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방금 발언의 어디에 감동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왕국 포인트가 생긴 건 좋다.
이거라면!
나는 당장 상태창을 열어 왕국 포인트 사용 화면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100포인트를 사용하여 레벨을 2로 올렸다.
[이름 : 안젤리카 데네브 (플레이어)
직위 :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의 왕녀(F)
소속 : 데네브 왕국
나이 : 10세
레벨 : 2
특성 : 우리 아빠 딸(A)
종합 능력치 : F
HP : 20/20 MP : 200/200
공격 : 3 방어 : 3 마법 : 10]
현재의 내 스테이터스는 이렇다. 아주 조금이지만 강해져서 더 오래 호미질을 할 수 있었다.
남은 100 포인트로는 쓸 만한 특성을 구입하면 되겠다. 예를 들어, 마법 특성이 있으면 유사시에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어디 보자…….
[<왕국 포인트 특성 상점>
공격 마법 초심자(F) : 1000
검술 초심자(F) : 2000
치유 마법 초심자(E) : 3000]
…….
…….
흑, 전생에서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는 포인트를 팍팍 썼는데…….
유용한 마법 관련 특성은 F급조차도 너무 비쌌다.
나는 100 포인트로 살 특성을 찾아 상점 페이지를 주르륵 넘겼다. 페이지를 한참이나 뒤로 넘긴 뒤에야 100 포인트로 살 수 있는 특성이 나왔다.
진짜 이거밖에 없나.
‘없네…….’
그리하여 내가 구입한 것은 바로 이 특성이다.
[<특성 : 호미질의 강자(E)>
분류 : 농사
호미로 밭을 갈 때 HP가 소모되지 않습니다. 밭농사를 위한 기초 특성입니다.
가격 : 100 왕국 포인트]
호미질하는 흑막의 외동딸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 단어의 조합이다.
‘빨리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어서 탈농업 해야지……!’
가슴속 깊은 곳에 원대한 야망을 품고 힘차게 호미를 휘둘렀다.
퍽!
됐다. 특성 덕분에 HP가 깎이지 않아, 금방 밭을 완성할 수 있었다.
[생산 시설 ‘조그마한 텃밭(F)’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작물을 심을 수 있습니다.
※ 원 포인트 레슨 : 흙이 마기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적합하지 않은 작물을 심으면 시들어 버립니다.
현재 심은 작물 : 틸라
수확까지 남은 시간 : 14일]
좋아,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라?
띠링! 소리와 함께 새로운 상태창이 떴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 * *
일주일이 흘렀다.
텃밭의 검은 흙 위로 줄기가 삐죽 솟아올랐다. 나는 틸라의 뿌리 부분에 듬뿍 물을 주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좋아, 순조롭게 크고 있구나.”
일주일 동안 나는 정성 들여 텃밭을 가꾸었다. 매일 아침 물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모종이 시들까 봐 세심하게 살폈다. 얼마나 힘들게 만든 밭인데, 당연히 신경 써야지, 암.
오늘도 나는 아침을 다 먹자마자 텃밭에 물을 주러 온 참이었다.
[<사용 중인 생산 시설>
조그마한 텃밭(F)
현재 심은 작물 : 틸라
수확까지 남은 시간 : 7일]
틸라는 순조롭게 자라는 중이었다. 그저 물과 햇빛만으로 이렇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제 일주일 뒤면 틸라를 수확할 수 있다. 그 틸라를 이용해서 밭을 넓히고, 또 키워야지. 위대한 틸라 사업의 한 발짝이랄까.
‘사실은 슬쩍 잎을 뜯어서 마비독도 만들고 싶은데.’
아빠는 내게 텃밭에서 틸라를 키워도 좋다고 허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틸라에 잎이 나면 중화제를 바르는 것. 중화제를 바른 잎으로는 마비독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잎이 나는 족족 시종들이 전부 중화제를 발라 둔 상태였다.
‘재빠르기도 하지.’
중화제를 바르지 않더라도 어차피 아빠의 협력이 없으면 마비독은 못 만든다.
슬프지만, 마비독이라는 존재를 마음 속에서 놓아줘야만 했다.
‘어흐흑…….’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텃밭에 물을 주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젤리카 님, 여기 말씀하신 물건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 케나스.”
케나스는 왕성 요리사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자발적으로 텃밭 관리를 도와주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자꾸만 죽여 달라고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내 참,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자꾸 죽여 달라고 하고 말야. 나처럼 제대로 안 먹고 안 자며 게임하다가 심장 마비로 쓰러져서 게임에 빙의하면 자연스레 목숨의 소중함을 깨달을 텐데.
‘떼잉, 쯔.’
속으로 꼰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케나스가 가져온 물건을 받았다. 물건은 바로 종이와 펜이었다. 나는 종이에 몇 가지 글귀를 쓴 뒤 텃밭의 울타리에 잘 보이게 붙였다.
“케나스, 이거 어때 보여?”
“문구가, 그, 저기.”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그…… 그러니까.”
이런. 내가 케나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을 한 모양이다. 나는 케나스 괴롭히기를 그만두고 텃밭에 마저 물을 주려 했다.
그때, 또 텃밭에 접근하는 인기척이 있었다.
“안젤리카 님, 여기 계셨군요.”
“안젤리카, 이 밭이 안젤리카가 키우는 밭이니?”
바로 아빠와 사라였다.
