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안젤리카 님, 괜찮으신가요?!”
사라는 차단 마법을 가볍게 파훼하고는 나와 세이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양손에 들었다.
“갑자기 안젤리카 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쥐새끼가 장난을 쳤군요. 호위로서의 실책, 나중에 엄히 질책해 주세요.”
“호, 호위……?”
그런 이야기 지금 처음 듣는데?
“제 역할은 안젤리카 님을 시중드는 것. 그리고 그늘에서 안젤리카 님을 지키는 것.”
“뭐……?”
“그동안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어디까지나 그늘에서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보니.”
“그럼 내가 개구멍으로 왕성 밖에 나간 일을 알고 있었던 거…….”
“네, 안젤리카 님을 몰래 호위하고 있어서예요.”
반전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 풀렸다고 해야 할지…….
그때, 사라와 검을 맞댄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흥, 검 앞에서 혓바닥이 길군.”
“서두르지 마세요. 어차피 곧 저세상으로 가실 테니.”
사라는 정말 강했다. 눈이 쫓기 힘들 정도로 재빠른 몸동작으로 암살자의 품 안을 파고든다.
휘이익!
그리고 손에 든 단검을 거침없이 던졌다.
“훗, 이 정도쯤…… 크윽?!”
암살자는 여유롭게 단검을 쳐냈지만 그건 페이크였다. 순식간에 암살자의 사각지대로 이동한 사라가 단검을 휘둘렀다.
챙그랑!
암살자는 사라를 막지 못하고 곧 손에서 검을 놓쳤다.
“안젤리카 님, 잠시만 눈을 감아 주세요.”
푹!
섬뜩한 소리가 들리고, 암살자의 몸이 서서히 옆으로 쓰러졌다.
사라는 단검을 품에 갈무리하며 나와 세이르에게 말했다.
“안젤리카 님, 세이르 님,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자, 치료를 해야 하니 가제보로 돌아갈까요?”
그런데 그때…….
“크윽, 으, 으아아아악!”
놀랍게도 암살자의 시체가 다시 일어섰다. 살아 있었나?
아니, 저건 인간이 아니다.
팔다리가 이상하게 뒤틀리더니 몸이 크게 부풀었다. 찢어진 옷 틈으로 파충류를 닮은 단단한 가죽이 드러났다. 검에 찔린 상처는 어느새 사라졌고, 얼굴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몬스터다.
그러나 평범한 몬스터도 아니었다. <마.왕.꾸>에는 이런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물며 시체가 몬스터로 변화하다니.
나는 문득 세이르의 방 앞에 쓰러져 있던 시체를 떠올렸다. 이상하게 부풀어 오른 등과 팔이 저 몬스터와 꼭 닮았다.
설마, 그 시체도 이런 변이 과정을 겪은 건가.
“사라, 조심해!”
“큿……!”
사라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몬스터에게 던졌다. 그러나 몬스터의 단단한 가죽은 단검을 튕겨 내었다.
사라는 세이르와 나를 감싸는 자세로 서서, 품에서 가늘고 긴 검을 새로 꺼내며 말했다.
“안젤리카 님, 세이르 님과 함께 도망치세요.”
“뭐? 그럼 사라는!”
“걱정 마세요. 저 혼자서 상대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 계시다간 안젤리카 님이 다치실 수도 있으니까요.”
거짓말이 분명했다.
내가 떠나지 않을 기색이자, 사라는 이번에는 세이르를 보며 말을 걸었다.
“세이르 님, 안젤리카 님을 부탁할게요.”
“……알았어. 안젤리카, 이쪽으로 와.”
“그치만!”
나는 세이르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사람들이 있을 법한 곳으로 달려가던 중.
저편에 바람에 나부끼는 은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빠……!”
아빠다.
왈칵 반가운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큰 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여기예요!”
“안젤리카……!”
지금 막 돌아온 모양이다. 아빠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안젤리카, 다친 데는?”
“안 다쳤어요. ……읏!”
아빠의 긴 손가락이 내 뺨에 난 생채기를 훑었다. 쓰라린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자, 아빠가 멈칫했다.
“……다쳤구나.”
푸른 눈 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빠는 분노를 참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안젤리카, 아빠한테 안기렴. 호텔로 데려다주마.”
“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요?”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에 주위는 혼란이었다. 피크닉을 즐기던 관광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구 도망쳤다.
무척이나 기괴하고 강한 몬스터였다. 이대로라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빠는 주위의 소란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나만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숨을 토해 낸 뒤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내 딸이 다쳤는데, 다른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아.”
“…….”
“자, 안젤리카, 이리 오렴.”
아빠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다친 일로 자책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빠와 함께 호텔로 돌아가면, 여기 이 사람들은…….
