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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15)화 (16/133)

15화

그래서 난 만약 도둑이 있다면 틀림없이 마음이 동할 만한 표지판을 붙여 두었다.

그러잖아도 아까부터 이 근처에서 시선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슬슬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할까.

“그럼 물도 다 줬으니까 이제 방으로 돌아가야겠어요.”

“그래? 그럼 아빠랑 같이 들어갈까?”

“네!”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아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텃밭을 바라보았다.

‘우후후, 도둑이 있는지 없는지 곧 알 수 있겠지.’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빠와 함께 다시 텃밭으로 왔다. 그런데 아침에 비해서 확연히 틸라 모종의 양이 줄어 있었다.

“안젤리카, 왜 그러니?”

“틸라 모종의 양이 줄어든 것 같아서요.”

세어 보니 딱 다섯 포기가 없어졌다. 내 예상대로 도둑이 든 것이다.

“흐으음…….”

나는 텃밭의 울타리를 살펴보았다. 울타리의 나사가 헐거운 부분 근처에 자그마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은 텃밭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의 수풀 뒤로 이어졌다.

수풀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곳이 틀림없었다.

당장 경비병을 데리고 수풀 뒤로 달려가 도둑을 붙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고,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척했다.

나는 텃밭에 도둑이 든 사실이 널리 소문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둑을 도망치게 했다가, 마을에서 체포하는 쪽이 좋겠지.

마음을 정한 뒤, 나는 케나스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케나스, 틸라는 두 뼘 간격으로 띄워서 심고 아침에만 물을 듬뿍 줘야 해!”

“네? 네, 알고 있습니다.”

“알겠어? 두 뼘 간격, 아침에만 물을 잔뜩!”

내가 같은 말을 반복하자 케나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뭐…… 뭔가 잘못됐나요? 죽여 주십…….”

“두 뼘! 아침에만 물 주기!”

이만하면 저쪽 수풀 뒤까지 충분히 들렸겠지.

들으란 듯이 큰 소리를 내는 나를 아빠는 온화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하, 우리 천사는 마음씨도 천사 같구나.”

다 내 틸라를 훔쳐 간 도둑을 붙잡아 벌을 주기 위해서인데 이상한 오해를 산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생각이 났다.

틸라 도둑을 잡은 다음, 아빠가 가혹하게 처벌하는 거다. 그러면 아빠의 악명이 널리 알려지겠지.

나는 고개를 들고 아빠를 보았다. 저렇게 선량하게 웃는 모습도 지금뿐이다. 곧 이 텃밭이 최강이자 최악인 흑막이 악명을 떨칠 첫 무대가 될 테니까!

“우후후후…….”

“안젤리카? 우리 천사…… 방금 웃는 표정은 조금 무섭구나.”

음하하핫!

역시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다운 천재적인 발상이다, 에헴!

* * *

“말씀하신 조건에 맞는 땅을 찾았습니다.”

사흘 뒤, 케나스가 나를 찾아와 보고했다. 기다리던 소식이긴 하지만,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랐다.

“벌써? 확실한 거겠지?”

“네, 틸라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후후후……. 계획대로야. 드디어 틸라 도둑을 잡을 수 있겠어. 좋아, 그럼 가자.”

“어머, 안젤리카 님, 외출하시나요?”

“응, 아빠한테 가려고.”

나는 케나스와 사라를 데리고 아빠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딱 두 번 문을 노크했을 뿐, 아직 나라고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금방 대답이 들려왔다.

“안젤리카구나. 어서 들어오렴.”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아빠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아빠가 처연해 보였다. 골똘히 혼자만의 상념에라도 잠긴 것 같았다.

“아빠,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아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흔들린다.

“으음,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래, 안젤리카가 올 줄 알고 레몬케이크를 준비해 두었단다. 먹겠니?”

“와, 레몬케이크! 좋아요.”

“머리에 리본이 풀렸구나. 내가 새로 묶어 주마.”

“네!”

나는 아빠 옆자리에 앉아서 아빠에게 머리카락을 맡긴 채 레몬케이크를 먹었다.

이 레몬케이크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부드러운 스펀지케이크와 새콤달콤한 레몬시럽의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레몬크림을 포크로 떠서 입으로 가져가…….

……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지. 아빠의 집무실에 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간식을 먹게 된단 말야.

아빠가 무척 자연스럽게 간식을 권하는 바람에 그만 본 목적을 잊어버릴 뻔했다.

“아빠, 오늘은 레몬케이크를 먹으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러니? 아, 자몽타르트도 있단다. 우리 천사가 좋아하는 새콤한 맛이야.”