“아빠, 아직 다 안 자랐어요. 다 자란 다음에 보여 준다고 했는데.”
“하하하, 우리 천사가 밭을 가꾼다니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단다.”
이른 아침의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하며, 긴 속눈썹에 감싸인 하늘보다 푸른 눈, 날카로운 콧대……. 오늘도 아빠는 아름다웠다.
그래, 황금 조각상이며 대리석 분수가 다 무슨 소용이람. 아빠가 여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삭막한 풍경이 아름다운 정원처럼 보이는데.
사악한 흑막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지금은 그래도 괜찮다. 틸라를 키워서 돈을 번 다음, 꼭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방법을 찾고 말 테니까.
아빠는 틸라를 가득 심은 텃밭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멋진 텃밭이구나. 우리 천사는 대견하기도 하지.”
“에헤헤, 감사해요 아빠.”
“아빠도 안젤리카처럼 텃밭을 가꾸어 볼까 봐.”
“네? 그건 안 돼요!”
“……안젤리카?”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이 틸라 텃밭을 가꾸면서 새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텃밭을 가꾸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흙을 뚫고 싹을 틔우는 식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힐링되는 것이다.
평화로움? 힐링? 지금의 아빠가 가장 멀리해야 하는 단어다. 지금도 전혀 흑막답지 않은데, 밭을 가꾸다가 더 착해져 버리면 어떡해!
그러나…….
“그래…… 안젤리카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으아아아!’
아빠는 누가 봐도 낙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고 싶었지 시무룩하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잔뜩 당황해서 속으로 말을 쥐어 짜냈다.
“그게…… 아빠는 텃밭보다는, 그러니까……. 아! 체스! 체스 같은 걸 두는 게 어울려요!”
“이런. 아빠는 체스를 잘 못 둔단다.”
“괜찮아요! 그래도 어울려요!”
“정말이니……?”
나도 체스는 둘 줄 모른다.
하지만 으레 흑막이라면 체스 말을 들고 음흉하게 웃는 법이잖아. 그런 거! 그런 게 흑막에게 어울리는 취미 생활이라고.
여전히 아빠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 다음에 저랑 같이 체스 연습해요!”
“안젤리카만 좋다면 나도 좋단다. 그래, 꼭 같이 연습하자꾸나.”
드디어 아빠가 평소처럼 환하게 웃었다. 에휴, 착한 아빠랑 살기 너무 힘들다.
아빠는 계속해서 텃밭을 구경했다. 그러다 아까 내가 울타리에 붙인 종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젤리카, 저건…… 뭐니?”
“경고문이에요. 열심히 키운 텃밭에 도둑이 들면 안 되니까요!”
“그런 것치곤 굉장히…… 뭐랄까, 자세하구나.”
“그런가요?”
“그래, 꼭 도둑이라도 들길 바라는 것처럼.”
아빠 말이 맞다. 내가 울타리에 써 붙인 글귀는 이렇다.
[<안젤리카의 틸라 텃밭>
최고의 영양 간식! 맛있음!
※ 주의! 절대 도둑질 금지! 아주 귀중함!!!]
[<텃밭 경비 시간>
오전 09:00~12:00
오후 13:00~17:00
※ 경비 시간 외에는 사람 없음!]
누가 봐도 몇 시에 텃밭이 무방비해지는지 알 수 있도록 큰 글씨로 적었다. 그뿐만 아니라, 텃밭의 울타리도 살짝 나사를 풀어 두어 밖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준비를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일주일 전, 텃밭을 완성하자마자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다.
[<히든 퀘스트> 텃밭을 지켜라!
소중한 텃밭을 도둑의 손길에서 지키세요.
루트 1. 도둑을 완벽하게 해치우기
루트 2. 도둑을 관대하게 용서하기]
히든 퀘스트는 예전에 뜬 퀘스트와는 달리 루트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각각의 루트를 선택하자 자세한 설명이 떴다.
[<루트 1. 도둑을 완벽하게 해치우기>
당신은 텃밭을 노리는 도둑을 붙잡아 처벌했습니다.
자비라고는 없는 냉정한 모습!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두려워하지만, 텃밭은 지킬 수 있습니다.
보상 : 희귀 아이템]
[<루트 2. 도둑을 관대하게 용서하기>
당신은 텃밭을 노리는 도둑을 용서했습니다.
상냥하고 자비로운 마음씨!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텃밭에는 계속 도둑이 들어, 당신은 작물을 몽땅 도둑맞고 말았답니다.
가여워라…….
보상 : 위로금 100 골드]
“…….”
아니, 2번 루트에 대체 어떤 장점이 있는 건데?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면 뭐 해. 기껏 키운 틸라를 다 도둑맞는다잖아.
위로금 100 골드?
‘현재 잔고가 3 골드뿐이라 혹하긴 한데…….’
아, 아니야. 필요 없어! 틸라를 팔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내 선택은 당연히 1번 루트다. 흑막의 외동딸이라면 당연히 냉정한 모습을 보여야지.
그렇다고 도둑이 아예 텃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너무 철저하게 경비해도 곤란하다. 내 마스터플랜에는 도둑조차 이용하는 천재적인 계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왕성의 텃밭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
왕국민들이 텃밭에 호기심을 느끼겠지. 내가 무척 귀중한 작물을 키운다고 생각할 거야.
호기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쨘!’ 하고 틸라 뿌리를 선보이면…….
‘우후후, 틸라를 금방 유행시킬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