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시종은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문틈으로 바깥을 지켜보았다.
“…….”
“…….”
시종은 손에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테이블 위에 식사를 차렸다.
의아한 점은, 시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사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따위의 의례적인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종은 마치 세이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꼭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배급하는 기계처럼 쟁반을 놓고, 문을 닫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갔다.
그런데 시종이 들고 온 음식이 영 이상했다. 묽은 수프인데 푸르뎅뎅한 빛깔이 도는 것이, 멀리서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꼭 독이라도 든 것처럼…….
띠링!
[<독이 든 수프(F)>
건더기가 거의 들지 않은 묽은 수프.
※ 독이 들었습니다. 먹으면 좋지 않습니다.]
진짜잖아!
그 시종, 점잖은 얼굴로 무서운 사람이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독이 든 수프를 놓고 갔어!
하지만 세이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블 앞에 앉더니 숟가락을 들고 그 푸르뎅뎅한 수프를 떠먹으려 했다.
‘아니, 딱 봐도 이상하잖아. 그걸 먹으면 어떡해!’
당장 세이르를 말려야 하는데, 내가 벽장에서 나가는 것보다 저 숟가락이 세이르의 입으로 들어가는 쪽이 빠를 듯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대신 로코를 이용하기로 했다.
로코, 너만 믿는다.
“피이이?”
“가라, 로코!”
나는 주머니에서 박쥐를 꺼내 세이르를 향해 던졌다.
탁!
로코는 날개를 파드닥거리면서 절묘하게 세이르가 든 숟가락을 쳤다. 숟가락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역시 주인을 닮아서 천재적인 박쥐라니까.
“로코, 너……! 아무거나 막 건드리면 어떡해! 안 다쳤어?”
“피이잇!”
나는 뛰쳐나가 로코를 안아 드는 척하면서 팔꿈치로 수프 그릇을 쳤다. 수프 그릇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쟁반 위로 내용물이 쏟아졌다.
휴, 됐다. S급 성검의 주인이 독이 든 수프를 먹고 쓰러지는 사태는 면했다.
수프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말하면 믿을까? 우선은 실수였다고 둘러대야겠다.
“그, 미안해. 로코가……. 아, 로코는 이 박쥐 이름이야. 로코가 수프에 덴 줄 알고 놀라서 그만.”
“……하아.”
수프를 엎은 것에 대한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엷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허둥대지 않아도 돼.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뭐?”
나는 깜짝 놀라 세이르를 쳐다보았다.
세이르는 여전히 모든 것에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독이 든 걸 알면서 왜 먹으려고 했어?”
“독에는 내성이 있어.”
“아니, 그래도! 독 내성이 만능이야? 내성이 있어도 먹으면 아프잖아!”
<마.왕.꾸>에서는 캐릭터에게 극소량의 독을 장기간 먹여 독 내성을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독 내성이 있다고 해서 독을 먹었을 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독을 먹으면 HP가 대폭 깎인다. 거기다 독 섭취가 반복되면 스테이터스가 감소하고 몸이 쇠약해진다.
목숨을 잃지 않는다 뿐이지 독은 분명히 몸에 악영향을 끼친다.
“고작 배가 아프거나 피를 좀 토할 뿐이야.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그게 무슨 고작이야?!”
세이르는 내가 왜 별것도 아닌 일에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가슴이 갑갑해졌다. 너무 많은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래의 엘레인 공작이 머무르는 거처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소, 레벨 99 염세주의 꼬맹이가 된 세이르, 밖에서 굳게 잠긴 문, 시종의 이상한 태도…….
나는 아까부터 머릿속을 떠돌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세이르, 여기에는…… 휴양 도시에는 왜 오게 된 거야?”
나는 축제 기간의 휴양지니까 당연히 축제 구경을 하러 왔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환경은 휴양은커녕, 오히려…….
“벌을 받으러.”
“뭐?”
“가출을 했거든. 몰래 집 밖에 나간 걸 들켜서.”
“왜 나갔는데?”
“찾을 사람이 있었어. 결국 만나진 못했지만.”
아.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의 경매 날을 말하는 거구나. 엄청 수상쩍은 모습으로 어디론가 가는 세이르를 봤었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린애가 가출 좀 했다고 이런 곳에 가두는 것은 이상하다. 그거 학대잖아. 그리고 아무리 독 내성이 있다고 한들 독이 든 수프를 먹이는 것은 살인 미수다.
이런 환경에 있으니까 얘가 염세주의 레벨 99가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누가 세이르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미래의 엘레인 공작을 이따위를 대할 수 있는 권력자는 많지 않을 텐데…….
“안젤리카라고 했지.”
세이르의 부름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끊겼다. 표정 없는 얼굴이 가만히 나를 보았다.
“으, 응.”
