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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51)화 (52/133)

51화

복장으로 보아 여명교의 신관 같았다.

“길을 잘못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신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신전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신관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제발 그냥 가지 마세요……!”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어쩐지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 도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아, 죄송합니다. 신전에 손님이 오신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만.”

“네……?”

나는 황당한 마음에 신관을 올려다보았다.

신관은 갈색 피부에 밀짚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젊은 남자였다. 눈매가 위로 솟은 여우상에, 눈동자는 잿빛이다.

마른 몸에 걸친 하얀 신관복 때문인가, 신관에게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말씨는 나긋나긋하고 자연스럽게 눈웃음을 흘리는데, 또 어딘가 슬퍼 보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늘 있는 미인이랄까.

여명교의 신관이 결혼을 할 수 있던가, 없던가? 으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신관이 아니었다면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홀렸을 것 같다.

‘꼭 이런 그늘 있는 타입만 잡는 언니들이 있다니까.’

이런 생각이나 하는데, 신관이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여명교의 신관으로서 이 신전을 관리하는 디드리크라고 합니다.”

“네에, 안녕하세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그러나 신관 디드리크는 나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 신전에 방문해 주신 분을 대상으로, 앞으로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점을 봐 드립니다.”

“신전인데 점을 봐요?”

보통 신전이면 그런 오컬트 배척하는 것 아닌가?

디드리크는 흐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신전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도통 기부금도 안 들어오고 해서.”

“아항…….”

그것참, 뭐랄까 현실적이네.

나는 점이나 타로 카드 따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마.왕.꾸>에도 다양한 미신이 있었다. 어느 캐릭터를 키우면 이벤트가 잘 뜬다거나, 어느 노래를 틀어 놓으면 경매에서 대박이 난다거나, 새벽 5시에 게임을 하면 강화가 잘된다거나 등등…….

심지어 한정판 로코 인형을 사면 버그에 걸리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미신까지 있었다.

나는 그런 미신조차도 따라 본 적 없다. 미신 따위에 기대는 것은 나약한 게이머의 행동이다.

…로코 인형을 사긴 했지만, 그냥 귀여워서 산 거다.

그러니 신관이 권하는 점이 어떤 종류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거기다 내게는 점을 볼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저는 돈이 없어서 안 봐 주셔도 괜찮아요.”

왕국의 재정 상황이 나아진 이래로 아빠는 나한테 일주일에 한 번씩 용돈을 줬다. 왕국의 운영 자금과는 별개인, 말 그대로 내 개인 소지금이다. 평소에 따로 돈 쓸 일이 많지 않다 보니 금액이 제법 모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용돈이 든 지갑을 호텔에 놓고 와 버렸다. 원래 오늘은 세이르만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번에야말로 돌아가려 했는데 디드리크는 재빨리 내 손을 다시 붙잡았다.

“무료! 무료예요. 처음 오시는 분은 무료로 봐 드려요. 점괘가 마음에 들면 다음에도 오시란 뜻에서요.”

그러고 보니, <마.왕.꾸>에서 여명 교단을 업데이트할 때, 점 보기 시스템을 넣을 거라고 홍보했었지. 회사가 망해 버려서 해 보지는 못했지만.

디드리크가 말하는 점이 그 점 보기 시스템인가.

흐음…….

“무료라면, 뭐……. 좋아요.”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디드리크는 잽싸게 나를 한쪽에 놓인 테이블로 데려갔다. 그리고 품에서 카드 여러 장을 꺼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카드였다. 뒷면에는 여명 교단의 마크, 앞면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카드를 본 첫인상은…….

“……타로 카드예요?”

“그럴 리가요. 여신의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독창적인 카드입니다.”

디드리크는 ‘독창적’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타로 카드를 그림만 대충 바꿔 둔 것처럼 생겼다.

“그치만 이거, 마이너 아르카나랑 똑같은데요…….”

“기분 탓입니다. 저희 신전의 카드 점은 타로 카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네에…….”

에휴, 그럼 그렇지. 독창적인 점 보기 시스템이라고 홍보해 놓고는, 그냥 타로 카드를 그림만 바꿔서 넣었구만.

‘이러니까 게임이 망하지, 김××야…….’

순식간에 흥미가 식었다. 아빠가 기다리겠다. 빨리 아무거나 보고 돌아가자.

디드리크는 카드를 잘 섞어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뒤 말했다.

“자, 꼬마 아가씨, 여기서 카드를 세 장 골라 주세요.”

“네에…….”

나는 대강 손이 가는 대로 카드 세 장을 골랐다. 디드리크는 나머지 카드를 치워 버린 뒤 내가 고른 세 장만 나란히 배열했다.

“이 세 장의 카드는 각각 꼬마 아가씨의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냅니다. 그럼 하나씩 열어 볼까요.”

