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 *
세이르는 방금 안젤리카가 떠난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푸른 눈,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귀여운 얼굴, 분홍빛 머리카락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재미있는 애다.
다시 저 소녀를 만날 수 있을까.
오늘 갑자기 소녀가 창문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듯 다시 만나고 싶기도 했고, 이대로 영영 만나지 않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혹 다시 만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겠지.
깊은 탈력감이 소년의 마음을 잠식한다. 소년은 소녀를 만나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억지로 잠재웠다.
잠시나마 생기를 머금었던 초록빛 눈동자는 빛을 잃고,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만 떠올랐다.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왔다. 시종은 방 안에 방금까지 누군가가 있었던 흔적이 역력한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의 핏자국을 지웠다.
그동안 세이르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만 소녀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원하는 것 따위는 없고, 순수하게 너를 위해서 도와준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심해. 그런 사람이 제일 위험한 법이야.”
그 말이 그토록 유쾌했던 이유는, 정반대의 말을 하는 사람을 알기 때문이다.
“소공작, 이건 모두 소공작을 위한 일이랍니다.”
“…….”
“나는 그저, 어머니를 잃고 홀로 외롭게 자란 소공작을 잘 보살피고 싶을 뿐이에요. 이런 제 뜻을 알아주겠지요?”
다프네 왕비.
세이르의 외숙모이자, 국왕 대신 리어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마법사이기도 하다.
다프네 왕비는 앞에서는 다정하게 웃으며 뒤로는 세이르를 교묘하게 괴롭혔다. 세이르가 그녀의 자식들 다음으로 높은 왕위 계승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세이르는 아주 오랫동안 소중한 것을 잃어 왔다.
어린 시절 키우던 새가 죽은 것이 시작이었다. 해로운 전염병에 걸려서 옮을 수 있으니 죽였다고 했다.
수도에는 세이르에게 나쁜 뜻을 품고 접근하는 자가 많다며 공작령으로 보내졌다. 세이르는 허름한 다락방에서 거의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고, 그래서 제대로 된 또래 친구 한 명 사귈 수 없었다.
가정 교사는 계속 갈아 치워지다가, 끝내는 다프네 왕비의 입김이 닿은 자로 바뀌었다. 갖은 핑계로 체벌하기를 즐기는 자였다. 고용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세이르를 모질게 대했다.
급기야 다프네 왕비는 어릴 때부터 세이르를 돌본 유모를 저택에서 내쫓았다. 세이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구실이었다.
세이르는 처음으로 다프네 왕비에게 반발했다. 유모가 자신에게 다프네 왕비를 조심하라고 조언했기 때문에 쫓아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리하여 세이르는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검 한 자루만을 품에 안고 공작저를 나왔다.
검은 아주 어린 시절에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행자에게 받은 것이다.
기억에 남은 것은 오직 여행자가 남긴 말.
언젠가 이 검이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사달멜리크로 나를 찾아와라.
낡아 빠진 검 한 자루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그 말을 얼마나 속으로 되뇌었는가.
세이르는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을 힘이, 고통에서 벗어날 힘이 필요했다.
오랜 약속만을 의지하며 저택 밖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먼 길을 여행해 사달멜리크에 도착했지만.
약속과 달리 사달멜리크에 그 사람은 없었다. 세이르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행자가 고작 어린애한테 지껄인 말이 아닌가.
왜 그 터무니없는 약속을 쉽게 믿어 버렸을까. 왜 그 약속만 믿고 긴 시간을 버텼을까.
허탈하고 우스웠다.
게다가 다프네 왕비의 기사들에게 발각되어 공작저로 돌아온 날…….
유모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집으로 가던 중에 강도를 만난 것 같습니다.”
“범인은…… 잡았나?”
“조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범인을 잡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충격에 빠진 세이르의 앞에서 다프네 왕비는 태연하게 명령했다. 세이르의 가출을 막지 못한 시종을 채찍질하라고.
시종은 세이르가 태어났을 무렵부터 저택에 있던 자였다. 가혹하기만 한 저택에서 유일하게 세이르에게 잘 대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허약한 체질로 잡일밖에 맡지 못하는 몸인데, 채찍질을 당하다간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채찍을 맞고 괴로워하는 시종을 보다 못해못한 세이르가 말했다.
“차라리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그리하겠어요? 그러면 소공작에게 알맞은 벌을 생각해야겠군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그리하여 도착한 이곳, 휴양 도시 엘나스의 낡은 별장.
다프네 왕비는 세이르의 시종을 시켜 독이 든 음식을 가져왔다. 한때 세이르에게 친절하던 시종의 손으로 독을 먹이게 했다.
내성이 있는 세이르가 죽지 않을 정도의 독. 먹지 않으면 시종이 죽는다. 먹으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다.
