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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38)화 (39/133)

38화

“됐어, 그대로 놔둬. 놔두면 어디로든 가겠지.”

“어머…….”

“이제 피곤해. 얼른 들어가자.”

그러다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로코는 알에서 막 부화했다. 아직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혼자 뒀다간 위험하지 않을까.

‘아니야,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야생 몬스터잖아. 어디든 자유롭게 가 버려.

그런데 밖에 나가면 강한 몬스터를 만나겠지? HP가 1밖에 안 되는 로코가 잘 피해 다닐 수 있나?

“…….”

내가 이대로 쟤를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낮에는 따뜻해도 밤에는 날씨가 꽤 쌀쌀하다. 로코는 털도 짧은데 춥지는 않을까?

왕성의 정원은 황량해서 박쥐가 먹을 만한 것도 없을 텐데. 배고프다고 이상한 걸 주워 먹으면 어쩐다.

쟤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홱!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피이, 피이이…….”

쫑쫑거리며 나를 따라오다 지쳤는지, 로코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날개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 기운 없어 보인다.

로코는 크로셀을 제치고 인기투표 1위를 한 원수다. 나는 정말 박쥐가 싫다.

“피이, 피 피이잇!”

로코가 나를 향해 있는 힘껏 날개를 파닥거렸다.

애초에 얘는 왜 자꾸 나를 따라오려 하지? 내가 마음에 드나?

“알겠니? 로코, 나는 박쥐가 싫어.”

“피이잇!”

“그래도 내가 그렇게 좋으면 특별히 데려가 줄 수도 있고.”

“피이잇!”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로코는 그저 경쾌하게 울 따름이었다. 나는 로코가 착각하지 않도록 단호한 말투로 쐐기를 박았다.

“오해하지 마. 키워 주는 게 아니니까. 오늘 추우니까 특별히 안에 데려가 주는 거야.”

“어머. 안젤리카 님, 귀여운 친구가 생기셨군요.”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사라가 따뜻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도 분명하게 내 뜻을 전했다.

“나는 박쥐 싫어한다니까?”

“네, 그럼요, 그럼요.”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 * *

‘으으음…….’

어디선가 들리는 굉음에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랐다.

‘어라? 여긴 어디지?’

익숙한 내 방이 아니었다.

나는 누워 있는 상태인지 시야가 낮았다.

주위를 살피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거운 것에 깔린 것 같기도, 마비된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나는 한참을 끙끙대다 포기했다.

내게 보이는 것은 드높은 천장뿐이었다. 원래는 화려한 디자인이었을 듯한 샹들리에가 깨져 있었다.

“으으…….”

말을 해 보려 했는데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왔다. 거기다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아, 꿈이구나.

신기하게도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기억은 내 방의 책상 앞에서 새로운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제안서>를 쓰던 때에서 끊겨 있었다. 그러다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이왕 꿈이라면 좀 재밌는 걸 보여 주거나 마음대로 시야를 조절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는데.

이렇게 누워서 부서진 샹들리에만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몸은 또 왜 안 움직이는 거지?

‘뭐 이런 개꿈이 다 있어?!’

그때,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야의 한쪽 끝에 사람인 듯한 그림자가 걸렸다. 있는 힘껏 몸을 비틀자 시야가 약간 움직였고, 형태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아빠?’

아니다. 우리 아빠가 아니야.

아름답고 잘생긴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이 달랐다.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없었고, 눈은 마치 무생물인 양 무감정했다.

그는 얼굴에 검은색 안료 따위는 바르지 않았는데도 사악한 흑막처럼 보였다.

아. 원작의 크로셀 데네브구나. 잔인하고 냉정한 흑막이자, 무척 강해서 대마왕이라고도 불린 크로셀 데네브.

그때, 병사 세 명이 나타나 크로셀을 뒤에서 공격하려 했다.

3대 1이라니 비겁하다. ‘조심해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 윽……. 쿨럭!”

내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기침만 터져 나왔다.

크로셀은 병사들이 덤벼드는 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에 든 스태프를 휘둘렀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병사가 쓰러졌다.

계속해서 적이 나타났지만 결과는 같았다. 크로셀은 압도적으로 강했고, 적을 잔인하게 처치하는 데 주저가 없어 보였다.

‘이거지! 이게 바로 흑막 플레이!’

……라며 신나할 법한 광경이었지만.

꿈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도 신이 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크로셀이 너무 피폐해 보였다.

무자비하게 적을 처치하는 행위에는 어떠한 희열도 없고,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무감정해 보이던 얼굴에 서서히 어떤 감정이 드러났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 감정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절망. 그리고 짙은 슬픔.

그는 꼭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

그때, 크로셀이 이쪽을 보았다.

강력한 마법으로 적을 쓸어버린 뒤, 그가 한달음에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 안젤리카.”

형편없이 떨리는 부름이었다.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으.”

그 순간, 그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흑막 크로셀 데네브와도, 다정한 우리 아빠와도 달랐다. 그를 감싼 단단한 외피에 금이 가고, 그 안에 감춰 둔 짙은 절망이 흘러나온 것 같았다.

그는 울었다. 눈물에 젖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따뜻한 물방울이 내 뺨 위로 떨어지고, 피가 묻은 커다란 손이 내 뺨을 쓸었다.

‘싫다, 아빠. 더러운 손으로 만지는 건 싫어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가쁜 숨만 뱉어 냈다. 나른하다. 이제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그냥 꿈일 뿐인데 어째서 그는 이렇게 슬퍼할까. 그의 슬픔을 걷어 내 주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 한계다. 의식이 가물가물하다.

