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나는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해 온 말을 늘어놓았다.
“다음 주에 사달멜리크 경매가 열리지? 가장 희귀한 물건을 낸 사람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걸로 알고 있어. 그 소원권이면, 지금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않아?”
한 달에 한 번, 이곳 상업 도시에서는 대규모의 경매가 열린다.
주로 출품되는 물건은 고대 유물, 예술품 등 고가의 물건.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상업 도시 최대의 행사다.
이 사달멜리크 경매는 전람회 및 상업 도시 홍보 행사의 성격도 갖고 있기에,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을 선보인 사람에게는 상을 준다.
이른바 ‘소원권’이다.
소원권이라고 해도,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업 도시 자치회의 권한 안의 일이다. 그래서 주로 ‘수수료를 깎아 달라.’거나 ‘신규 사업을 승인해 줘.’ 따위의 소원이 나온다.
소원권처럼 뜬구름 잡는 이름보다는 ‘청탁권’이 더 어울린달까.
로디가 경매에서 상을 받고, 패트릭이 한 짓을 조사해 달라고 청탁하면 된다. 그러면 패트릭이 한 짓을 밝혀낼 수 있을 테다.
“저는 경매에 낼 만한 물건이 없는데요……. 복숭아를 낼 수는 없잖아요…….”
“내가 도와줄게.”
“네?”
“내가 도와주면 금방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어.”
빈말이 아니었다. 경매에 낼 만한 물건을 구할 방법은 머릿속에 무궁무진했다.
경매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시간은 아슬아슬하지만, 승산은 충분히 있다.
그러니 마음이 동할 만한 정보일 텐데도 로디는 건조한 반응이었다. 그는 피로가 역력한 얼굴로 덤덤하게 물었다.
“그 물건이 성녀의 거울을 이길 수 있나요? 제가 경매에 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패트릭도 성녀의 거울을 내놓을 거예요.”
“그건…… 해 봐야 알 일이지!”
“왕녀님 말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왜 내게 그걸 알려 주죠? 그렇게 귀한 정보를 그냥 준다는 건가요?”
로디는 여전히 기운 없는 태도였지만, 건조한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 질문이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쩍 상태창을 보았다. 특성 ‘내 말을 들어!(E)’는 제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을 테다.
“데네브 왕국과 계약을 맺을 상회가 필요해. 팔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 실로프 상회가 그 역할을 맡아 줬으면 해.”
“이 도시에는 다른 상회도 많답니다…….”
“하지만 나는 로디가 맡아 주면 좋겠어.”
특성은 적용된 상태다. 분명 내 말이 전해졌을 텐데, 그럴 텐데…….
로디는 숨 쉬기도 귀찮아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밀어냈다.
“이제까지 내게 도움을 주겠다며 찾아온 사람은 많았답니다……. 다들 실로프 상회의 남은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이었지만요…….”
“나는 그냥 열 살짜리 어린애에 불과해. 그런데 로디한테 사기를 어떻게 쳐? 내 말대로 한다고 잃는 것도 없잖아.”
“천사처럼 다정하신 왕녀님. 왕녀님은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로디가 내게서 몸을 돌렸다. 휘적거리고 기운 없는 몸으로 복숭아 상자를 꺼내 매대에 올린다.
대화는 끝났고, 생각을 바꾸지 않을 테니 돌아가라는 제스처였다.
“당연히 모르지! 내가 로디 마음을 어떻게 알아?”
나는 그만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은 로디인데 왜 가만있는 거야? 상대에게 한 방 먹일 기회란 말야.
왜 저렇게…….
이따금 아빠가 짓는 표정하고 똑같은 표정을 하는 거야?
“왕녀님, 돈을 잃은 건 난데 왜 왕녀님이 울려고 하세요?”
“안 울어.”
“하하하…….”
로디가 곤란한 듯 웃었다.
“정말로 괜찮아?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거야? 몇십 년 뒤에 죽기 직전에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어?”
“…….”
“아, 그때 그 왕녀 말을 들을걸. 패트릭 녀석을 땅에 처박았어야 하는데, 하고. 너무 분해서 눈이 감기지 않을 수도 있잖아.”
로디는 대답 없이 가만히 나를 보았다. 나는 안경에 가려진 로디의 눈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를 찾고 싶었다.
“이건 기회야. 경매에 참가해.”
“왕녀님…….”
[특성 ‘내 말을 들어!(E)’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로디 실로프의 상태 이상 ‘의욕 상실’의 레벨이 9 → 5로 하락합니다.]
됐다! 약간이지만 ‘의욕 상실’의 레벨이 내려갔다. 이제 조금만 더 설득하면…….
“……안젤리카!”
“안젤리카 님!”
그때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여관에 남겨 둔 쪽지를 보고 아빠와 사라가 나를 찾으러 온 모양이다. 나는 빠르게 말했다.
“나는 오늘 오후 4시까지 ‘외로운 거미’ 여관에 있을 거야. 경매에 참가할 생각이 들면 나를 찾아와.”
와락!
노점 앞에 도착한 아빠가 나를 안아 들었다. 넓은 품에 고개가 다 파묻혔다.
