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 *
“세이르, 저 앞에서 오른쪽이야. 거의 다 왔어.”
호텔 엘나스 쪽 출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가 떨어진 위치가 호텔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 수로가 증·개축을 반복하여 길을 비비 꼬아 놓지 않았다면 훨씬 빨리 도착했을 테다.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자 통로 맞은편에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보였다. 그 문을 보고 세이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길을 잘 알아?”
“이 정도쯤 금방 외워.”
“그래?”
“우후후……. 나만큼 이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걸.”
“대단하네.”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투였다. 거짓이라곤 먼지만큼도 섞이지 않은 진실인데, 진실은 고독한 거구나.
“얼른 가자. 밖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거야.”
“…….”
“그리고 엘나스 호텔의 오너가 세이르를 손님으로 맞이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
세이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안젤리카?”
“응?”
“……고마워.”
“그, 그런 말 안 해도 돼. 다 네 성검을 노리고 한 일이니까! 알겠어?!”
그렇게 말한 뒤 나는 후다닥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출구 쪽으로 향했다.
이제 이 퀴퀴한 지하 수로의 냄새와도 안녕이다. 으, 옷에 냄새 배었을 거 같아. 아무리 왕녀가 몸빵 직군이라지만 지하 수로 냄새가 나는 옷이라니 정말 끔찍하다.
‘나가면 아빠랑 사라가 있겠지. 빨리 씻고 싶어.’
그리고 그때.
“크르르릉…….”
나직하게 들리는 소리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반대 방향의 통로에 거대한 몬스터의 그림자가 비쳤다. 아까 가도에서 우리를 습격한 그 몬스터였다.
왜?
갑자기?
왜 저 몬스터가 여기까지 왔지?
설마 저 몬스터, 세이르를 찾아 온 거야?
“크르르…….”
몬스터는 복잡하게 얽힌 갈림길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점점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지하 수로는 길을 모르면 같은 곳을 헤매면서 빙빙 돌게 된다. 그런데 저 몬스터는 마치 길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저 몬스터, 지능이 높아.’
적어도 길을 기억하고 찾을 정도의 지능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상황이다.
“…….”
“…….”
불행 중 다행으로, 복잡한 구조 덕분에 몬스터와 우리 사이에는 장해물이 제법 많았다. 몬스터는 아직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세이르.’
‘……응.’
우리는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그리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출구는 지척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테다. 몬스터가 우리를 눈치채기 전에 출구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저 철문에 손이 닿기만 하면……. 괜찮다. 살 수 있어.
“찌익, 찍!”
“크르릉!”
희망을 품은 것도 잠시.
어디선가 튀어나온 잿빛 쥐가 몬스터 앞으로 쪼르르 달렸다. 몬스터는 앞발로 쥐를 확 낚아채더니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퍽!
쥐의 시체가 내 발치 앞에 떨어졌다.
“……읏.”
틀렸다.
눈이 마주쳤다.
“크어어어엉!”
“세이르, 뛰자!”
나는 냅다 출구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달려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이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이르가 나보다 달리기가 빠를 텐데.
“저, 저 미친…….”
나는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세이르는 나와 함께 출구를 향해 달리는 대신 통로 중간에 멈춰 서 있었다.
마치 내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저 몬스터를 막아 내겠다는 듯이.
‘안 거야.’
우리가 아무리 뛰어 봤자 저 몬스터에게 잡히지 않고 출구에 도착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짧은 시간에 판단을 마치고, 혼자서 결론을 내린 거다. 자기가 몬스터를 막겠다고.
세이르는 단 한 번도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아직 작고 어린 등을 보자 화가 나다 못해 극도로 슬픈 기분이 들었다.
왜?
무섭지 않아?
죽는 거 되게 아프고 무섭잖아? 그런데 어떻게 주저 없이 죽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야?
어쩌다 보니 세이르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내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세이르를 구할 생각은 없다.
나는 이 세계의 삶을 오래 영위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이런 데서 죽어 버리면…….
‘아빠가 슬퍼할 거야.’
죽어 가는 나를 안고 아빠가 우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왜일까. 그런 일 따위 겪은 적 없는데, 꼭 실제처럼 실감 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저 염세주의 꼬맹이가 보란 듯이 목숨 거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해?
“피이잇! 피이!”
로코가 내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공중을 날았다. 몬스터의 주의를 돌리려는 것 같았지만, 몬스터는 로코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치 목적은 오직 세이르라는 듯.
세이르가 검집에서 성검을 뽑아 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
‘생각해, 안젤리카 데네브.’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
상태창? 지금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모 있는 특성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없다.
몬스터는 잠깐 복잡하게 꼬인 통로와 장해물에 가로막혔지만 곧 세이르의 앞에 도착할 터였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나의 지식, 나의 시간, 나의 기억.