“미안……. 미안하다. 안젤리카, 내가 더 일찍 왔어야…….”

“…….”

눈을 감았다. 짙은 어둠이 나를 감싸고, 마지막으로 귓가에 비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따라갈 테니 기다리렴. 다시는 네가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을 거란다.”

“…….”

“……다시는.”

* * *

…….

…….

“안젤리카 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으…….”

커튼 틈새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사라가 나를 깨우러 온 것을 보니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일 듯한데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꿈자리가 사나웠어서 그런가.

그나저나 무슨 꿈이었더라?

어쩐지 멋진 흑막이 된 아빠의 꿈을 꾼 듯한 느낌인데,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설마 이건 머지않아 아빠가 멋진 흑막이 되리라고 암시하는 꿈? 그럼 길몽인가?!

“안젤리카 님, 피곤하신가 봐요. 더 쉬시겠어요?”

“으으……. 아니야, 일어날래.”

나는 침대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내 얼굴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손으로 잡아 보니 로코였다.

이 박쥐는 태연하게 내 얼굴에 찰싹 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 아까부터 머리가 무겁더라니, 얘 때문이었나.

“로코, 너……!”

나는 버럭 화를 냈다.

“너어! 누가 침대 위에 올라와서 자라고 했어?!”

“피이, 피…….”

“침대에 함부로 올라왔다가 깔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피이이…….”

“너는 저기 바닥 구석 아무 데서나……!”

나는 방의 한쪽 구석을 가리키려다 멈칫했다.

우선 소파는 안 된다. 로코는 작은데, 누가 로코를 미처 못 보고 깔고 앉으면 어떡해.

바닥은 딱딱하고 불편할 텐데. 게다가 자칫하다간 사람 발에 채일지도 모르고.

창가는 춥겠지? 책장 위는 자다가 떨어질 수도 있잖아.

다 마음에 안 든다. 얘는 HP가 1밖에 안 된단 말야.

애초에 로코는 왜 이렇게 약한 거지? 뭔가 다른 기능이라도 있는 건가.

“피잇?”

귀여운 거 말고 말야.

“사라, 바구니 같은 거 없어?”

“잠시만 기다리세요. 괜찮은 게 있나 찾아볼게요.”

사라가 옆방에 가더니 잠시 뒤 등나무로 짠 바구니 여러 개를 들고 돌아왔다.

“이건 어떠세요?”

나는 바구니 위에 로코를 놓아 보았다.

“피이이?”

“로코, 너! 멀뚱히 보고만 있지 말고 빨리 앉아 봐. 네가 편한 걸로 골라야 할 거 아냐?”

“피잇!”

“이건 어때? 마음에 들어?”

“피이이…….”

“마음에 안 든다고? 흠, 그럼 다시.”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라가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안젤리카 님, 안젤리카 님은 이 박쥐의 말을 알아들으시는 건가요?”

“응?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얘 계속 피이잇거리기만 하는걸.”

“그런데 어떻게 이 박쥐가 쿠션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걸 아셨어요?”

“얘를 봐. 입을 삐죽거리잖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표시가 틀림없어.”

사라는 잠시 로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까랑 똑같아 보이는걸요.”

“아니야, 잘 봐. 미묘하게 표정이 다르다니까.”

“똑같은 것 같은데…….”

결국 수십 분이 지난 뒤에야 딱 맞는 침대를 만들 수 있었다.

자기 침대가 생겼으니 이제 내 침대에 올라와서 얼굴에 붙어 있지는 않겠지. 정말이지 귀찮은 박쥐라니까.

나는 바구니에 들어간 로코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얘 힘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날개만 파닥거리고 제대로 날지를 못하네.”

“아직 밥을 안 먹어서일지도 몰라요. 식사를 하면 힘이 나지 않을까요?”

“로코, 너는 뭘 먹니?”

“피이잇, 피!”

그렇게 기운차게 울어도 전혀 모르겠다.

옆에서 사라가 의견을 냈다.

“과일을 주면 먹지 않을까요? 제가 부엌에서 과일 조각을 좀 받아 올게요.”

나는 사라를 저지하며 몸을 일으켰다.

“으응, 아니야. 내가 갔다 올게.”

“어머, 아니에요. 이건 제가 할 일인걸요.”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머리도 멍하고 해서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어제 어지간히 꿈자리가 사나웠는지 영 컨디션이 안 좋았다. 마침 바람을 쐬고 싶던 참이다. 겸사겸사 로코의 먹이도 받아 오면 좋겠지.

“피이이?”

“로코, 이리 와. 네가 먹을 거니까 네가 골라야 할 것 아냐?”

“피이이…….”

나는 말 안 듣는 박쥐를 품에 안아 들고 말했다.

“그럼 갔다 올게.”

“벌써 로코와 사이가 좋아지셨군요. 다녀오세요, 안젤리카 님.”

* * *

나는 로코를 어깨에 올리고 부엌을 향해 걸었다.

부엌은 내 방에서 뒤뜰을 지나 뒷문으로 들어가는 쪽이 빨랐다. 그래서 뒤뜰로 나와 잠시 바람을 쐬는데, 앞에 아빠가 보였다.

“어, 아빠! 좋은 아침이에요.”

“안젤리카, 좋은 아침이구나.”

아빠는 엷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어제 꾼 이상한 꿈 때문일까? 늘 그렇듯 오늘도 착하고 다정한 아빠의 모습인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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