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3장. 흑막 생활 입문을 위한 상업 활동
“우와아! 엄청 많다!”
오늘은 드디어 틸라를 수확하는 날이었다.
오후 느지막이 수확을 다 마쳤다는 말을 듣고, 나는 사라와 함께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는 틸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니키 덕분에 틸라 재배가 풍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확한 틸라 하나를 집어서 확인해 보았다. 덩이뿌리가 무척 실하다. 이걸 잘라서 다시 심으면 더 많은 틸라를 얻을 수 있겠지.
빨리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어서 탈농업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갓 수확한 작물을 손에 들자 묘한 감동이 느껴졌다.
밭에 모종을 심고 물을 주는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작물이 자라다니 신기하다. 비유하자면…… 그래.
꼭 무한히 발생하는 아이템 복사 버그 같다고 할까.
‘후후후……. 성공이다.’
“안젤리카 님, 기뻐 보이세요.”
“응, 틸라를 많이 얻어서 기뻐.”
“오늘 저녁으로 새로 수확한 틸라를 구워 올리라고 할까요?”
“아니, 그것보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F급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답게 현재 이 왕성에는 최소한의 고용인만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얼마 안 되는 시종과 경비병들까지 수확을 돕느라 하루 종일 힘을 썼다.
이렇게 다들 지친 상태에서는 역시 그것밖에 없지.
나는 활짝 웃으며 선언했다.
“우리, 이 틸라로 파티 하자!”
모두들 새로 수확한 틸라를 얼른 맛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파티가 결정되었다.
파티라고 해도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뒤뜰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틸라를 구워 먹는 것이었다. 역시 틸라는 모닥불에 겉면만 살짝 굽는 것이 제일 맛있으니까 말이다.
뒤뜰에 모닥불 여러 개를 만든 뒤 고용인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았다. 이러니까 꼭 캠핑을 하는 기분이다.
‘왕성에서 캠핑이 가능할 정도로 정원이 휑하다는 건 문제가 있지만…….’
당장 답도 나오지 않는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갓 수확한 틸라를 맛보는 데 집중해야지.
케나스가 갓 수확한 틸라를 긴 꼬챙이에 꿰어 모닥불에 구웠다. 틸라가 서서히 익어 가면서 곧 달콤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고용인들이 토실토실한 틸라를 보면서 군침을 삼켰다. 이른 아침부터 힘을 썼겠다, 지금 딱 출출할 시간이기도 했다.
“안젤리카 님, 아직 먹으면 안 돼?”
“음……. 조금만 더 굽자.”
그중에서도 니키는 입을 헤벌리고 정신없이 모닥불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저러다 턱으로 침이 흐를 것 같다.
“안젤리카 님, 여기 다 구워졌어요.”
잠시 기다리자 틸라가 딱 알맞게 구워졌다. 나는 사라가 건넨 꼬치를 받아 니키에게 건네면서 주의를 주었다.
“니키, 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
“아, 아뜨뜨뜨!”
“……으라고 할랬는데 이미 늦었구나.”
“아, 흐아, 흐어어, 아뜨뜨!”
나는 입 안에 틸라를 넣은 채 비명을 지르는 니키의 턱을 잡고 찬물을 부어 주었다. 니키는 찬물로 입 안을 식힌 뒤 다시 틸라를 입에 넣었다.
얘는 상태창에 ‘한 그릇 더!(F)’ 특성이 있을 때부터 알아봤다. 정말 잘 먹는구나.
“안젤리카, 맛있게 먹고 있니?”
“아빠, 오셨어요?”
아빠가 내가 있는 모닥불 곁으로 다가왔다.
아빠는 내 옆에 앉아, 모닥불에서 딱 알맞게 익은 틸라를 꺼냈다. 껍질을 벗기자 먹음직스러운 노란 속살이 드러났다.
“자, 안젤리카, 아 하렴.”
아빠는 호호 불어 틸라를 살짝 식힌 다음 내게 먹여 주었다. 이어 아빠도 갓 구운 틸라를 맛보았다.
“맛있죠?”
“그래, 틸라 뿌리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구나. 우리 천사 때문에 새로운 맛을 알게 되었구나.”
“분명 틸라는 전 대륙에 유행할 거예요. 머지않아 사람들이 틸라를 사기 위해 줄을 서겠죠.”
“그럴까?”
“그러면 미리 틸라를 잔뜩 키워 둔 우리 왕국은 엄청난 돈을 벌게 될 거예요!”
“우리 천사는 야망이 아주 크구나. 아빠는 그냥 이렇게 안젤리카랑 오붓하게 먹는 게 좋은데.”
“아니요, 아빠. 아빠는 야망을 크게 가져야 해요!”
“하하하…….”
아빠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 주위에 앉은 고용인들이 틸라를 먹다 말고 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들 눈가가 촉촉하다.
저 표정을 해석하자면…… 그래, 일요일 오전에 텔레비전으로 감동적인 동물 프로그램을 보면 딱 저런 표정일 것 같다.
“다들 왜 그렇게 쳐다봐?”