“하아, 안젤리카, 여기 있었구나. 걱정했단다.”
“미안해요, 아빠.”
“왕녀님이 복숭아를 사고 싶다고 찾아오셨어요. 어차피 팔고 남은 복숭아예요. 돈은 됐으니 가져가세요.”
로디는 매대에 있던 복숭아 여러 개를 집어 내게 건넸다.
“……고마워요.”
나는 그 복숭아를 받아 들며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잊지 마. ‘외로운 거미’ 여관이야.’
로디는 끝내 확답하지 않았다.
* * *
나는 여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빠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쪽지를 남겨 두고 갔다고는 하나 걱정을 끼친 것은 맞아서, 나는 얌전히 반성했다.
“복숭아를 사러 갔다는 건 정말이니?”
“진짠데…….”
“……안젤리카.”
윽, 시선이 따갑다.
“잘못했어요. 멋대로 나가지 않을게요.”
내 말을 들은 아빠가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추며 차분한 말투로 설명했다.
“안젤리카, 안젤리카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가도 된다. 아빠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너를 안에만 가둬 두려는 게 아니란다.”
“네에…….”
“다만 갑자기 안젤리카가 없어지면 놀라니까, 어딜 가든 아빠한테는 솔직하게 말해 주렴.”
이렇게 상냥한 말을 듣자 양심이 콕콕 찔렸다. 결국 나는 로디를 찾아간 진짜 이유를 실토했다.
“그냥, 로디를 돕고 싶어서 만나러 갔어요.”
“로디 실로프, 그자가 마음에 드니?”
“꼭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왜 이렇게 로디 실로프가 신경 쓰일까. 이 찜찜한 마음은 그러니까…… 아, 그거다! 답을 찾은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흐, 흠! 능력이 좋으니 우리 왕국을 위해 일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멋진 왕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훌륭한 수족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니?”
“하지만 아빠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경매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설득했는데도 로디는 끝내 확답하지 않았다. 나를 믿지 못했다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 자체를 잃은 것 같았다.
내 말을 듣던 아빠가 불쑥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복숭아 먹겠니?”
아빠는 로디에게 받아 온 복숭아를 직접 깎아 주었다. 금방 복숭아를 먹기 좋게 잘라 한 조각을 내게 건넸다.
“자, 안젤리카.”
“감사해요.”
나는 복숭아 조각을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잘 익은 복숭아는 달고 향긋했다.
아삭아삭…….
금방 한 조각을 다 먹고 두 번째 조각을 집어 드는데 갑자기 ‘띠링!’ 소리가 났다.
‘잉?’
이 복숭아의 상태창이었다.
당연하지만 마법 아이템이거나 게임상 중요한 아이템이 아니면 일일이 상태창이 뜨지 않는다.
세상 만물에 다 상태창이 떠 봐. 상태창에 가려서 앞이 안 보일걸.
대체 무슨 복숭아길래 상태창이 뜨지?
[<백도(白桃)>
필리아 과수원에서 수확한 복숭아. 달고 향긋합니다.]
……필리아 과수원이라고?
로디가 소유한 과수원이 필리아 과수원이었어?
‘와, 대박.’
필리아 과수원. 기후가 좋은 곳에 위치해 양질의 과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과일보다 <마.왕.꾸>에서 중요한 파밍 포인트로 더 유명했다.
바로 고대 왕국의 유물이 발견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고대 왕국의 유물은 발굴되기만 하면 엄청난 가격에 거래된다. 깨진 찻잔 하나만 발굴해도 십 년은 놀고먹을 돈이 벌릴 정도였으니까.
특히 높은 확률로 A급 유물이 발굴되는 필리아 과수원의 유물이라면 경매에서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테다.
‘맞다, 나한테 그게 있었지.’
나는 사라와 함께 머무는 방으로 돌아와, 손가방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긴 작은 막대를 꺼냈다.
[<보물찾기 막대(일회용)>
보물의 근처에서 사용하면, 보물이 숨겨진 위치를 알려 줍니다.
일회용.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으니 주의하세요.]
지난번에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받은 희귀 아이템이었다.
보물이 숨겨진 곳 근처에서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막대가 움직이면서 보물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설명만 보면 엄청나게 좋은 아이템 같은데……. 은근 쓸데가 없단 말이지.’
기능은 뛰어나지만, 탐색 범위가 좁고 일회용이라 애매하다. 어중간한 장소에서 사용하면 보물도 못 찾고 아이템만 날려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다음에 적당한 보물이나 파헤치러 갈까 했는데, 이렇게 쓸 일이 생기네.’
필리아 과수원의 어디에 유물이 숨겨져 있는지 나는 당연히 알고 있다. <마.왕.꾸> 게임 화면 옆에 유물 지도를 띄워 놓고 샅샅이 뒤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띠링!
그때, 눈앞에 상태창이 하나 더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 경매에 참가하는 건 누구?
곧 사달멜리크 경매가 개최됩니다.
누구를 만나 정보를 주겠습니까?
루트 1. 패트릭을 만나기
루트 2. 로디를 만나기]
뭔데, 이 허접한 게임 광고 같은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