이 세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야.
그러니까 할 수 있어. 생각해.
저 꼬맹이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 제발!
그때, 어떤 물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거다!’
나는 출구 바로 옆의 벽면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노린 것은 빗물을 저장해 둔 수조의 배수 밸브 스위치였다. 이걸 열면 배출구가 저장된 물을 쏟아 낸다. 저 몬스터를 물로 쓸어버리는 거다.
나는 있는 힘껏 밸브 스위치를 당겼다.
“윽, 으으……!”
오랫동안 쓰지 않은 밸브 스위치는 녹이 슬어 무척 뻑뻑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HP가 2 감소합니다. 현재 HP : 6/50]
원래부터 얼마 없던 HP가 쭉쭉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무사히 돌아가면 HP부터 키우고 말 테다.
“으으, 으으윽……!”
[HP가 2 감소합니다. 현재 HP : 4/50]
[HP가 2 감소합니다. 현재 HP : 2/50]
제발 돌아가, 제발!
[HP가 1 감소합니다. 현재 HP : 1/50]
탁!
“윽…… 돼, 됐다!”
손이 타는 듯했다. 피부가 까졌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몬스터가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올라왔다. 나는 밸브를 완전히 열었다.
쏴아아아아!
수조의 배출구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와 몬스터를 뒤덮었다.
“크워어어!”
철퍽!
거센 물살에 몬스터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몬스터는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물살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대로 몬스터는 수로에 떠내려갔다. 영영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검을 꺼내 든 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세이르에게 다가가 뒷덜미를 확 낚아챘다.
“……안젤리카? 왜 도망 안 치고 다시 온 거야?”
“세이르, 너를 살리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을 짓밟지 마!”
“…….”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염세주의 꼬맹이를 살려서 엘나스 호텔로 데려가겠다는 오기.
‘깊이 관여’해선 안 된다느니 다른 나라와 마찰을 빚어서는 안 된다느니. 그런 문제 따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냥 저 죽어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보니 화가 나서.
꼭 살려서 데려간 다음, 퀘스트를 클리어해 줄 테다.
“가자. 또 그런 짓 하면 등짝을 걷어차 줄 거야.”
“……알았어.”
마음 같아서는 몇 마디 더 쏘아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세이르를 잡아끌며 출구를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세이르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나와 함께 달렸다.
“헉, 허억…….”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나중에는 내가 세이르를 잡아끄는 것이 아니라 세이르가 나를 잡아끄는 형태가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무사히 탈출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때.
“크르르르…….”
수로의 물을 헤치며 몬스터가 나타났다.
‘물 양이 부족해!’
가물기라도 했던 걸까. 수조의 물이 예상보다 적어, 어느새 물이 멈춰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몬스터의 외양이 아까와 확연히 달라졌다. 특히 기이하고 빈약하던 다리가 굵고 튼튼해져서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점점 더 변하고 있어.’
저것은 결코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니었다. 환경에 따라 바로 몸을 변화시키는 몬스터라니,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풀쩍!
몬스터가 두 다리로 뛰어올라 수로 밖으로 나왔다. 가공할 만한 점프력이었다.
“……!”
“안젤리카, 뛰어!”
고작 반 층 정도의 계단 위에 있는 출구가 지금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윽……!”
몬스터가 긴 팔을 뻗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몸이 중심을 잃는다.
세이르가 곧장 검으로 몬스터의 팔을 베었다. 그러나 몬스터는 팔이 베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 팔로 세이르를 붙잡으려 했다.
몬스터의 입이 쩍 벌어지고, 길쭉한 이빨이 드러난다.
여기서? 이렇게 어이없이?
충격은 짧았고 체념은 빨랐다. 두 번째 죽음은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계단 위에서 하얀 빛이 비쳤다.
빛은 점점 더 강해지더니, 곧 이 공간을 전부 집어삼켰다. 눈이 부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는데.
파아앗.
하얀 빛이 작은 입자로 부서지더니, 나비로 화했다. 나비 떼가 파도처럼 움직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몬스터를 뒤덮었다.
“크워어어어!”
나비에 뒤덮인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래도 나비 떼는 멈추지 않았다. 하얀 날개를 팔랑거리며 몬스터의 몸을 감싸고, 뜯어 먹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세이르와 나는 꿈쩍도 하지 못하고 나비 떼가 몬스터를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았다.
사아악.
목적을 달성한 나비들이 하나둘 다시 빛의 입자로 화했다. 그 빛의 입자마저도 어둠에 녹아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소름 끼치는 마법.
그리고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계단 위, 창백한 낯빛을 한 남자가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역광을 받아 빛난다.
아빠다.
아빠가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