“……!”

자몽타르트라니, 이름만 들어도 무척 맛있을 것 같다. 순간 혹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저 아빠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래? 어디니?”

“왕성 밖인데……. 아빠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고자 하는 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꼭 아빠와 함께 외출을 해야 했다. 그래야 아빠가 틸라 도둑에게 냉정한 심판을 내릴 것 아닌가.

다행히 아빠는 내 속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생긋 웃으며 요청을 받아들였다.

“알겠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같이 가자꾸나.”

사라가 얼른 내 머리 위에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워 주었다.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고, 나는 아빠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후후후, 틸라 도둑 녀석 두고 보자고!’

* * *

데네브 왕국.

동쪽에는 만년설이 쌓인 가파른 산맥, 남쪽에는 고대 던전을 끼고 있는 작은 왕국이다.

마기에 오염된 땅이 대부분이라 농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자연히 인구도 적다.

한 마디로 지리적 조건은 최악 오브 최악.

하지만 <마.왕.꾸> 게임에서는 최강의 흑막 캐릭터 크로셀 덕분에 왕국 포인트를 팍팍 벌어 금방 강해질 수 있었다.

이웃 나라인 리어 왕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여 SSS급 왕국에 도달한다.

땅은 좁지만 기술 집약적, 아니, 흑막 집약적인 왕국이었다.

그런데…….

“…….”

나는 왕성 근처의 마을을 둘러보았다.

F급 낡고 좁은 왕성이 있는 F급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답게 왕성 바깥의 풍경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왕국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시골 마을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내가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는 중앙 광장에 크로셀 데네브의 조각상까지 커다랗게 세워 놨었는데.

저쪽은 번화한 상점가, 저쪽은 고급 살롱, 저쪽은 마탑…….

다 어디로 간 걸까…… 훌쩍.

아차, 이런 서글픈 상념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케나스에게 틸라 밭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안젤리카가 가고 싶은 곳이 이쪽이니?”

“네, 맞아요!”

케나스는 왕성 앞의 마을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섰다. 꽤 거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레벨 2에 HP 20이 되었으니까 이 정도쯤 여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진짜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데…….

“안젤리카, 아빠가 안아 줄까?”

“헉, 허억……. 괜찮아요, 저는 튼튼하니까요.”

“자, 안젤리카, 이리 오렴.”

괜찮다고 했는데도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에휴, 다리 좀 아프다고 했다고 안아 주고, 우리 아빠 이렇게 착해서 어떡한담.

훌륭한 흑막은 혼자서 강하게 커야 하는 법! 여기서는 내가 먼저 혼자 걷겠다고 해야지. 해야 하는데…….

그런데 한번 안기니까 너무 편하다.

“…….”

‘가끔은 괜찮은 걸로 하자. 가끔은!’

결국 나는 얌전히 아빠에게 안겨서 숲길을 이동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산단 말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숲속에 자그마한 오두막이 있었다. 사람 두어 명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작았고, 여기저기가 부서져서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비도 샐 것 같다.

“아빠, 나 여기 내려 주세요.”

“이곳에 볼일이 있어서 오자고 한 거니?”

“네, 찾을 게 있거든요.”

탁!

아빠의 품에서 내려온 나는 오두막의 뒤쪽을 확인했다. 뒷마당에 틸라의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하나, 둘, 셋……. 흐음?”

수가 꽤 많다.

이상하다. 틸라를 도둑맞은 것은 바로 사흘 전이다. 그리고 상태창에 의하면 틸라의 재배에는 14일이 걸린다.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많은 틸라를 키워 낸 거지?

뭐, 도둑을 잡으면 직접 물어보도록 할까.

그때, 숲길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작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두막의 주인이 잠시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으아, 배고파. 빵 하나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니나 다를까, 수풀 너머에서 이런 중얼거림이 들려오더니, 이내 웬 소년이 불쑥 나타났다. 붉은 머리칼에 뺨에는 주근깨가 많은 활달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 누구…….”

소년은 나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듯 곧장 몸을 돌렸다.

“칫……!”

“케나스, 잡아!”

“네? 네, 잡아…… 어, 어어?”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케나스가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소년은 후다닥 반대편으로 달아나려 했다. 제법 날쌔다. 눈앞에서 도둑을 놓치려는 찰나였다.

“이런. 그러다 넘어지겠다. 얘야, 조심해야지.”

아빠가 상냥하게 웃으며 소년을 붙잡았다.

결코 거센 움직임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손을 뻗었을 뿐인데도 소년은 붙잡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드디어 도둑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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