“네, 그래요.”

어차피 어떻게 해석해도 말이 되는 이야기나 그럴듯하게 늘어놓겠지. 나는 주머니 속의 로코를 쓰다듬으며 심드렁하게 들었다.

첫 번째 카드는 다섯 개의 별이 그려져 있었다.

“별 5 카드로군요. 이 카드는 후회를 의미합니다.”

“후회요?”

“네, 꼬마 아가씨의 과거에 후회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 혹은 꼬마 아가씨로 인해 주변의 누군가가 후회했다는 뜻도 되겠군요.”

“흐음…….”

맞는 말이었다.

전생의 나는 밥도 제때 안 먹고 잠도 안 자면서 게임을 하다가 흑막 엔딩을 앞두고 급사했다. 이 세계에 빙의하고 나서 얼마나 그 사실을 후회했던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여덟 시간 이상 수면하고, 운동도 하면서 규칙적으로 게임 할걸. 지속 가능한 게임 생활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달았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시군요.”

“네, 엄청요. 다음은요? 다음은 뭐예요?”

디드리크는 두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자애로운 여신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였다.

“여신 1 카드로군요. 이 카드는 모성, 혹은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모성, 혹은 풍요로움…….”

모성은……. 나는 엄마 없으니까 해당 없고. 그럼 풍요롭다는 뜻인가.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틸라 재배, 던전 운영 모두 성공을 거두어 데네브 왕국은 현재 풍요로운 상태다. 이 사업으로 벌어들인 골드와 포인트는 앞으로 왕국을 발전시키는 데 큰 밑천이 될 테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카드만 남아 있었다. 디드리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마지막 카드를 펼쳤다. 두 개의 달이 거의 겹쳐져 있는 그림이었다.

“달 2라. 흔치 않은 카드가 나왔군요.”

“좋은 카드예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대체로는요. 이 카드는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달은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 꼬마 아가씨의 미래가 완전해진다는 뜻이에요.”

“……!”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미래가 완전해진다니,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

바로 SSS급 흑막 왕국을 완성한다는 것!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고, 왕국도 발전시켜 흑막 엔딩에 도달한다는 뜻이겠지.

“어떠셨나요? 점괘가 마음에 드셨나요?”

즉, 이 유사 타로 카드 점 내용을 종합하면…….

과거에 게임만 하다가 급사했지만, 현재는 풍요롭고, 미래에는 흑막 엔딩에 도달하리라는 뜻이다. 내가 바라는 미래 그대로였다.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래서 사람들이 타로 카드를 좋아하나 봐요.”

“타로 카드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디드리크가 카드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예전에 똑같은 모양의 카드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스템이 준 퀘스트를 해치우고 받은 카드였다. 뒷면은 여명 교단의 문장이 있고, 앞면은 백지인 카드.

어디다 쓰는 건지 몰라서 갖고만 있었는데, 디드리크라면 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손가방 안에 그 카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카드를 꺼내 디드리크에게 보이며 물었다.

“신관님, 혹시 이 카드가 뭔지 아세요?”

디드리크는 카드를 살펴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한 물건을 갖고 계시군요.”

“그래요?”

“이건 여명 카드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흰 카드지만, 소유자에게 길을 알려 줄 때가 오면 그림이 나타나지요.”

“그렇군요…….”

나는 디드리크에게 카드를 돌려받고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 백지였던 카드의 앞면에 그림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태양 두 개의 그림이었다.

…뭐지? 설마 지금 길을 알려준 건가? 이 그림은 또 무슨 뜻이고?

“태양 두 개는 무슨 뜻인데요?”

“유감스럽게도 그건 제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필요한 순간이 오면 자연히 답을 알게 되실 겁니다.”

차르륵, 탁!

디드리크가 카드 정리를 다 마쳤다. 그는 카드를 품에 넣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다음에 만나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젤리카 님.”

꼭 머지않아 다시 만나리라고 확신하는 투였다. 신비한 사람이다.

* * *

“따님은 오늘도 외출인가요?”

알렉산드라는 발코니에 서 있는 크로셀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크로셀이 알렉산드라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시선은 여전히 정원을 향한 채로 짧게 대답한다.

“네가 알 바 아니다.”

“깜짝 놀랐지 뭐예요. 영영 그 조그마한 왕국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을 것처럼 사라지시더니. 웬일로 여기까지 다 오시고.”

“…….”

“무슨 심경의 변화이실까. 로디에게 대충 말은 들었지만 동명이인인가 했어요.”

“못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군.”

“그사이에 귀여운 딸도 생기셨고요.”

그제야 크로셀이 알렉산드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싸늘한 표정이지만, 딸 이야기가 나온 순간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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