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8)화 (8/133)

8화

상인이 당황하며 내게 손짓했다.

“오, 오버하지 마십쇼. 나는 그냥 살짝 건드린 건데…….”

“……자네, 상인 마크라고 했나?”

크로셀이 가만히 상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껏 들은 적 없는 서늘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거래는 취소하겠다. 당장 나가 주게. 다시 이 왕국에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네.”

“……! 제가 이제껏 크로셀 님의 명대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헉, 안 돼요, 아빠!”

내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아빠 앞을 막아서자 상인은 희망에 찬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크로셀보다 내 쪽이 마음이 약해 보이기라도 했나? 상인은 내가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싹 바꾸고 내게 매달렸다.

“아이고, 자비로우신 안젤리카 왕녀님! 크로셀 님께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네, 맞습니다. 제가 초록색 마석을 비싼 값에 팔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중간 상인에게 속아서 구입했을 뿐입니다. 제 충정을 보시고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

“안젤리카 님!”

“……안젤리카?”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나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새로이 나타난 상태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나리오 퀘스트> 왕국 꾸미기 입문 (1)

도망을 포기하셨군요.

그러나 데네브 왕국은 현재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웃 나라의 공격을 받아 쫄딱 망합니다.

크로셀 데네브를 잘 프로듀스해 왕국을 발전시켜 나갑시다.

남은 시간 : 66일

달성 조건 : 왕국 종합 평가 ‘소박한 왕국(E)’에 도달하기

보상 : 생존, 경험치 100exp, 특성­왕국 꾸미기 초심자(E)

실패 시 : 중상 혹은 사망]

프로듀스? 그게 뭔데?

‘……아하.’

그래, 그렇구나.

나는 고대하던 흑막 엔딩을 보기 직전에 이 세계에 빙의했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다. 엔딩이라도 보고 죽었으면 이렇게 억울한 마음은 들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그때!

그런데 나는 지금 오랫동안 플레이한 게임 속 세계에 있다.

그 말은, 크로셀을 잘 프로듀스해 흑막으로 만들기만 하면 전생에서 보지 못한 흑막 엔딩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SSS급 왕국에 SSS급 기사단, SSS급 보물 창고, 종합 랭킹 SSS인 최고의 왕국!

그 왕국을, 모니터 속이 아닌 내 손으로 이 세계에 직접 만들 수 있다.

‘공략이라면 전부 머릿속에 들어 있어.’

크로셀 데네브를 흑막으로 만들고, 왕국 또한 발전시키는 것이 흑막 엔딩의 조건.

‘그리고 또…….’

<마.왕.꾸>는 후반부로 갈수록 왕국끼리 경쟁이 심화된다. 슬프게도 착하기만 해서는 이웃 나라의 공격에 살아남을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흑막이 되어야 한다.

나는 퀘스트 창을 다시 읽어 보았다.

‘실패 시 : 중상 혹은 사망.’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즉,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지 못하면 높은 확률로 죽는다는 거네.

거기다, 아빠를 이대로 놔뒀다간 사기꾼에게 호구 잡히는 모습을 꾸준히 보며 홧병으로 죽을 거 같다.

결국 오래오래 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

‘아빠를 흑막으로 만든다.’

대신 졸렬 플레이는 때려치우자. 어차피 이제 돈세탁할 돈도 없고, 역시 졸렬함은 아빠한테 어울리지 않는 단어야.

그리하여 내 목표는, 아빠를 ‘멋진 흑막’으로 만드는 것.

마음을 정한 나는 애달픈 표정으로 크로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저 부탁이 있어요.”

상인의 낯이 확 밝아졌다. 내가 상인을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할 줄 알고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반면에 크로셀은 착잡한 기색이었지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그래, 말해 보렴. 우리 착한 안젤리카가 말하는 대로 처분을 내릴 테니.”

“제 말을 따라해 주세요.”

“……말?”

“크흠, 크흠!”

나는 최대한 사악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고 음산하게 깔았다.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크크큭, 용감한 자에게는 상을 주어야지. 나를 농락한 혀, 알량한 수작을 부린 손을 자르는 상은 어떨까.”

<마.왕.꾸>에 나오는 크로셀의 대사 중 하나였다. 엑스트라를 잔인하게 처리할 때 나오는데, 하도 많이 들었더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통째로 외웠다.

“……안젤리카?”

“자, 얼른요.”

크로셀이 재촉에 못 이겨 내 말을 따라 읊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크흠,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안젤리카, 꼭 ‘크크큭’ 하고 웃어야 하니?”

“빨리, 빨리요. 그 ‘크크큭’이 중요 포인트예요. 흑막답게, 음산하게, 잔인하게!”

“크크큭……. 용감한 자에게는 상을 주어야지. 음, 그리고 다음이……. 나를 농락한 혀, 알량한 수작을 부린 손을 자르는……. 안젤리카, 이자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혀와 손을 자르는 건 좋지 않은 생각 같구나.”

“아, 그런가요?”

착한 아빠에게는 너무 난이도 높은 대사였나.

협박을 위해서였을 뿐 진짜로 피를 볼 생각은 없었던 만큼, 나는 얼른 다른 대사를 생각해 내려 했다. 그런데 크로셀이 다시 말했다.

“혀와 손을 자르면 청소가 힘들 것 같구나.”

“으허어엉! 사, 살려 주세요!”

상인이 털썩 쓰러져 울면서 그동안 사기 친 돈을 돌려주겠다며 싹싹 빌었다.

결국 원작 같은 처벌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사기꾼은 처리했다.

후후, 한 건 해결했군.

상인을 추방한 뒤 크로셀이 다정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고맙구나. 안젤리카, 네 덕분에 살았어.”

“뭘요. 아빠한테 아무 일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안젤리카!”

감격한 크로셀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그 포근한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나만 믿으세요, 아빠. 앞으로 제가 멋진 흑막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마.왕.꾸>를 수천 시간 동안 플레이하고 흑막 엔딩에 도달한 슈퍼 플레이어가 바로 나다.

좋아. 끝내주는 흑막 플레이 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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