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음, 짜증 내는 모습도 멋지지만 역시 웃는 모습 쪽이 낫다.
“예전에 잠시 연이 있었다. 지금은 모르는 사이나 마찬가지란다.”
알렉산드라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내게 말했다.
“후후, 처음 뵙겠습니다. 사랑스러운 꼬마 왕녀님, 아빠는 안 닮았네요.”
“네?”
“이곳에서 편히 쉬면서 좋은 시간 보내시길.”
이런 대화를 나누는 틈에 로디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눈은 예리했고, 그녀는 가차 없이 로디의 귀를 잡아당겼다.
“으아악, 아!”
“로디, 가출을 하더라도 엄마한테는 미리 말을 했어야지.”
“으아, 이거 놓고 말해요…….”
“애가 바짝 말라서는.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거야?”
“으아아악!”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요. 그럼 실례.”
알렉산드라가 우리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로디를 질질 끌고 갔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로디의 모습은 솔직히 조금 우스웠다.
만약 우리 엄마가 아직 있었다면 나도 저런 식으로 굴었을까.
“……안젤리카? 왜 그러니?”
“그냥요.”
나는 아빠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빠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뭐, 됐다. 아빠가 엄마에 대해 말을 안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엄마가 없어도 별로 큰 상관은 없다. 나한테는 곧 강하고 멋진 흑막이 될 아빠가 있으니까.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아빠의 품에 꼭 안긴 채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 * *
엘나스 호텔은 크게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 동쪽 건물을 배정받았다.
아빠와 내가 2층, 함께 온 고용인들은 1층을 쓰기로 했다.
“우와아……!”
나는 방에 들어서면서 탄성을 내뱉었다.
호텔은 정말 멋졌다. 커다란 창을 통해 푸른 바다와 휴양 도시의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었고, 인테리어는 세련되었다. 침구는 또 어찌나 푹신한지 베개에 고개만 대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다. 휴가를 만끽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바로 세이르를 만나는 것이다.
“로코, 이리 와. 바깥 구경하러 가자.”
“피이이……?”
나는 로코를 주머니에 잘 넣은 뒤 밖으로 나왔다. 손가방에는 ‘완벽한 인질 생활을 위한 감옥 패키지’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빠, 저 잠깐 요 앞에 산책하고 올게요!”
“그러렴. 너무 멀리 가면 안 된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나는 힘차게 밖으로 출발했다.
“흠, 흠, 흐음, 날씨 좋다. 그치?”
“피이잇, 피!”
비록 내가 흑막의 외동딸이기는 하지만, 세이르를 다짜고짜 납치할 생각은 아니었다.
먼저 세이르를 만나 성검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봐야지. 만약 거절하면, 한 달은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편안한 감옥 패키지에 초대하겠다고 제안하는 거야.
이렇게 훌륭한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겠지. 음하하, 정말 멋진 계획이다.
“흠, 흐음, 흠.”
“피이잇!”
호텔을 나와 휴양 도시의 가도를 걸을 때까지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한 도시였다. 축제를 기대하는 휴양객들이 환한 표정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일이 다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세이르는 엘레인 공작가 소유의 별장에서 머무를 테다. 헤매지 않도록 미리 주소를 외워 왔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세이르가 머무르는 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라?”
분명 이 주소 맞는데?
내가 착각했을 리가 없다. 확실하게 세이르가 머무르는 별장 위치를 알아 왔는데.
눈앞에 있는 것은 폐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허름한 건물이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창문에는 쇠로 된 창살이 쳐져 있었고, 입구 앞은 무장을 한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결코 소공작이 머무를 만한 집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사람을 가두기 위한 감옥처럼 보였다.
무언가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슬그머니 물러난 뒤 집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낡아 빠진 담벼락을 꼼꼼히 살피자 곧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개구멍이 없을 리 없지.
‘요즘 어째 낡아 빠진 건물하고 인연이 많은 것 같아…….’
“로코, 쉿, 이제부턴 조용히 해야 해. 착하지?”
“피이…….”
나는 로코를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고 개구멍을 통해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대단한 결심을 하고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이곳에 세이르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내가 주소를 잘못 외웠을 뿐이고, 세이르는 다른 곳에서 이 느긋한 도시를 즐기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거기 누구지?”
낡은 벽 너머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기 누구 있어?”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희뿌연 창문 너머로 언뜻 금빛 머리카락이 비쳤다.
