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어머, 안젤리카 님, 벌써 주무신다고요?”
“으, 응. 오늘 밖에서 놀았더니 좀 피곤하네.”
“그러시군요. 푹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먼저, 나는 방으로 돌아온 다음 졸린다는 핑계를 대고 사라를 내보냈다.
결행은 이른 새벽에 하기로 했다.
HP 10짜리 비실비실한 몸으로는 캄캄한 밤에 탈출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동쪽 하늘이 밝아 올 무렵 여기를 나가서 곧장 이웃 나라로 떠날 계획이었다.
“아, 맞다, 사라!”
“네?”
“내일 아침 식사는 필요 없어.”
“어머, 식사를 거르시면 시장하실 텐데요.”
사라는 내 말이 의아한 듯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괜찮아. 오늘 레몬케이크를 많이 먹어서. 그, 배고프면 부를게.”
“네, 꼭 불러 주셔야 해요?”
휴, 이제 내일 오전까지는 나를 찾지 않겠지.
나는 잠시 침대에 누워 자는 척을 했다. 그리고 사라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다음 일어나서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오찬 날 드레스에서 뗀 보석 단추가 몇 알 들어 있었다.
처음 계획보다는 부족한 도주 자금이지만 어쩔 수 없다. 한시라도 지체했다가는 내 목이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진짜 착한 사람일 뿐이었다니, 크로셀 데네브에게는 미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진짜 아빠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힘들겠지만, 내가 성공해서 돌아올 때까지만 잘 버텨 주면 좋겠다.
나는 천 주머니에 보석 단추를 넣은 뒤 옷 안쪽에 잘 꿰어 넣었다. 그리고 화려한 외모를 가리기 위한 망토를 개켜 베개 밑에 넣어 두었다.
다음으로 창가에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커튼 한 장을 뜯어냈다. 가위로 커튼을 잘라 이어 붙이자 아슬아슬하게 1층 바닥에 닿는 길이가 되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남은 것은 실행뿐.
* * *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지만 긴장 때문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새벽이 오길 기다렸다가 계획을 실행했다.
나는 옷 안에 보석 단추가 잘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망토를 걸쳤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망토의 후드 안으로 집어넣어 눈에 띄지 않게끔 했다.
그리고 커튼으로 만든 끈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막상 내려다보니 바닥이 생각보다 멀어서 겁이 났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끈을 꽉 붙잡고 창문을 넘었다.
“으, 으아.”
체력이 약한 탓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목덜미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조심조심 아래를 향했다.
[HP가 1 감소합니다. 현재 HP : 9/10]
뭐?
[HP가 1 감소합니다. 현재 HP : 8/10]
[HP가 1 감소합니다. 현재 HP : 7/10]
애초부터 얼마 되지 않던 HP가 쭉쭉 깎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커튼을 타고 내려가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커튼에 매달린 채 HP가 다 떨어져 죽는 운명만큼은 정말로 사양하고 싶다.
“헉, 허억…….”
[HP가 1 감소합니다. 현재 HP : 2/10]
[HP가 1 감소합니다. 현재 HP : 1/10]
휴, 아슬아슬했다…….
영원히 닿지 않을 것 같던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겨우 발을 디딘 그 순간이었다.
‘……어라?’
의아한 광경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왕성 1층의 어느 방에 크로셀과 상인 마크가 있었다. 크로셀에게 가짜 금화를 판 그 사기꾼 상인 말이다.
사기꾼이 또 여기까지 무슨 볼일이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기둥 뒤에 몸을 바짝 붙이고 창문 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사기꾼은 뻔뻔한 표정으로 손에 든 초록색 돌을 크로셀에게 내밀었다.
“이 선명한 초록빛을 봐 주십시오. 아름답지요? 이것이 바로 고순도의 마력을 정제한 최상급의 마석입니다.”
얼씨구…….
한 번 사기를 쳤으면 됐지, 또 사기를 치려는 거야? 맙소사. 사기꾼 상인은 이번에는 크로셀에게 마석 사기를 치려 들었다.
어이가 없는 광경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초록색 마석은 품질이 나쁘며, 최상급 마석은 푸른빛을 띤다. 그중에서도 크로셀의 눈동자처럼 맑고 선명한 푸른색이 제일 좋다. 초록색 마석을 최상급이랍시고 고가에 팔아 치우는 건 말도 안 되는 바가지다.