“네가 왜 여기 침입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테니. 그보다, 돌아가는 게 좋겠다.”
세이르는 나를 창가로 잡아끌었다.
“잠깐, 세이르, 내 말을 좀…….”
“다시는 오지 마.”
세이르의 강경한 태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는데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정문을 지키던 병사가 이쪽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
이런, 위험하다.
나는 얼른 개구멍을 통해 담장 밖으로 몸을 빼냈다. 다행히 꼬리를 밟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시나리오 퀘스트> 마법 도구 공방을 열어라!
마법 도구 공방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세이르의 S급 성검이 필요합니다.
그에게 잘 접근해 성검을 손에 넣읍시다.
남은 시간 : 8일
달성 조건 : 마법 도구 제작 공방을 개방하기
보상 : 경험치 300exp, 기초 마법 도구 제작 레시피, 랜덤 왕성 조경 1개
실패 시 : 공방 개방 실패]
상태창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이랬다.
‘왜 이제 와서?’
퀘스트가 뜰 거였다면, 왕성에서 마법 도구 제작 공방을 열려다 실패했을 때 바로 떴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 그러니까 내가 세이르를 만난 직후에 퀘스트가 뜬 걸까.
이 상태창이, 내가 세이르와 가까워지길 바라는 것 같다면 너무 나간 생각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왜 뜬금없이 세이르의 S급 성검이 공방 개방에 필요하겠는가. 내 공방이랑 성검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
그때, 다시 한번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 탈(脫) 염세주의?
현재 세이르는 극심한 염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염세주의 레벨이 낮아질수록 교섭 성공 확률이 올라갑니다.
루트 1. 세이르의 염세주의 낮추기
루트 2. 돈으로 교섭하기]
여기서 새로운 히든 퀘스트가 뜨다니,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성검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각각의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루트 1. 세이르의 염세주의 낮추기>
세이르와 친해집시다.
염세주의 레벨을 낮추면 그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어쩌면 대화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보상 : 플레이어 안젤리카의 마법 능력치 +10, 상냥한 마음]
[<루트 2. 돈으로 교섭하기>
대화는 무슨. 그럴 시간 없습니다.
그냥 돈으로 목표를 달성합시다.
어쨌건 성검만 얻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보상 : 마법 도구 제작 재료 세트(기초편)]
“……뭐?”
1번 루트에 어떤 메리트가 있는 건데?
마법 능력치 +10의 허접한 보상은 그렇다 쳐도, 상냥한 마음은 뭐람? 흑막의 외동딸에게 상냥한 마음이라니 정말 필요 없는 덕목이다.
‘당연히 답은 루트 2번이지.’
성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남의 상태 이상 따위야 내 알 바 아니다.
더군다나 세이르는 라이벌 왕국의 소공작. 왕녀인 내 입장상 그에게 깊이 관여하기도 그렇다.
“그래도…….”
“피이이……?”
염세주의 레벨을 낮추면, 교섭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 이거지.
아직 시간은 있다. 2번 루트로 가되, 휴가 기간 동안 세이르를 만나 조금이라도 염세주의 레벨을 낮춰 봐야겠다.
세이르의 방 불이 꺼졌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세이르가 아직 나를 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선전 포고를 하듯이 세이르의 방을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내가 오지 말란다고 오지 않는 애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두고 봐, 누가 포기할 줄 알고!”
* * *
호텔 엘나스의 아침 식사는 호화로운 뷔페식이었다. 대륙 각지의 다양한 음식이 끝없이 제공되는 뷔페는 이 호텔의 자랑이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으로 내려가자 아빠가 먼저 와 있었다. 아빠는 오늘도 아름답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젤리카, 잘 잤니?”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우리 왕성 일행들은 자유롭게 앉아 뷔페를 즐기고 있었다. 호텔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들 표정이 밝다. 정작 우리를 초대한 로디는 아침부터 어머니에게 끌려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안젤리카 님, 이쪽으로 오세요.”
“응, 사라도 잘 잤어?”
나는 먼저 접시에 과일 조각을 넉넉히 담아 로코 앞에 놓아 주었다. 주인을 닮았는지 똑똑한 박쥐가 과일을 먹는 모습을 보며 나도 아침을 먹었다.
음식은 전부 맛있었지만, 나는 적당히 배가 차자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원에게 종이봉투를 받아 와 뷔페에서 몇 가지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이유는 물론, 세이르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모름지기 몸의 건강에서 정신의 건강이 오는 법. 사람은 배가 불러야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매번 시종이 독이 든 음식을 가져다줬다면, 세이르는 이제껏 제대로 먹지도 못했겠지. 일단 맛있는 음식을 먹여 주면 세이르의 염세주의 레벨도 좀 내려가지 않을까.
“안젤리카 님,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안녕, 니키, 인사는 제발 평범하게 좀……. 그런데 그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