그리고 무엇보다 사라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빠한테 안기는 대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아빠, 나는 괜찮아요. 이 정도쯤 약 바르면 금방 나아요.”
“…….”
“그러니까, 사라가……. 사라를 구해 주세요.”
수 초의 틈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마른세수를 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슬픔이 가득하던 얼굴에 곧 굳은 의지가 비쳤다.
“그래, 알겠다. ……우리 천사의 뜻이 그렇다면.”
아빠는 곧 뒤를 따라온 트리스탄에게 나와 세이르를 맡겼다.
“트리스탄, 안젤리카와 세이르를 호텔까지 데려다주게.”
“넵! 존명!”
“그리고 알렉산드라, 미안하지만 힘을 좀 빌리지.”
“걱정하지 마세요.”
알렉산드라는 기사 여러 명을 데리고 있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기사들이 관광객들의 대피를 도왔다. 곧 혼잡하던 길이 뚫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안젤리카, 아빠도 곧 갈 테니 트리스탄을 따라가렴.”
“네……. 빨리, 빨리 와야 해요.”
“그럼.”
파아앗.
아빠의 손바닥 안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아빠의 손에는 긴 스태프가 들려 있었다.
내 키보다 큰 몸체에 검은 마석이 여러 개 달려 있다. 그 마석 하나하나마다 응집된 마력이 느껴졌다.
‘……심연의 주인이다.’
대마왕 크로셀의 전용 무기로 유명한 스태프.
주인을 고르는 무기라, 크로셀 데네브 외에는 감히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물건.
이 세계에 빙의하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심연의 주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아빠는 너무 착한 나머지, 내가 낸 제안서 중 마법으로 어딘가를 공격하자는 내용은 모조리 기각했으니까.
그리고, 이제까지는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도통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트리스탄이 재촉했다.
“안젤리카 님, 이 트리스탄을 믿어 주십시오! 크로셀 님도 금방 오실 겁니다. 자, 얼른 가시죠.”
트리스탄의 말이 맞다. 지금 내가 가 봐야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사라의 공격을 튕겨 내던 흉측하고 거대한 몬스터의 모습을 떠올리자 차마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 마법 특성을 배워 놓을걸. 공격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이렇게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때늦은 후회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크워어어!”
그때, 등 뒤에서 괴성이 들렸다.
우리를 습격했던 몬스터가 위로 풀쩍 뛰어오르더니, 곧장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고, 혼란이 번진다.
그 앞을 가로막는 긴 그림자가 있었다.
아빠는 몬스터의 공격에 놀라지도 않고 ‘심연의 주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스태프가 빛나더니 어느새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챠르륵!
아빠의 손짓에 따라 마석이 흔들리며 영롱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콰콰콰쾅!
낙뢰가 몬스터를 직격했다.
크로셀 데네브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 엄청난 마법을 보자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아빠는 강해.’
누가 뭐래도 멋진 흑막이 될 사람이니까.
설령 내가 공격 마법 특성을 배웠다고 해도 도움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건 그냥 애써 모은 포인트를 날리는 짓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거다. 나는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게 지금은 세이르와 함께 대피하는 일이고.
“세이르, 얼른 가자.”
“……응.”
나는 세이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세이르가 내 손을 붙잡았다.
* * *
“이쪽입니다!”
휴양 도시 엘나스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트리스탄은 나와 세이르를 데리고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가도를 나아갔다. 호텔은 멀지 않다. 이 길만 지나면 금방이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길을 빠르게 걷는 그때였다.
“으아아악!”
“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쿵!’ 하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린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몬스터다.
육중한 몸집의 몬스터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몬스터였다. 아까의 몬스터와는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겼다.
설마, 하나 더 있었나? 나는 무척 당황했다.
게임에 저런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왕.꾸>는 어디까지나 전 연령 경영 게임이라 몬스터도 귀엽게 디자인되어 있었단 말야.
저 몬스터도 아까의 암살자처럼 사람이 변한 것일까. 다프네 왕비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으아아악! 몬스터다!”
“도망쳐! 기사단을 불러!”
가도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몬스터는 도망치는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달렸다.
“안젤리카 님, 세이르 님, 뒤로 물러서세요!”
트리스탄이 우리를 감싸며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트리스탄, 조심해!”
그런데 몬스터는 트리스탄을 무시하고 세이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어어어엉!”
“……세이르!”
쾅!
그 또한 예상하고 있었던 듯 세이르는 재빨리 몸을 굴려 피했다.
가속도 탓에 몸을 가누지 못한 몬스터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육중한 몸에 비해 팔다리가 가늘었기에, 몬스터는 곧장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휴, 살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몬스터가 지하도의 천장 위로 쓰러진 것이 문제였다.
“어?”
“……안젤리카 님!”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트리스탄이 다급히 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하로 떨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