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 *
그대로 며칠이 흘렀다.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나는 은근슬쩍 크로셀을 피했다. 이유는 물론 무서웠기 때문이다.
‘흑막의 비밀을 캐려다 열네 살의 약혼식이 다가오기도 전에 죽으면 어떡해!’
크로셀은 묘한 미소만 지을 뿐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안젤리카가 이상해졌다거나 어린애답지 않다거나 하는 의심을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후훗, 내 열 살 어린애 연기가 완벽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방에서 이 버그 망겜의 시스템과 씨름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여전히 시스템이 로딩 중이라 상당수의 항목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로딩만 하고 있을 생각일까. 이런 끔찍한 망겜을 만든 회사는 망해야 한다.
‘맞다, 벌써 망했지.’
남는 시간에는 계속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서 왕성 안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값나가는 물건은 전부 철저하게 숨겼는지 아무리 돌아다녀도 보석 한 알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돈세탁하는 폼이 장난이 아니더라니.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장소에 보물 창고를 만들어서 재산을 감춘 것이 분명했다.
아. 최대한 크로셀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내 머리카락을 묶어 주겠다며 내 방을 들렀다.
“괘, 괜찮아요. 나도 다 컸는걸요.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러니? 안젤리카는 아빠의 도움이 필요 없나 보구나.”
“으, 으으…….”
크로셀이 빗과 거울을 들고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 청순가련한 외모가 문제다. 왜 게임 설정과 어울리지 않는 저런 외모를 하고 있는 거람? 흑막은 저쪽인데 꼭 내가 나쁜 것 같잖아.
그리고 내가 다 컸다는 말에 당장 나를 약혼시키려고 하면 어떡해?! 아직 보물 창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단 말야.
“……조, 좋아요! 아빠, 나 머리 묶어 주세요!”
그렇게 매일 본의 아니게 크로셀의 손에 머리카락을 맡기면서 보내다가 맞이한 오늘.
오늘은 왕성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시종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녔다. 왕성을 뽀득뽀득하게 쓸고 닦으며, 낡은 부분은 어설프게나마 가렸다.
내가 창밖으로 시종들이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을 구경하자 시녀, 사라가 말을 걸었다.
“안젤리카 님, 무얼 그리 보고 계세요?”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는 내가 빙의한 첫날 곁에 있던 시녀다. 마음이 무척 여리고 눈물이 많아서, 내가 재채기만 해도 눈이 그렁그렁했다. 그래도 꼼꼼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만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친근한 언니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라에게 크로셀이 사악한 흑막이냐고 에둘러 물어보려다 포기했다.
아무리 친근하다고 해도 그녀는 고용된 입장이다. 자신이 모시는 왕녀가 고용주에 대해 묻는다고 해서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겠지. 갑자기 안젤리카가 이상해졌다고 의심을 사는 것도 곤란했다.
무엇보다도…….
사라의 머리 위로 뜨는 상태창은 이러했다.
[이름 : 사라
직위 : 시녀(E)
소속 : 데네브 왕국
레벨 : 11
특성 : 왕녀의 전속 시녀(E), 상냥한 마음(F)]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냥 상냥한 마음씨를 지닌 시녀 캐릭터일 뿐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며, 아는 것이 목숨을 위협한다. 크로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야 그녀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내가 소공작과 약혼할 때가 되면, 해고하고 외국으로 보내 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을 돌렸다.
“사라, 오늘 무슨 일 있어?”
“아, 오늘은 백작님이 방문하셔서 오찬이 있을 예정이랍니다. 그 준비 때문에 시종들이 바쁜 모양이에요.”
“……백작?”
“네, 이므시 백작님이요. 크로셀 님의 형제분이시랍니다. 안젤리카 님께는 큰아버지가 되고요.”
“나도 참석해야 해?”
“네, 참석하시면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을 수 있어요.”
“으음…….”
내가 고민하는 기색이자 사라는 얼른 고쳐 말했다.
“아. 내키지 않으신다면 참석하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대신 제가 맛있는 점심을 방으로 가져다드릴게요.”
흐음, 크로셀의 형 이므시 백작이라.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당장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게임상 중요한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친형이니까 이 왕국이나 크로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끼리만 알 수 있는 정보도 있겠지. 좋아, 가 보자.
“아니야. 나도 오찬에 갈래!”
“네. 그럼 저랑 같이 얼른 준비할까요?”
어쩐지 아까부터 사라가 안절부절못하더라니, 준비할 시간이 촉박해서 그랬나 보다. 사라는 ‘얼른’에 힘을 주어 발음하면서 재빨리 옷과 장신구 등을 가져왔다.
