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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72)화 (73/133)

72화

옆에는 성녀와 용사 인형까지.

그리고 보육원에 방문한 사람들이 마왕 인형을 보며 열렬하게 반응했다.

“이것이 그 화제의 마왕 인형이군요. 멋집니다!”

“아아, 맨눈으로 실물을 볼 수 있다니…….”

“이 작은 인형이 악당들을 물리쳤다고요? 우와아아!”

뭔데. 이 분위기 대체 뭔데.

‘제사상? 아니, 제단? 우상 숭배의 현장? 랜드마크?’

……잘 모르겠다.

이 세계에 실재하는 신전보다도 더 종교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가까이 다가가기 무서울 정도였다.

이대로는 마왕 인형이 히어로를 넘어서 구세주 취급을 받아 버리겠어! 마왕은 흑막이어야 한단 말야!

저걸 어쩌나, 고민하는 그때.

“어, 왕녀님! 언니, 왕녀님이 왔어!”

“와아아! 어서 오세요, 왕녀님.”

“……안녕하세요.”

때마침 보육원 안에서 나온 세 자매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모두들 표정이 밝다.

“안녕. 얘들아, 잘 있었어?”

어찌 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왕 인형 제단이 생긴 통에 아이들이 인형을 안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제단을 가리키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인형 놀이 못 해서 아쉽지는 않아? 내가 돌려달라고 할까?”

그러나 샐리는 씩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샐리가 양보했으니까 괜찮아요!”

“낮에만 저기 두기로 했어요. 다들 좋아하고.”

“왕녀님이 주신 인형이 우리를 구해 줬어요. 다른 사람도 인형을 보며 희망을 얻으면 좋겠어요.”

이건 넬리와 마거릿의 대답.

‘으음, 애들이 괜찮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희망의 상징 마왕 인형이라니, 정말 처음 들어 보는 단어의 조합이다.

나는 마거릿을 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외부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불편하지는 않고?”

이곳 천사의 숲 보육원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늘어난 건 좋지만, 이곳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라고 반드시 좋은 사람일 것이란 법은 없다.

분명 무신경한 말로 이 아이들을 상처 입히는 사람도 나올 테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편견이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내 물음에 마거릿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좋은 사람이 더 많고……. 나쁜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내가 나쁜 건 아니니까요.”

역시 참, 어른스러운 애다.

그때 갑자기 마거릿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왕녀님, 저번에도 같이 오셨던 저 사람은 누구예요?”

“누구? 아, 세이르?”

근처에서 일을 돕고 있던 세이르가 자기 이름이 들리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넬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왕녀님 약혼자예요?!”

“으, 응?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원작 전개를 뒤틀 거니까 약혼 안 할걸? 아빠가 나를 열네 살에 약혼시킬 메리트도 별로 없…….

아니, 잠깐만.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여태껏 안젤리카의 약혼식 날, 크로셀 데네브가 안젤리카와 세이르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았는데, <마.왕.꾸> 게임에서 안젤리카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전 연령 게임이니까 잔인한 장면은 안 나오는 법이다.

게임 내에서의 묘사는 이렇다. 약혼식장에 크로셀 데네브를 배치하고 턴을 종료하면,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폭발음과 함께 텍스트 창이 뜬다.

[<이벤트> 안젤리카 데네브, 세이르 뮨 엘레인이 사망했습니다.

성검 루크바트(S), 10000 골드를 획득했습니다.]

[<이벤트> 데네브 왕국 ‘왕국민’들이 크로셀 데네브를 두려워합니다.

100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이것만으로도 크로셀 데네브가 안젤리카를 죽였다고 간주하기에는 충분했다.

크로셀 데네브는 <마.왕.꾸>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저지르는 냉혹한 성격.

그리고 크로셀 데네브가 준비한 약혼식장이 폭파되면서 안젤리카와 세이르가 사망했고, 크로셀 데네브가 세이르의 성검을 획득했으니까.

흑막 엔딩을 보기 위한 공략집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영 이상하다. 안젤리카와 세이르를 죽여도 크로셀 데네브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세이르가 가진 S급 성검, 성검 루크바트.

이거, 확실히 게임 내에 하나밖에 없는 무척 희귀한 성검이지만, 크로셀 데네브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애초에 크로셀 데네브는 마법사 캐릭터다. 전용 무기인 S급 스태프 ‘심연의 주인’이 있는데 굳이 성검을 쓸 이유가 없다.

실제로 이후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크로셀은 기껏 손에 넣은 S급 성검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세이르가 죽은 뒤 다프네 왕비는 이를 구실로 삼아 데네브 왕국을 공격하려 든다.

‘물론 크로셀 데네브가 더 세지만. 아무리 다프네 왕비라고 해도 우리 아빠를 이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른 시기부터 이웃 나라가 야욕을 드러내면 게임 진행이 상당히 피곤해진다.

정리하자면, 안젤리카와 세이르를 죽여 보았자 크로셀 데네브에게는 손해다. 그리고 악행조차도 도구로 사용하는 진정한 흑막은 손해가 될 일은 하지 않는 법이다.

‘왜 이제까지는 이 생각을 못 했지?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답지 않은 행동이야.’