시종을 감싸려 한 세이르의 마음이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비웃기 위해. 단지 그것 때문에 다프네 왕비는 태연히 이런 일을 했다.
세이르는 머리가 비상했고, 그 때문에 너무 잘 알았다. 알아 버렸다.
자신이 다프네 왕비에게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나 남은 가족,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이래로 마음의 병을 얻었다. 방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으며, 이따금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만 해 댔다.
그는 세이르가 무슨 일을 당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프네 왕비는 강력한 마법사이자 왕국의 실권자였다. 남편인 왕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킨 것은 물론이고, 엘레인 공작령의 가신들까지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니 저항할 방법 따위는 없다. 다프네 왕비는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세이르를 괴롭히고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마음이 아플 일도 없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소년 나름의 방어 기제였다.
그저 생각했다.
‘차라리 빨리 죽여 주면 좋을 텐데.’
정리를 마친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시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세이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과 가까워졌다간 또 시종이 벌을 받을 테니까.
“하아…….”
바깥쪽에서 잠긴 좁은 방 안에서 세이르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유모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종도 채찍질을 당하지 않았을 테다.
자신과 가까워진 상대는 피해를 입는다. 그러니 자신의 호의는 상대를 괴롭힐 뿐이다.
세이르는 다시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생각했다.
솜사탕처럼 푹신해 보이던 머리카락, 동글동글한 뺨,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던 입술, 걱정을 가득 머금은 푸른색 눈을.
역시,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테이블 위에는 한 입밖에 먹지 못한 레몬케이크가 그대로 있었다. 시종은 못 본 척 케이크를 그대로 두고 갔다.
세이르는 새 식기를 꺼내 독이 묻지 않은 부분을 잘라 맛보았다.
“읍……!”
강렬한 신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시다. 안젤리카, 그 애는 입맛이 상당히 독특한 모양이다.
그런데 입 안의 케이크를 삼키고 나자 끝에 단맛이 오래 남았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맛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럴 만하다.
“……하핫.”
세이르는 자신이 무심코 소리 내어 웃었음을 알고 놀랐다. 짙은 레몬 향이 한참이나 남았다.
* * *
“흐으음…….”
“피이잇!”
“흐으으으으으음…….”
“피이이……?”
나는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가도를 걸으면서, 어떻게 하면 세이르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다프네 왕비가 세이르를 괴롭히는 이유라면, 역시 그것밖에 없겠지.
‘세이르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으니까.’
현재 세이르의 왕위 계승권 순위는 3위. 1위와 2위는 국왕과 다프네 왕비 사이에서 난 남녀 쌍둥이 자녀다.
국왕도 아직 건강하겠다, 자신의 자식들이 순위가 더 높은데 뭐가 문제냐 싶지만.
다프네 왕비의 자식들은 아직 어리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사망한 세이르의 어머니는 국왕의 여동생으로, 생전에 무척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세이르 본인의 능력치도 뛰어나니, 다프네 왕비로서는 견제할 법도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프네 왕비는 강력한 캐릭터다.
마법 면에서도 우리 아빠 다음으로 손꼽힐 정도라, <마.왕.꾸>에서 정식 루트를 플레이할 때 굉장히 유용한 캐릭터였다.
다프네 왕비가 너무 강한 나머지 정작 리어 왕국 국왕의 인상이 상대적으로 흐릿할 정도랄까?
나는 대체로 성능 위주로 캐릭터를 좋아했기 때문에, 다프네 왕비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랬었는데…….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캐릭터가 뒤에서는 세이르에게 음습한 짓을 하고 있었다니.
‘……충격이야.’
세이르를 저 별장에서 빼낼 방법은 없을까?
뒤에 다프네 왕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거 자칫하면 국제 문제가 된단 말이지. 아직 리어 왕국과 대립각을 세우기에는 이르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지. 아빠한테 이야기해 볼까.’
이런 생각에 푹 빠진 채 걷느라,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곧장 깨닫지 못했다.
한참 걷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주변에 인기척이 없었다.
“어엉? 여기 어디지?”
“피이잇!”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가도의 안쪽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 있었다.
인기척이 없어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였다. 세월이 느껴지는 대리석 기둥에는 여신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아, 여명교의 신전이구나.
곧 ‘여명교 신전’ 콘텐츠를 추가 업데이트한다고 공수표만 날리다가 제작사가 망했지. 나 진짜 업데이트 기대 많이 했는데, 흑.
<마.왕.꾸>에서 들어가 보지 못한 맵이라 궁금하기는 한데.
“으음…….”
지금은 됐다. 지금은 신전 구경보다 중요한 일이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신전 앞에서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사랑스러운 꼬마 아가씨, 신전을 찾아오셨나요?”
“으앗! 깜짝이야.”
소리도 없이 어느새 웬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