님께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오오……! 이렇게 귀한 것을 구해 오다니. 고맙네.”
‘흐음……? 어쩐지 촉이 안 좋은데.’
나는 상인이 손에 든 금화를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찌푸렸다. 저게 기념 금화라고? 말도 안 된다, 저건…….
“딱 하나뿐인 물건입니다. 단돈 천 골드에 드리겠습니다.”
‘뭐, 뭐어?!’
헉,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상인의 머리 위로 상태창이 떴다.
[이름 : 마크
직위 : 방문 상인(E)
레벨 : 6
특성 : 악덕 상인(E), 사기꾼(F)]
정말 알기 쉽게 사기꾼이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