“안젤리카 님과 크로셀 님이 이렇게 함께 계신 것을 보는 날이 오다니, 어흑…….”
여전히 감동 잘하고 눈물 많은 시녀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냥 아빠랑 같이 음식을 나눠 먹은 것뿐인데, 그게 울 정도로 감동적인 일인가?
이 세계에 일요일 오전의 동물 프로그램이 없어서 아쉽다. 사라라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볼 것 같은데.
그렇게 계속 틸라를 구워 먹으며 캠핑을 즐기다가, 불현듯 어떤 위화감이 몸을 스쳤다.
‘잠깐, 이 분위기…… 너무 오붓하지 않나?’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용인들은 모닥불 앞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틸라를 먹고 있었다. 그들의 낯에 수확의 뿌듯함, 그리고 직접 수확한 작물을 맛보는 기쁨이 역력했다.
어딜 봐도 흑막 왕국스러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농사짓는 흑막?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조합이다.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 왕국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평화롭게 갓 구운 틸라의 맛이나 음미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안젤리카 님, 그거 안 먹을 거면 나 줘.”
“어……. 그래, 많이 먹어.”
나는 잘 구워진 틸라를 니키에게 건네준 다음 눈앞의 상태창을 보았다.
[<데네브 왕국 종합 정보>
자금 : 0 골드
왕국 포인트 : 1000
호화도 : 10
종합 평가 :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F)
설비 : 낡고 좁은 왕성(F), 조그마한 텃밭(F)
칭호 : 없음]
그렇다. 이렇게 많은 틸라를 수확했지만 여전히 왕국의 자금은 0 골드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데네브 왕국은 파산한다.
[※ 원 포인트 레슨 : 왕국이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이 상태가 지속될 시, 41일 뒤에 파산합니다.]
‘응, 정말, 저엉말 궁금했는데 정확한 날짜까지 알려 줘서 고마워.’
상태창에 대고 투덜거린다고 적힌 숫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상태창을 꺼 버렸다.
왜 여전히 왕국에 돈이 없느냐면, 현재로선 틸라를 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사기꾼 상인을 추방하면서,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사기꾼 상인이 속해 있던 상회와 데네브 왕국과의 계약도 끊어졌다.
즉, 우리 왕국은 현재 어느 상회와도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물건이 있어도 사 줄 사람이 없다.
‘상회와 계약을 맺어야 해.’
아무리 팔 물건이 있어도 실제로 판매하지 않으면 돈이 되지 않는다. 평생 틸라만 먹고 살 게 아니라면 팔아서 돈을 벌어야 했다.
더군다나 왕국을 E 등급으로 올리기 위한 조건에도 ‘상회와 계약하기’가 있다.
[※원 포인트 레슨 : 왕국 종합 평가 ‘소박한 왕국(E)’ 달성 조건
(1) 자금 1천 골드 이상 획득하기 (미달성)
(2) 새로운 생산 시설 1개 이상 건설하기 (달성)
(3) 왕국의 경제 레벨을 2로 만들기 (달성)
(4) 상회와 계약하기 (미달성)]
현재 조건 달성 현황은 이렇다. (1)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4)를 달성해야 한다.
그러니 다음 목표는 당연히 ‘상회와 계약하기’가 되어야 하는데…….
‘……에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상회와 계약하기가 내키지 않아서였다.
‘재수 없단 말이지.’
<마.왕.꾸>의 세계에서 상인들은 다소 특이한 입장에 놓여 있다.
상인들은 어느 왕국에도 속하지 않으며, 대신 상회를 만들어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한다.
그들이 숭상하는 가치는 오직 돈. 적합한 대가를 지불하기만 한다면 어떤 물건이든 판매했고, 어디든지 찾아간다.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한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돈이 안 되는 일은 무시하기 일쑤라는 뜻이다.
그러니 그 돈 좋아하는 상인 놈들이 현재 F급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인 데네브 왕국을 얼마나 무시할지 불을 보듯 뻔했다.
이 대륙에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왕국 외에도 다섯 개의 자유 도시가 있다.
자유 도시라는 명칭에서 짐작 가능하듯 특정한 왕국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치 단체가 운영한다.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
휴양 도시 엘나스.
베나토르 아카데미.
공업 도시 하말.
모험가의 도시 나오스.
이렇게 다섯 군데.
그중에서 상인들이 세운 상회가 모여 있는 곳이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다.
사달멜리크는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마차를 타고 반나절이면 오갈 수 있다.
‘진짜 가기 싫다…….’
하지만 상회와 계약하고 틸라를 팔아 돈을 벌지 않으면 퀘스트에 실패하겠지.
퀘스트 실패 시에는 중상 혹은 사망이라니 무시무시한 페널티다. 그리고 데네브 왕국은 파산할 테다.
그리고 상업 도시에 가서 ‘그 사람’도 찾아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수확한 틸라의 꽃과 열매만 팔아도 어떻게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는 있을 테다.
하지만 나는 틸라 뿌리를 꼭 유행시키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