하지만 크로셀 데네브가 안젤리카와 세이르를 죽인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넬리 언니는 바보야!”

나는 한참 생각에 빠져 있다가, 샐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샐리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약혼자가 아니라 왕녀님 남자 친구라구!”

“남자 친구?! 우와아…….”

“왕녀님, 어른 같아요…….”

아이들이 눈을 반짝거렸다.

이런. 내가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아이들이 사실과 영 딴판인 추측을 한 모양이다.

“저기, 얘들아, 아니야. 나도 아직 열 살인데?”

“토미는 아홉 살인데 여자 친구 있어요!”

“그, 그래…….”

보다 못한 세이르가 다가와서 끼어들었다.

“얘들아, 안녕.”

“안녕하세요…….”

방금까지 즐겁게 떠들어 대더니 이번에는 낯을 가린다. 마거릿 뒤로 숨은 샐리가 고개만 살짝 내밀고 물었다.

“오빠가 왕녀님 남자 친구예요?”

“샐리! 실례니까 그런 말 하면 안 돼.”

“언니도 궁금하면서!”

“그, 그야 궁금하긴 하지만…….”

세이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그건 아니고. 나는 안젤리카 부하야.”

“부하……요?”

넬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안젤리카한테 중요한 걸 빚져서 부하가 되기로 했어.”

세이르의 말을 곱씹는 듯 아이들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 박자 늦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멋있어요!”

“그러면 왕녀님이랑 같이 나쁜 놈들을 해치우는 거예요?”

“뭐, 그런 셈인가……?”

“샐리, 너무 꼬치꼬치 캐물으면 실례라니까.”

박수를 짝짝 치는 넬리나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지는 샐리나, 동생들을 말리려 하다가도 귀를 쫑긋 세우는 마거릿이나…….

여기 더 있다가는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마거릿이 다시 나를 불렀다.

“저어, 왕녀님.”

세이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것도 그만두고, 마거릿의 양옆으로 샐리와 넬리가 섰다. 아이들은 모두 등 뒤로 손을 돌리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으응, 왜?”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앞으로 내밀고 등 뒤에 감춘 것을 보여 주었다.

“자투리 천으로 만든 거지만……. 왕녀님께 드리고 싶어서요.”

아이들이 내민 것은 솜 인형이었다.

내가 만든 20cm 마법 인형과 비슷한 디자인과 크기다. 조각 천을 썼는지 무늬는 제각각이었지만 꽤 귀엽다.

마거릿이 수줍어하면서 설명했다.

“왕성에서 천을 많이 보내 주셔서, 원장님이 새 옷을 지어 주셨어요. 그러다 자투리 천이 많이 남아서…….”

“…….”

이 아이들이 나한테 주겠답시고 자그마한 손으로 인형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아주 부드러운 깃털이 뺨을 간질이는 느낌.

내 정신 연령은 어리지 않고, 인형 놀이는 졸업한 지 오래지만!

이런 물건을 받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고마워, 잘 받을게.”

그런데 샐리의 등 뒤에 놓인 나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 안에는 산더미 같은 20cm 솜 인형이 들어 있었다.

“샐리, 인형이…… 엄청나게 많은데?”

“언니랑 같이 만들었어요!”

“재미있어서 너무 많이 만들었거든요.”

모든 자투리 천을 인형으로 만드는 바람에 처치 곤란이라며 마거릿이 웃었다.

아니, 가만, 잠깐만.

나는 상자에 담긴 인형들을 보다가 불쑥 말했다.

“얘들아, 이 인형들, 팔래?”

인형을 팔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마거릿은 크게 당황했다.

“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런 인형이 팔릴지…….”

“……로디!”

“네에에…….”

나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 로디를 소리쳐 불렀다. 사라의 지시에 따라 이런저런 일을 돕고 있던 로디가 흐느적흐느적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인형을 매입하고 싶다는 제안 말인데, 아직 유효해?”

“네……. 그야 물론이죠. 역시 인형을 만드실 생각이 드셨나요?”

“아니, 나는 인형 안 만든다니까.”

위대한 흑막의 외동딸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면요……?”

나는 주머니에서 새끼손톱의 절반만 한 마석을 꺼내 인형 안에 넣고 마력을 주입했다.

[MP가 10 감소합니다. 현재 MP 490/500]

살짝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인형에 마법이 부여되었다. 지난번처럼 갑자기 인형이 움직이는 일을 막기 위해 마력 양을 줄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이 과정을 반복해서 상자 안의 인형 전부에 마력을 주입했다.

“이렇게 하면 어때? 같은 매입 조건으로.”

“…….”

로디는 잠시 말이 없었다.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마왕 인형이 아닌 이 인형이 얼마나 수요가 있을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늘 기운 없고 의욕 없어 보이지만 본업에는 진심인 모양…….

“정말 귀엽네요…….”

……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던 거였구나.

곧 결정을 내린 로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팔아만 주신다면 전부 매입하고 싶습니다……. 아까 제안드린 조건과 같게 개당 3 골드에.”

“네, 네에에? 이…… 이런 인형 하나에 3골드요?! 그렇게 비싼 돈을 받을 수는 없어요.”

마거릿이 화들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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