왜 흑막이 착해지는 버그를 일으켜 놓고 주위에 사기꾼만 득시글하게 깔아 놓느냔 말이다, 이 버그 망겜아!
가슴이 갑갑했지만 끼어들 수는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도망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진상을 알고 나서 요 며칠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니 크로셀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냥 내가 크로셀이 흑막이라고 믿고 지레 겁을 먹었을 뿐, 그는 나에게 아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매일 딸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묶어 주었고, 딸이 마음에 들어 한 간식을 따로 챙겨 줬으며, 늘 상냥한 말투를 썼다.
이상론일지도 모르겠지만, 착한 사람들을 등쳐 먹는 사기꾼이 나쁜 거지 착한 사람이 나쁜 게 아니잖아.
띠링!
[5분 뒤, 경비병이 이곳을 지나갈 예정입니다.
곧장 떠나지 않으면 퀘스트에 실패합니다.]
아, 안 돼. 도망쳐야 해. 크로셀은 진짜 내 아빠도 아니잖아. 여기서 곧장 떠나는 게 정답이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발이 딱 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어떤 의문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조용히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하지만 기껏 게임에 빙의까지 했는데 이런 사이다는커녕 우유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고구마 세 개쯤 먹은 상황을 참아 넘겨야 할까?
<마.왕.꾸>를 플레이하는 데 수천 시간을 갈아 넣고, 그 까다로운 흑막 엔딩까지 도달한 내가 왕국을 버리고 도망친다고?
내가 도망치고 나면 높은 확률로 데네브 왕국은 망하겠지. 내가 정성 들여 키운 SSS급 왕국이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건 도저히 못 참겠다.
[퀘스트를 포기하겠습니까?]
계속 내가 못 박힌 듯 서 있자 눈앞에 새로운 알림이 나타났다.
‘퀘스트를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데?’
[플레이어 ‘안젤리카 데네브’ 님에게 알맞은 새로운 <시나리오 퀘스트> 진행 루트를 탐색합니다.
※ 주의 : 매우 어려움]
그래? 그렇다면 내 답은 하나다.
[<시나리오 퀘스트> ‘도망은 최선의 생존법’을 포기하시겠습니까?
포기한 퀘스트는 다시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네☜ / 아니오]
드르륵!
나는 상태창을 닫는 동시에 창문을 거세게 열었다.
안에 있던 크로셀과 사기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안젤리카?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멈춰, 이 사기꾼 녀석!”
“뭐……뭡니까?!”
나는 창문을 넘어서 방 안에 착지했다. 머리카락을 가리는 망토는 벗어 버리고, 상인이 손에 든 마석을 가리켰다.
“아빠, 그만두세요. 초록색 마석은 싸구려라고요!”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안젤리카 님! 이건 순도 높은 최고급 마석이 틀림없습니다. 저 마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의심하는 게 아니라, 확신하고 있어요. 그 마석이 최고급 마석이 아니라고.”
“……말도 안 됩니다!”
“초록색 마석이 최고급 마석이라면 공격 마법을 흡수하겠죠? 싸구려라면 튕겨 내고요.”
“큭, 그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듯 상인이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틈을 두지 않고 이어 말했다.
“아빠, 이 마석에 공격 마법을 사용해 보세요. 흡수한다면 이 상인의 말이 맞겠죠. 실패한다면…… 후후.”
삽시간에 상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급 사기꾼이라 그런가? 사기꾼치고는 표정 연기에 자신이 없는 타입인가 보다.
비록 크로셀이 어이없을 정도로 착해졌기는 하나, 레벨 99의 강력한 마왕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의 마법이 스치기만 해도 목숨이 날아가겠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시는군요. 이건 정말로 최상급 마석이 맞습니다. 하지만 별로 마음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어딜 도망치려고?
나는 황급히 마석을 감추려 드는 상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상인은 도망치려다 당황하는 바람에 그만 손으로 내 어깨를 밀었다.
“으아앗!”
철퍼덕!
이 몸의 체력이 워낙 형편없었던 탓에, 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그 순간, 늘 온화하던 크로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