그래도 지금은 이른 오전이고 오찬은 점심때다. 아직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나?
그런 의문은 바삐 움직이는 사라에게 몸을 내맡기는 동안 눈 녹듯 사라졌다.
“헉, 허억…….”
“자, 다 됐습니다, 안젤리카 님.”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사라가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손을 뗐다. 그리고 커다란 전신 거울을 가지고 와 내 모습을 비춰 주었다.
“어떠신가요? 마음에 드세요?”
사라는 내게 하늘색 드레스를 입히고 귀여운 구두를 신겼다. 머리 모양은 아침에 크로셀이 묶어 준 그대로였지만 구슬이 달린 화려한 머리 장식을 추가했다. 그밖에도 이것저것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미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안젤리카 님, 너무 귀여우세요!”
사라가 자신의 작품에 감격하는 예술가의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앙증맞은 어린아이용 손가방까지 내게 쥐여 주었다.
“역시 안젤리카 님에게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정말 사랑스러워요!”
거울 속의 모습은 내가 봐도 엄청나게 귀여웠다. 드레스가 예쁘면서도 어린아이의 몸에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렇지만 이거…….
“……과하지 않아?”
나는 레이스와 비단 리본, 프릴로 이루어진 덩어리 같은 상태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짝이지 않는 곳이 없다.
연회도 아니고 그냥 큰아버지를 만나는 오찬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을 필요가 있나?
그러나 사라는 어딘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안젤리카 님, 그놈, 아니, 그분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해요! 아아, 사실은 커다란 보석 반지도 끼워 드리고 싶은데……. 식사하실 때 불편하실 테니까 예쁜 목걸이만 걸어 드릴게요.”
“으, 응……?”
방금 ‘그놈’이라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목걸이가 추가되었다. 목 뒤로 조심스럽게 잠금장치를 채워 주면서 사라가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렸다.
“이만하면…… 그 이므시 백작도 우리 왕국을 우습게 보지 않겠지……. 재수 없는 자식 같으니…….”
“……사라?”
“헉! 시, 실례했습니다.”
내 부름에 사라가 화들짝 놀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프로 시녀다운 놀라운 표정 변화였지만 이미 다 들었다. 이므시 백작이라는 작자가 재수 없다 이거네.
‘뭐,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럼 자, 저랑 같이 다이닝 룸으로 가실까요?”
“응!”
나는 사라의 손을 잡고 오찬 장소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나중에 잃어버린 척하면서 보석 단추 몇 개 챙겨야겠다.’
보물 창고를 못 찾았으니 이거라도 모아 둬야지.
* * *
“안젤리카, 어서 오렴.”
“아빠!”
다이닝 룸에 도착하자 크로셀이 나를 맞이했다. 아직 이므시 백작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 딸, 오늘 아주 예쁘게 입었구나.”
“헤헤헤, 사라가 입혀 줬어요.”
며칠 사이에 천진한 딸을 연기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식탁의 구석 자리를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크로셀은 내 행동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안젤리카, 네 자리는 이쪽이란다.”
“저는 그냥 여기 앉고 싶은데…….”
“아빠 옆자리는 싫니?”
크로셀이 처연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꼭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표정이다. 저 표정에다가 대고 한 번만 더 구석 자리에 앉겠다고 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약혼식까지 기다리지 않고 당장 죽일지도 몰라!’
피해망상이라고? 그럴 리가. 내가 플레이한 <마.왕.꾸>의 크로셀 데네브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다. 전생의 내가 저지른 업보가 바로 개연성이다.
“아, 아니요. 아빠 옆자리가 좋아요!”
“그럼 얼른 이쪽으로 오렴. 나도 우리 안젤리카 옆자리가 좋단다.”
“네, 네에…….”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아 이므시 백작과 크로셀이 어떤 사이인지 파악하고 싶었는데 이래서는 글렀다.
나는 마지못해 쭈뼛쭈뼛 다가가 크로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종이 어린아이용으로 가볍고 자그마한 식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종이 문을 열며 이므시 백작의 도착을 알렸다.
“이므시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뚜벅, 뚜벅, 뚜벅. 넓은 식당에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과연 어떤 인물일까? 나는 은근슬쩍 이므시 백작 쪽을 살폈다. 크로셀의 친형이면 그쪽도 상당히 잘생겼…….
……의붓형제인가?
이므시 백작은 놀라울 정도로, 조금도, 요만큼도 크로셀과 닮지 않았다.
터울이 많이 지는지 그는 중년이었는데, 옹졸하고 까탈스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보석 단추와 금실 자수가 달린 옷은 화려하고 비싸 보였지만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이므시 백작이 한껏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크로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