세이르는 금발에 초록색 눈이다. 저 금발이 세이르일까? 확인해 봐야겠다.
창문은 특이하게도 바깥쪽에서 잠그는 형태였다. 그냥 아래로 당기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잠금장치지만, 문제는 손이 닿지 않는다.
나는 주머니에서 로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창문의 잠금장치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알겠지, 로코? 저거야. 저걸 당겨야 해.”
“피이잇…….”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로코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날개를 파드닥거리며 날아갔다.
“응, 로코. 거기, 거기야. 거길 두드려!”
“피이이, 피!”
됐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로코가 창문의 잠금장치에 무사히 착지했다. 로코가 잠금장치에 거꾸로 매달리자 이윽고 잠금이 풀렸다. 역시 주인을 닮아서 똑똑하다니까.
갑자기 창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자 금발 소년이 창가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작은 돌을 창문에 집어 던져 그의 주의를 끌었다.
“누구야?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잠깐 창문 앞에서 비켜 봐.”
“……뭐?”
“이얍!”
탁!
도움닫기를 한 뒤 폴짝 뛰자 아슬아슬하게 창틀에 손이 닿았다. 창틀에 매달린 채 몇 번 다리를 버둥대다가 겨우 몸을 끌어 올렸다.
나는 잠금장치가 풀린 창문을 밖에서 열고 방 안으로 침입했다.
우당탕!
“아으윽…….”
“피이잇!”
창틀을 넘을 때까지는 완벽했는데, 착지에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그래도 일국의 왕녀인데 이게 무슨 꼴이람.
‘왕녀란 거 몸빵 직군이었나…….’
여기저기 뻐근한 몸을 일으키는데, 앞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소년이 앞에 있었다.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하하, 안녕?”
“…….”
이런. 어려운 교섭을 해야 하는데 첫인상부터 망한 것 같다.
“상당히 어이없는 침입자구나.”
우여곡절 끝에 마주하게 된 세이르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는 상투적인 문구가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미소 짓는 입술은 어떠한 긍정적인 감정도 머금지 않은 채였다.
심지어 느닷없이 나타난 나에 대한 호기심이나 적개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에서 나랑 마주친 일을 기억 못하는 건가?’
그때 세이르에게 경계를 샀으니까, 기억 못하면 차라리 다행이기는 한데…….
아니, 그보다는 나한테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쪽이 정확한 표현일까.
내가 갑자기 ‘나는 외계인이야. UFO를 타고 왔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감정의 예리한 결을 사포로 모두 갈아 낸 듯한 표정이랄까.
‘얘 아직 열세 살 아냐? 무슨 열세 살짜리 어린애가 저런 표정을 짓지?’
그리고 세이르가 있는 이 방은, 도무지 공작가의 후계자가 머물 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좁은 방이었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두웠고, 얼마 안 되는 가구는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너, 설마…….”
가짜? 세이르 뮨 엘레인이 아니라 그냥 닮은 사람? 그렇게 물으려던 찰나였다.
띠링!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이름 : 세이르 뮨 엘레인
직위 : 엘레인 소공작(A)
소속 : 리어 왕국엘레인 공작령
레벨 : 22
특성 : 성검의 주인(S)
상태 이상 : 염세주의(Lv.99)]
엉?
염세주의 레벨 99?!
상태 이상 최대가 레벨 9인 줄 알았는데? 레벨 99가 가능한 거였어?
‘뭐 이런 염세주의 꼬맹이가 다 있지……?’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진짜 이상한 애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이 염세주의 꼬맹이가 가진 S급 성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세이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교섭의 첫 단계는 교섭 대상과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거지.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뗐다.
“나는 안젤리카라고 해.”
“태연하게 자기소개를 하다니 정말로 어이없는 침입자구나.”
“세이르, 너한테 중요한 할 말이 있어. 나한테…….”
그때였다. 세이르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어?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숨어.”
“어, 어어?”
세이르는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끌더니 구석의 벽장문을 열고 나를 밀어 넣은 뒤 문을 닫았다. 벽장 안은 컴컴했지만 문 사이의 작은 틈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뭔데? 꺼내 줘!’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잠시 뒤, 방문 바깥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꼭 열쇠로 자물쇠를 푸는 듯한 소리였다.
‘방문이 잠겨 있었어? 왜?’
꼭 세이르가 여기 갇혀 있기라도 한 것 같잖아.
곧 문이 열리고 시종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